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박남옥 - 감독

by.김종원(영화사 연구자) 2015-11-02조회 1,668

미인은 아니었다. 남성처럼 호방하고 활달했지만 달필에다 의외로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박남옥(朴南玉) 감독에게서 받은 인상이다. 내가 박 감독을 처음 뵌 것은 1981년 4월 20일 오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유현목 감독의 소개로 서울 서대문 화양극장 뒤쪽에 있는 한 경양식집에서였다. 나는 그때 <일간 스포츠>의 청탁을 받고 기획 연재물 ‘인물영화사’에 대한 자료를 정리 중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박 감독에 대해 쓰고 싶었으나 관련 자료가 빈약해 일차 집필 대상에는 빼놓은 상태였다. 그랬는데 뜻밖에 미국에 살고 있던 그가 잠시 귀국했던 것이다.

만나고 헤어진 지 5일쯤 지났을까 그가 편지를 보내왔다. 엷은 미농지 넉 장에 볼펜으로 쓴 달필의 편지에는 추가 내용과 함께 간곡한 부탁이 들어 있었다. 비록 그의 표현대로 ‘일제(日帝) 교육 덕에 철자법’이 틀리긴 했지만 주요한 부분에는 삼각표시(△)를 하는 등 인상과는 달리 매우 꼼꼼한 성품의 일면을 보여주었다. 이를테면 그가 광복 전 세운 투포환 한국 신기록 수립 연도를 재확인하면서 광복 후는 백옥자지만 광복 전은 박남옥이라고 기재하거나, 집필에 참고가 될 만한 자신의 과거사 게재 잡지<신여원>를 알려 주었다. 심지어 데뷔작 <미망인>의 스틸까지 지정하고, 이혼한 남편(방송연출가 이보라)에 대한 얘기는 되도록 쓰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그런가 하면 ‘리어카 이동차’를 탄 사진은 흥행 가치가 없으니 내지 마세요 하거나, 제7회(1960년) 동경 아시아영화제 때 일본배우 미후네 도시로(三船敏郞)가 그에게 담뱃불을 붙여주는 스냅 사진에 대해서는 “멋은 있어도 좀 건방질까?” 이렇게 타진하는 식이었다.

1955년은 6.25전쟁 복구와 함께 영화행정 업무가 국방부에서 문교부로 이관되고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이 흥행에 크게 성공해 국산영화가 기업의 기틀을 마련한 해였다. 그 뿐만 아니라 무성영화 시대부터 활약해온 배우 이금룡이 별세하고 그를 기리는 최초의 민간 영화상인 금룡상(錦龍賞)이 제정돼 시상되기도 했다. 이런 시기에 이 나라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이 탄생했다. 그의 처녀작이자 마지막 작품이 되어버린 이보라 원작 각본 <미망인>은 6.25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한 여성의 욕망과 좌절을 그린 것이다.

박남옥 감독은 1923년 2월 24일 경북 경산군에서 섬유업을 하는 박씨 집안의 10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달리기를 잘해 초등학교 때 이미 도대회에 선발될만큼 운동감각이 뛰어났다. 그래선지 경북여고 재학 중일때 단거리 달리기와 높이뛰기 선수로 뽑혀 경기에 나가 입상했고, 1939년 제2회부터 41년까지 투포환 선수로 조선신궁봉찬체육대회에 참가해 3년 연속 우승, 한국최고기록을 보유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 반면 미술과 문학에도 남다른 재주를 보여주었다. 3학년 무렵 그는 최인규 감독의 <집없는 천사>(1941)를 보고 꽃 파는 소녀 역을 맡은 김신재에게 반하면서 영화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이 무렵 그는 장차 화가가 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희망과는 달리 집안의 압력에 굴복해 미술이 아닌 가정과에 진학하게 된다. 광복 전인 1943년이었다. 정작 남들이 부러워하는 이화여전(梨花女專)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공부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오히려 헌책방을 뒤지거나 영화를 보는 일에 더 열을 올렸다. 그래서 기숙사감의 눈총을 받기 일쑤였다.

이 무렵 그는 성장기 여학생들의 감성을 다룬 <제복의 처녀>(레온티에 사간, 1931)와 레니 리펜슈탈 감독의 베를린올림픽 다큐멘터리 <민족의 제전>(1936)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특히 그가 이 영화를 각별히 좋아하게 된 이유는 두 편 다 여자가 연출했다는 점이었다.

박 감독은 결혼을 강요하는 부모에게 맞서 가정과를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1944년 일본인이 경영하던 대구 일일신문의 기자로 입사했다. 그는 여기서 광복을 맞았다. 하지만 2년도 안 돼 다시 서울로 올라와 본격적인 영화의 길에 들어선다. 첫발을 내디딘 곳이 조선영화사(사장 이재명) 광희동 촬영소였다. 그는 거기서 뉴스 편집 일을 거들며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 이규환 감독의 <똘똘이의 모험>과 <민족의 새벽>(이상, 1946)의 편집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이후 최은희를 데뷔시킨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세>(1946)의 스크립터 일을 맡게 된다.

50년 초여름 박남옥은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고향으로 선을 보러 갔다가 6.25전쟁을 겪는다. 그는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한형모 감독을 따라 국방부 촬영대의 일원으로 김석원 장군이 지휘하는 영천작전에 참여했다. 그가 방송극작가 조남사의 소개로 방송극 연출가인 이보라(李保羅)와 백년해로를 기약한 것은 1954년 서른세 살 때인 부산에서였다. 9.28수복 후 관훈동 종로학원 자리에 신혼살림을 차리고 첫딸 경주를 낳았다.

그가 언니 돈까지 끌어들여 제작한 <미망인>은 낳은 지 두 달도 안 된 딸을 들쳐업고 찍은 영화였다. 20여명의 스태프에게 밥을 해먹이고 리어카 이동차에 올라 앉아 고무신 차림으로 레디고를 외치는 그의 모습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중앙극장에서 개봉된 영화는 4일만에 간판을 내리는 참패로 끝났다. 게다가 결혼생활마저 순탄치 못했다. 심한 성격 차이로 남편과도 3년 만에 헤어지고 말았다. 1956년이었다.

영화 실패와 파경으로 인생에 회의를 느낀 박 감독은 <시네마 팬>이라는 월간 영화잡지를 창간해 스크린 대신 활자로 승부를 내고자 했다. 그러나 이마저 쉽지 않았다. 제3자에게 판권을 넘기고 57년 둘째 형부 김상문(金相文)이 운영하는 동아출판사에 들어갔다. 78년 퇴사할 때까지 21년 동안 관리과장으로 근무했다. 2년 뒤 그는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드라마센터에서 연극을 공부하다가 UCLA 디자인과를 나온 딸이 있는 로스앤젤레스로 떠났다.

박남옥 감독은 소주 2~3병은 눈 깜짝할 새에 마시는 주량과 ‘골초’라는 말을 들을 만큼 대단한 애연가였다. 또한 웬만한 권투 중계 프로는 놓치지 않았던 복싱 팬이기도 했다. 나는 박 감독과 만나기 전에 그의 남편이었던 이보라 선생을 먼저 알았다.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 사이 문인들이 즐겨 찾던 명동의 ‘갈채다방’과 기독교방송국이 있던 종로 2가의 ‘시온다방’ 시절이었다. 그는 스포츠형 머리에 미소 머금은 모습으로 나타나 주태익, 조남사 등 주로 방송극작가들과 자주 어울리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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