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단역으로 마감한 60년 영화 인생, 감독 겸 배우 손전

by.김종원(영화사 연구자) 2015-08-01조회 1,700

내가 손전(孫傳)이라는 배우를 알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내가 넘은 38선>(손전, 1951)이라는 영화를 단체관람으로 보고 나서다. 그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이 작품은 북한에서 지주를 반동으로 모는 데 앞장섰던 청년이 귀순해 국군이 되어 먼저 월남한 지주의 아들과 함께 북진 대열에 참여했다가 전사한다는 이야기다. 이후 그는 <공포의 밤>(1952, 각본?주연)과 <여자의 열쇠>(1963)에 이어 <쌍무지개 뜨는 언덕>(1965)의 메가폰을 잡았다. 이 가운데 <쌍무지개 뜨는 언덕>을 제외한 두 편은 보지 못했으나, <내가 넘은 38선>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렇게 알게 된 손전 선생과 1980년대 초 인사를 나눈 것으로 기억된다. 영화인협회가 지방에서 주최한 세미나 자리였다. 그때 나는 연사로 참석했었다. 그러니까 그가 전성기를 보내고 제2의 영화의 길로 들어선 지 한참 지난 시기였다. 1부 행사를 마치고 잠시 쉬는 시간에 그가 먼저 인사를 했다. 그 뒤 한번은 <도쿄 이야기>와 <맥추(麥秋)> 등 시나리오를 게재한, 일본의 어느 출판사에서 간행한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 작품집>을 서명을 넣어 보내주기도 했다. 그는 달필이었다. 그는 배낭에 성경책과 영어사전을 늘 챙겨 넣고 다녔다.

이런 손 선생과 더욱 가까워지게 된 것은 내가 몇 년째 심사를 맡고 있는 청룡영화상에서 그가 특별공로상을 받게 되면서부터다. 1994년 12월 제15회 때였다. 이해 처음 1000만 원 상금이 걸린 특별공로상 부문이 신설되었는데, 시상식이 끝난 며칠 뒤 손 선생으로부터 만나자는 전화가 걸려왔다. 약속한 어느 호텔 레스토랑에 나갔더니 고맙다며 점심을 샀다. 솔직히 말하면 심사위원 대부분은 그를 단역배우로만 알고 있을 뿐 주연과 감독 경력이 있는 전력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손 선생은 그 뒤부터 연말이면 연하장을 보냈다. 5개월쯤 지나서였을까. 차나 한잔하자고 해서 뵈었더니 메고 있던 배낭에서 원고 한 뭉치를 꺼내는 것이었다. 집에 와서 읽어보니 영화에 대한 견해와 걸어온 자취를 기록한 원고지 300매 분량의 <배우는 누구나 될 수 있다>(부제 ‘나의 영화 인생 60여 년’)는 제목의 글이었다.

당시 ‘일간스포츠’나 ‘스포츠서울’ 같은 연예 스포츠 신문에는 배우들의 이야기가 연재되는 일이 많았다. 그는 이 같은 지면을 의식한 모양이었다. 그의 글을 지면으로 소개하기엔 대중성이 떨어지고, 단행본으로 엮기엔 분량이 모자란다고 판단했다. 한 달 뒤 약속 장소에서 다시 만나게 되자 일단 내용을 보충하고 분량도 늘릴 것을 제안했다. 그런데 손 선생은 완성된 원고를 내게 건네지 못한 채 1999년 9월 8일 89세의 나이로 별세하고 말았다.

1910년 1월 27일 경상북도 대구 태생인 손전의 본명은 손병철(孫秉喆)이다. 그는 손자까지 영화의 대를 잇게 해달라는 뜻으로 손전(孫傳)이라는 예명과 함께 손일포(孫一圃)라는 또 하나의 예명을 가졌다. 그가 영화에 처음 출연한 것은 스물여섯 살 때인 1936년 이규환 감독의 <무지개>의 삼촌 역을 맡으면서부터다. 이를 발판 삼아 신경균 감독의 <순정해협>(1937)에선 주연급으로 올라섰고, 일제강점기 말에는 조선영화사의 관제 영화 <젊은 모습>(1943), <조선해협>(1943), <거경전>(1944), <병정님>(1944) 등에 출연했다.

광복 후에는 <똘똘이의 모험>(1946)의 똘똘이(구민 역)의 아버지 역을 비롯해 <민족의 새벽>(이상 이규환 감독, 1947), <조국의 어머니>(윤대룡, 1949)에 출연했다. 이렇게 볼 때 그는 데뷔작인 <무지개>부터 <똘똘이의 모험>, <민족의 새벽>에 이르기까지 이규환 감독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전성기는 <내가 넘은 38선>을 정점으로 그 후광에 기대 명맥을 이은 <쌍무지개 뜨는 언덕>(1965)까지 14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이성구 감독의 <일월>(1967) 의 형사 역을 계기로 30여 년 동안 개런티 개념이 아닌 일당을 받는 단역배우의 길을 걷게 된다. <>(1967), <사랑>(1968), <역전파출소>(1969), <태백산맥>(1975), <장마>(1979), <안녕하세요, 하나님>(1987), <서울 무지개>(1989)>, <개벽>(1991) 등 1500여 편에 그의 자취가 남아 있다. 그는 한때 서울 창신동 언덕배기 2만5000원짜리 전셋집에 살며 단역배우 생활로 300만 원을 모으는 데 16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가 필자에게 건넨 원고에는 몇 가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있다. 그중 하나가 광복 전부터 영화인들이 크랭크인에 앞서 고사(告祀)를 지낸 관행이다. 조선영화사는 촬영에 앞서 반드시 가미사마(神樣) 앞에 스태프와 배우를 모아놓고 제를 올렸다. 정종, 팥밥(赤飯), 기타 음식을 차려놓고 예를 올리고 사원들에게 배불리 대접하는 것이 상례였다. 또 한 가지는 이규환이 어용 영화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배경이다. ‘연조가 깊고 실적이 있었던’ 그가 조선총독부의 통제 아래 들어간 관제 조선영화주식회사의 감독 진용에 누락, 졸지에 ‘무직자’가 되면서 수원 탄광으로 끌려갔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규환 감독의 <새 출발>(1939) 기술시사회가 명동의 명치좌에서 열렸을 때 일본인 시나리오작가 니시키 모토사다(西龜元貞)가 들어왔다. 이를 본 이감독이 불청객이 들어왔다며 단호히 제지한 적이 있었다. 그 후 이 사람이 조선영화사의 고문이 될 줄은 몰랐다. 그 보복으로 감독진에서 빠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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