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전창근 - 감독

by.김종원(영화사 연구자) 2015-11-03조회 4,188
전창근 감독

영화계에서는 지사의 풍모를 가진 엄격한 선배로, 가정에선 자상하고 인자한 아버지로 알려진 전창근(全昌根) 감독은 고혈압으로 쓰러지기 전까지만 해도 평소 자주 드나들던 남대문 근처의 다방에서 친구들과 담소하며 구상 중인 작품에 대해 설명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그의 호방하고 다정다감한 기질은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두드러졌다. 그가 있는 자리에는 늘 활기가 넘쳤다. 동작의 폭도 컸고 사람을 끄는 힘도 있었다. 그의 몸짓 가운데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말할 때 상대방의 어깨를 툭 치는 일이었다. 이 버릇은 친근감을 나타내는 그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이분을 반년 가까이 한 직장에서 모신 적이 있다. 창립 초기 서울 만리동에 자리 잡은 동성영화공사(대표 정병준) 시절이었다. 1962년 봄부터 가을이었을 것이다. 영화사 이름보다 만리동 촬영소로 더 잘 알려진 동성영화공사에는 고문인 전창근 선생 외에 시나리오작가 이정선 씨가 기획실장으로 근무했다. 기획실 벽에는 알랑 레네, 유현목 공동감독의 <파리에 간 한국여대생>(알랑 로브그리에 원작)을 비롯한 6편의 호화 라인업을 자랑하는 작품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 가운데 안익태의 교향악적 환상곡 ‘<코리아 판타지>(1936)’를 원작으로 한 <한국환상곡>이 창립 기념작으로 결정돼 제작발표회를 열었다. 조선호텔에서였다. 

이 자리에는 작곡가 안익태 씨는 물론 주한 외교관들과 노기남 대주교까지 참석했다. 당시로선 유례없는 행사였다. 사회는 이 영화의 각본을 담당한 이진섭 씨가 맡았다. 그는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을 작곡할 정도로 다재다능한 데다 프랑스어에도 능했다. 나는 이전에 그가 구사하는 프랑스어를 들은 적이 있다. 명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샹송가수 이베트 지로의 내한 공연 때였다. 그런데 전창근 선생이 <한국환상곡>의 연출을 맡게 된 것이다. 나는 다음 날 그를 따라 안익태 씨가 묵고 있는 반도호텔(현 롯데호텔)로 찾아가 앞으로 나올 시나리오의 방향에 대해 의견을 들었다. 그러나 록 허드슨과 필립 안을 출연자로 내세워 홍보한 <한국환상곡>은 얼마 못 가 작업이 중단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과욕이 빚어낸 일장춘몽이었다. 아니, 한국영화제작사(史)에 남을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이 회사의 기획실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정병준 사장의 친구이자 문학도였던 대학 선배 김희로(전 부산시민단체협의회 상임대표) 씨의 소개로 시나리오의 집필을 부탁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회사가 마련해준 만리동 고개의 영화촬영소 앞 봉래여관에 묵으면서 나는 미리 정해준 <아내 일곱 가진 사나이>라는 제목에 맞춰 시나리오 집필에 매달렸다. 하지만 두 달이 지나도 마무리할 수가 없었다. 글을 쓰는 짬짬이 회사의 일을 도와야 하는 데다 밤늦게 영화의 녹음을 끝낸 성우들이 여관으로 몰려와 술자리나 포커판을 벌이는 바람에 속도가 붙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야간 통행금지 제도가 있어 여관을 찾는 사람이 많았다. 그렇다보니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대개 이런 날엔 전창근 선생의 우렁찬 목소리가 아침부터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김군, 아직도 자나?”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방 앞에까지 와서 “종원이, 방에 있나?” 이렇게 깨우곤 했다. 

그는 비록 <한국환상곡>은 무산되었지만, 대안으로 내놓은 자작 시나리오 <운명의 골짜기>에 대한 소감을 묻고, 촬영에 들어가면 아내(유계선)와 딸(전향이)을 출연시킬 생각이라는 계획까지 들려주었다. 그는 보통 나를 “김군!”으로 지칭하다가도 얘기가 마음에 들거나 기분이 좋을 때면 농담조로 “어이 내 사위!”하며 어깨를 툭 치는 것이었다. 이런 나에게 시나리오 대신 부여된 일이 기획실 상근이었다. 무엇보다 글쓰기의 족쇄에서 풀려난 데다 유명한 감독과 한방을 쓰게 된 것이 더욱 기뻤다. 게다가 제작 현장을 익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전 선생은 평소에도 입이 건 편이었다. 그전에도 그가 친구들과 나누는 농담을 들은 적이 있는데, 특히 영화인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던 명동 나일구다방 시절의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가깝게 지낸 유두연(劉斗演) 감독(영화평론가 유지나 교수의 부친)과 얘기를 나누던 중에 “자네, 미로뎁보 맞아보니 어때? 죽여주지?”이런 말을 하며 크게 웃던 모습이 대표적인 예다. 미로뎁보는 1960년대 초 일부 남성들 사이에 성행한 정력제 주사였다. 

쾌활한 투사의 이미지로 남은 영화인 
1908년 1월 18일 나운규를 배출한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전창근 선생은 회령소학교를 다녔다. 그가 고등과 시절부터 활동사진과 연극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 데는 이런 선배들의 영향이 컸다. 그가 나운규의 도움에 힘입어 윤백남프로덕션의 연구생으로 들어간 것은 <심청전>(이경손, 1925)을 끝내고 다음작품을 준비할 때였다. 그때만 해도 고향의 어머니로부터 매달 30원의 학비를 받는 학생 신분(중앙고보 2학년)이었다. 그런데 고려키네마와 공동 제작한 이 프로덕션의 두 번째 작품 <개척자>(이경손, 1925)에서 미치광이 역을 맡아 카메라 앞에 선일이 알려지면서 송금이 끊겼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나운규가 광대가 된 자식 때문에 낙심해하는 회령의 그의 어머니를 찾아가 다시는 활동사진에 나오지 못하도록 책임지겠다고 약속한 뒤에 야 겨우 돈을 받을 수 있었다. 나운규는 전창근 선생보다 여섯살 위였지만, 친구처럼 가깝게 지낸 사이였다. 전 선생의 학비는 물론 하숙집 밥을 축내기 일쑤였고, 심지어는 팬티까지 얻어 입을 정도였다. 01) 

전창근 청년은 윤백남프로덕션이 해산되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는 이후 정기탁 감독의 <애국혼>(1930)과 이경손 감독의 <양자강>(1931) 등에 출연하고, 1938년 고국으로 돌아와 <복지만리>(1941)를 각본, 감독, 주연을 맡아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관객에게 심어준 인상은 각본을 쓰고 연출하는 영화작가로서보다는 <자유만세>(최인규, 1946)의 지하 독립운동가나,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전창근, 1959), <아아 백범 김구선생>(전창근, 1960)의 경우처럼 항일 독립투사의 이미지였다. 

항상 스포츠형의 짧은 머리와 혈색 좋은 모습으로 장년의 힘을 과시했던 만능 영화인 전창근 선생은 고혈압으로 쓰러진 뒤 1973년 1월 19일 요양 중이던 경기도 고양군 삼각산의 작은 절효자암에서 예순여섯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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