[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정소영 - 감독

by.배수경(영화사연구소 객원연구원) 2015-11-03조회 5,147

정소영 감독이 2013년 10월 11일 작고했다. 감독의 구술을 채록하기 위해 만난 것은 2008년 여름이다. 첫 번째 구술에서 정소영 감독은 다가올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단명한 부친과 먼저 떠난 형제자매들에 대한 기억을 환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이야기지만 혼자 쓸쓸히 맞게 될 죽음을 얘기하는 구술자의 담담함에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구술을 통해 작가성을 발견하고자 했던 면담자는 외로운 죽음을 상상하는 구술자의 모습에서조차 멜로드라마의 거장다운 감수성을 찾아내려 애썼던 것 같다. 그러고는 화제를 성공가도를 달리던 시절, 구술자가 만든 영화 속 세상이 스크린을 찢을 듯한 기세로 휘몰아쳐 관객을 울렸던 그 시절로 되돌리려 했다. 하지만 화려했던 시절의 반짝임 만큼 그림자 또한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니 당시 나는 구술자가 보인 무심함이나 건조함 속에 자리하던 그림자에는 결코 다가가지 못했다. 역사적 지식의 부족함보다 더 모자란 것이 그림자까지 헤아리는 깜냥이었다. 구술 내용을 다시 읽다보니 죄송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한 편의 드라마 같은 굴곡진 삶 
구술자는 드라마를 사랑했고 그의 삶 또한 드라마 같았다. 어린 시절부터 동양극장 청춘좌의 신파극에 매혹당했던 그가 연극에 빠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국학대학 시절에는 완고한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극단을 만들어 지방 흥행을 다녔다. 대학연극경연대회 참가작 <항구없는 항로>라는 작품으로 지방을 순회하며 공연했는데 당시 대회에 올린 여타 번안극과 달리 한국 사회의 아픔을 배경으로 한 창작극이라 관객들의 공감을 자아냈기에 선택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어머님의 쌈짓돈에 빚을 더해 도전한 비전문 극단이 성공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부친은 연극에 빠진 아들 정소영을 형편없는 놈이라 다그쳤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을 감행해 부친과의 골은 더 깊어졌다. 결국 서울을 떠나 아내와 함께 원주에서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한다. 그러던 어느 날 부친의 사망 비보를 듣게 된다. 서둘러 서울로 돌아왔지만 화해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주변에서 ‘매일 매만 맞고 아버지에게 정도 없을 텐데 왜 저렇게 우나’ 여길 정도로 통곡했다. 이미 떠나버린 아버지 앞에 그는 영원한 죄인이었다. 

너무 늦게 찾은 부정, 한결같이 지지해줬던 어머니, 가족 간의 갈등, 성공 이후의 굴곡 등 구술자의 삶 자체가 멜로드라마였고 그는 그 드라마의 주인공이자 감독이었다. 대학에서 극단을 만들어 흥행에 뛰어들고 결혼을 하고 부친을 여읜 것이 그의 나이 23세까지의 일이다. 좌충우돌하던 그의 삶은 6.25전쟁 후, 방송국 드라마 연출자로 활동하며 자리잡아갔다. 

1949년 육군공병학교에 들어가 1955년 육군소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7년간 군 생활을 했다. 그리고 1956년 대학 연극 모임 친구이던 성우 황태수의 소개로 종각에 있던 RCA 텔레비전 방송국의 프리랜서 드라마 작가로 데뷔한 이후 KBS텔레비전 방송국이 개국하자 KBS에서 프리랜서 드라마 작가 및 연출자로 활동한다. 첫 방송 드라마 연출작은 구술자가 직접 각본을 쓴 <그밤에 이르기까지>이다. 생방송으로 드라마를 찍고 송출하던 시기 처음으로 야외 로케이션을 시도했다 하니 연출자로서의 의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고집 센 방송기술자들과 정규직 방송국 직원들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발휘했는데 이에 대해 구술자는 스스로를 교만했다고 술회한다. 

시대를 위로하는 통속의 힘 
방송가에서 인기를 얻고 있었지만 진정한 연출은 영화 연출이라는 박종호 감독의 설득에 구술자는 나이 마흔에 영화계에 뛰어든다. 먼저 박종호 감독의 작품 두 편을 제작하고 난 뒤 영화 <내 몫까지 살아주>(1967)의 연출을 시도한다. 하지만 방송국에서 넘어온 늦깎이 신인감독에게 투자할 지방 흥행사들은 없었다. 결국 구술자가 집적 제작과 연출을 맡아 완성, 개봉했다. 비록 제목부터 신파라며 자조적으로 평가했지만 이 작품으로 관객 수 10만을 넘기는 흥행 감독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후속작은 청룡영화제 신인상 수상작인 <규방>(1968)이었다. 가부장제 사회 속 여성들의 애환을 그린 옴니버스 시대극으로 구술자가 어머니에게 갖고 있던 애틋한 감정을 모티프로 해 만든 작품이다. 작품성을 인정받고 상은 받았으나 흥행 성적은 좋지 않았다. 흥행성과 작품성 중 그가 선택한 것은 관객이 찾는 영화였다. 그래서 세 번째 작품은 흥행을 염두에 두고 만든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1968)이다. 귀신 붙은 영화라는 말이 돌 정도로 객석이 미어터졌다. 인기만큼 주변의 시기와 소란도 많았다. 시나리오 작가와는 제목의 권리를 두고 법정 다툼을 벌였고 지방 흥행사들은 판권을 얻으려 영화사 직원에게 로비를 벌였고, 믿었던 직원에게 배신당하고. 구술자가 말한 사건은 아마도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 구술자에게 이 영화는 영화뿐 아니라 관계된 사건과 사람들 모두를 떠올리는 기억일 것이다. 

구술자는 2003년 영상자료원 ‘영화의 고향을 찾아서’ 행사의 일환으로 <미워도 다시 한 번>의 묵호 로케이션 현장에서 영화를 다시 본 적이 있다. 이 영화에 대한 관심과 평가가 못내 부담스러운 것 같았다. 심지어 영화 속의 늘어지는 현악기 소리와 너무 많은 음악의 사용은 연출자의 잘못이라 지적했다. 음악을 과할 정도로 양식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멜로드라마 장르의 핵심 요소가 아니냐는 면담자의 반문에도 고개를 저었다. 구술자는 그저 널리 통하는 통속에 능한 작가로 자신을 다스리는 것 같다. 그리고 통속을 위해 자신의 삶과 당시 사람들의 삶을 참고했을 뿐이다.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헤쳐나갈 수 없는 답답한 상황, 그저 눈물만 흘리는 미약한 인물들의 이야기는 삶의 모순이 쉽게 풀리지 않더라는 일반적인 경험을 재현하며 우리를 위로한다. 눈물을 흘리게 만든 그의 영화는 암담한 시대 혹은 혼란스러운 시대를 통과하는 사람들을 위한 통속이고 애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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