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임원식 - 감독 - 분출하는 에너지, 반추의 여유

by.김종원(영화사 연구자) 2008-11-11조회 5,683

임원식(林元植)은 1960년대 김기영, 유현목과 함께 한국영화 전성기를 주도한 트로이카 디렉터 가운데 가장 막강한 세력을 형성한 신상옥 사단이 배출한 감독이다. 신상옥은 일제시대에 등장하여 광복기까지 우리나라 영화계를 이끌다가 납북된 <자유만세>이 감독 최인규(崔寅奎)의 조감독 출신으로 그 밑에서 연출 수업을 받고 데뷔한 인재만도 강대진(1959년 데뷔), 이형표(1961), 장일호(1961), 최인현(1962), 임원식(1965), 나봉한(1965), 변장호(1967), 이경래(1971), 이장호(1974) 등 10여 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는 강대진, 최인현의 경우처럼 고인이 된 사람도 있지만 오늘날 한국영화의 대들보로서 확고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분들이 적지 않다. 임원식 감독은 그 중 한 사람이다, 한국영화감독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어서만이 아니다. 그는 단체장은 처음이지만 영화사의 임원과 사장으로서 현장을 지키며 역할을 수행해 왔다. 남들이 스스로 좌절하여 영화계를 떠나가너 세를 형성하여 조직에 뛰어들 때 그는 이에 관계없이 일을 도모하고자 했다. 

해방 이후 어느 때보다 신구의 갈등이 심한 영화계의 현상을 감안할 때 그가 뒤늦게 60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로 영화감독협회 회장의 자리를 맡게 된 이유는 자명하다. 급격한 세대 교체의 격랑 속에서 몰락해 가는 원로층을 감싸고 젊은 감독을 포용하는 일은 작품 활동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230명의 회원을 이끄는 그의 헌신적인 노력과 의지는 일부의 우려를 씻고 안정적으로 협회를 운영해 나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임원식은 1935년 1월 22일 황해도 평산에서 유고적 가풍이 강한 천도교 집안의 3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임수동(林壽東)은 한말 의병에 참여했다가 부상을 입고 귀가한 후엔 집안을 일구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그래서 소작농을 부릴 만큼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얼마못가 찾아온 조국의 해방은 그들에게 오히려 시련을 안겨 주었다. 북한 공산주의 정부는 부친을 지주로 몰아 더 이상 농토를 지킬 수 없게 만들었다. 그나마 고향에서 누천(漏川)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던 건 다행이었다. 

해방이 되던 1945년 12월 성탄절에 월남하여 4년제 휘문중학을 나온지 몇달 만에 이번에는 예기치 못한 6.25전쟁이 일어났다. 정부가 대전으로 옮기면서 그는 학도병으로, 가족들은 대전에서 제주도로 피란했다. 얼마 후 그는 제주에서 부모들과 합류했다. 황해도 태생인 그가 졸지에 제주도에까지 내려오게 된 것은 운명적인 일이었다. 여기에서 일생의 반려가 된 고경희 여사를 만나 뒷날 영화감독이 된 종호(우뢰매), 종재(우리들만의 세상) 두 아들을 얻게 되었을 뿐 아니라 부친의 죽음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제주에서 오현고등학교를 다녔다. 동기생 가운데는 뒤에 국회의원과 농림부장관을 지낸 강보성과 서강대 명예교수인 문학평론가 박철희가 있었고 2년 후배로 시인이며 영화평론가인 김종원이 있었다. 그때 임감독은 이 학교의 총학생회 회장이었다. 후배들이 떨만큼 확실하게 ''군기''를 잡아 나갔다. 도내의 어떤 ''어깨''도 그에게는 시비를 걸지 못했다. 그야말로 배포와 카리스마가 있는 학생회장이었다. 이 무렵 그는 제주여고 학생과 연애중이었다. 꽤 알려진 미인이었다. '임원식이 삼성여관 딸과 연애한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교정을 넘어 타교 학생들의 귀에까지 들어갈 정도였다. 학생의 연애가 금기시되던 당시의 사회 통념으로 더욱이 공공연한 소문이 나돌 만큼 둘의 관계가 발전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자 대학생인 신분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종로의 중앙예식장(지금의 종로예식장)에서였다. 가마타고 올리는 색다른 것이었다. 그다운 결행이었다.
대학은 용산구 후암동에 있던 서라벌예술학교였다. 이에 앞서 동국대학 국문과에 들어갔으나 연극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선 보다 전문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믿어 선택한 결과였다. 서라벌예술학교 연극영화과로 옮기면서 그는 1년을 월반했다. 동기생 가운데는 졸업 후 영화계로 진출한 전조명(田朝明), 장석준(張錫俊)이 있었다. 유명 촬영감독이 된 실력파들이었다. 그리고 연기 쪽에는 성우로 이름을 떨친 남성우 등이 있었고, 1년 후배로 강대진(姜大振), 김기덕(金基悳) 등이 있었다. 19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를 장식한 연출 인재들이었다. 스승으로는 극작가 이광래(李光來), 연출가 김규대(金圭大) 선생을 모셨는데 예술정신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지대한 영향을 준 사람들이었다. 이때 서라벌예술학교에는 초대 학장으로 윤백남(尹白南)이 있었다. 초창기 한국영화를 개척한 최초의 영화감독으로서 그는 이따금 학생들에게 특강을 하였다. 한복을 단정하게 차려 입고 특유의 억양으로 들려주는 영화, 연극의 역사는 재미가 있었다. 

임 감독은 이무렵 학교 연극공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를테면 <나상(裸像)>(이광래 작), <꿈>(유치진 작), <유령>(헨릭입센 작), <순동>(유치진 작)과 같은 연출상을 받아 객관적으로 인정받을 만큼 잊을 수 없는 작품이 되었다. 신협에 맞선다는 의욕과 패기로 창립하여 명동 시공관 무대에 올린 청협(靑協)의 <통곡>(1954. 김규대 연출)의 공연 때는 주연을 맡기도 했다. 1954년부터 55년 사이의 일이다. 

임원식은 학업을 마치자 기독교 방송의 공개 모집을 통해 입사하였다. 연출 겸 성우 일이 맡겨진 임무였다. 그때 성우로는 정상급인 정은숙, 천선녀, 남성우, 주상현 등이 있었다. 1957년께였다. 그가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선민(宣珉)영화사의 사원 모집이 계기가 되었다. 재일교포 영화감독 유진식(劉振植)의 <불멸의 성좌>(1959. 최현, 이빈화 주연) 촬영 때 제3 조감독으로 채용된 것이다. 어안렌즈까지 갖추고 촬영한 시네마스코프 규격이었다. 잇달아 그의 감독 작품 <대원군과 민비>(1959. 김승호, 김지미 주연) 제작 때는 제1 조감독을 맡게 되었다. 김수용 감독과 인연이 닿게 된 것은 그의 여섯번째 작품 <연애전선>(1960. 김진규, 김아미 주연)의 제1 조감독으로 기용되면서부터였다. 김 감독 밑에서 또 한편의 영화 <돌아온 사나이>(1960. 김진규, 최은희 주연)의 제작을 돕고 자연스럽게 신필름에 자리를 잡았다. 이 영화가 신필름 제작이었기 때문이다. 임원식은 이곳 연출부에 소속되면서 제작 시스템이 변화를 건의했다. 일본의 경우처럼 감독의 권한을 위임받아 조감독이 역할을 수행하는 이른바 파견 감독제 안을 내놓은 것이다. 이 의견이 받아들여져 기구 개편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는 신상옥 사단에 합류하면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를 비롯한 <열녀문>(1962), <강화도령>(1963) 등 제작에 참여, 제1 조감독으로서 현장의 일을 완전히 익혔다. 철저한 연출 수업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책임 아래 메가폰을 잡는 일이었다. 그러나 쉽게 오는 듯 싶던 연출의 기회는 몇차례의 실기끝에 어렵게 찾아왔다. 신필름의 조감독 생활 4년만에 이루어진 ''입봉''이었다. 사극 <대원군과 민비>(1965. 김승호, 최은희 주연)는 그가 오랫동안 기다리던 데뷔작으로서 화려한 만큼 곡절도 있었다.

당초 이 영화의 개봉은 1년 전 구정 대목 프로로 예고돼 있었다. 극장 간판까지 올라가 있었으나 상영 당일 개봉이 무산되었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진행되던 한일회담에 자극을 주어 영향을 미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해 3월 대다수 국민과 야당은 물론 서울 시내 대학생 5천 여 명이 매일 굴욕 반대 데모에 참여하여 정국은 폭발 직전이었다. 이 일은 결국 서울 일원에 걸쳐 계엄령이 선포되는 6.3 사태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처럼 임원식의 영화 인생은 출발부터 순탄치 못했다. 그후의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 신영균, 고은아 주연)나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도시로 간 처녀>(1981. 유지인. 금보라 주연) 등에 이르기까지 그가 걸어온 20여년의 영화의 길은 수난의 역정이었다. 이런 일들은 외부에 알려진 경우도 있지만 설령 알려졌다해도 ''임원식의 수난''으로 인식되지는 않았다. 그가 애써 고난으로 포장하려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나타나는 활달한 인상과는 달리 그는 스스로를 부풀리는 데에 서툰 내성적인 일면이 있었다.

그 자신이 가장 아끼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합동영화사 제작) 역시 개봉 첫날부터 상영이 중단되는 돌발적인 사고에 직면했다. 일제 지배 아래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주기철 목사가 겪는 수난을 그린 이 영화가 박정희 정권의 눈총을 받게 된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강행되는 유신헌법 철폐운동을 벌이다가 투옥된 문익환, 박형규 목사의 일을 상기시켜 일반인들에게 종교 탄압의 인상을 심어줄까 우려해서였다. 기대에 부풀어 극장 앞에 왔다가 휴관 안내문을 보고 분노한 임 감독은 거의 이성을 잃은 채 서울극장 옆 조흥은행 지점 빌딩에 있던 중앙정보부 선무공작과를 찾아가 이유를 묻고 항의 했다. 그러나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욕설과 폭력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남산의 감찬관실로 끌려가 4일 동안 곤욕을 치루지 않으면 안되었다. 

임 감독은 이 영화에 앞서 16밀리로 <순교보(殉敎譜)>(1974)라는 작품을 만든 적이 있었다. 이기풍 목사의 항일 의지를 소재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나리오 검열 단계에서 반려되었다. 앞과 비슷한 이유였다. 결국 공산치하에서 싸우다가 자유를 찾아 떠나는 것으로 플릇을 바꿔 반공적 요소를 가미한 뒤에야 통과되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를 만들게 된 것은 <순교보> 때 겪은 좌절을 만회하려는 일종의 보상 심리였다.
하지만 그에게 더욱 심각한 좌절감을 안겨 준 것은 전례없는 애착을 갖고 김수용 감독에게 연출을 의뢰하여 직접 제작한 <도시로 간 처녀>(태창흥업 제작)가 상영된 지 9일 만에 각서를 쓰고 도중하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삥땅''협의를 받은 버스 안내양이 알몸 수색을 당한데 분노하여 회사 측에 항의하다가 옥상에서 투신한다는 내용으로 현실고발적인 색채가 강한 작품이었다. 버스 노조가 ''삥땅''과 ''알몸수색''의 묘사를 들어 전체 버스 노동자이 명예를 훼손했다고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이 영화의 주제로 보아 정작 불만을 표시해야 할 쪽은 노조가 아니라 버스회사 측이어야 했다. 문제의 확산이 당국이 방관한 데 있었다. 민간조직이 내용에 불만을 갖고 압력을 가한 이 사태는 영화 표현의 자유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도시로 간 처녀>는 상영 중단이라는 영업상의 손실뿐 아니라 대종상에 출품하는 기회조차 원천 봉쇄 당하였다. 주무당국이 접수를 미루다가 마감이 지났다고 기피함으로써 작품을 통해 평가받을 자리마저 얻지 못하였다. 영화평론가협회는 <도시로 간 처녀>의 상영 중단 사태에 대해 성명서를 내 ''창작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유감스런 행위''라고 항의하였다. 이 영화는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제작자인 임원식 감독에게서는 집 한 채를 뺏어갔다.

임 감독은 대종상 여우주연상(최은희)과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박노식)을 안겨준 데뷔작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이후 촬영에서 현상까지 10일 만에 완성한 통속시대극 <숙부인>(1966. 최은희 주연)을 비롯하여 홍콩과의 합작영화 <대폭군>(1966. 최은희 주연), 방랑검객의 신명난 복수극 <석양에 떠나가다>(1969. 오지명 주연), 원수인 양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묵비권을 행사하는 청년의 이야기 <벌거벗은 태양>(1970. 윤양하 주연), 나운규의 원작을 뼈대로 한 <아리랑>(1974. 신성일 주연), 전처 소생의 오남매까지 도맡아 헌신과 사랑으로 가정을 일으키는 장한 모상을 부각시킨 대종상 작품상 수상작 <어머니>(1976. 윤연경 주연) 등 모두 36편을 내놓았다. 
그의 작품은 현대물보다 사극, 통속 시대극이 많은 편이다. 정적인 작품보다는 <영(影)>(1968)이나 <항구 8번가>(1969)의 경우처럼 액션이 강한 역동적인 화면을 선호한다. <벌거벗은 태양> 등을 제외하고는 멜로드라마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는 번거로운 것보다는 명쾌한 것을 좋아하는 그의 기질이나 성격과도 무관하지는 않다. 

임원식의 영화미학은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대폭군>,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등ㅇ 나타나고 있듯이, 활력을 추구하면서도 모두 분출시켜 소진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 끌어들여 반추하는 여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가 일찍이 겪었던 시련의 자취로 볼때 마음속에서 익혀 왔으나 이루지 못한 어떤 한(恨) 같은 구상이 남아 의식 주변을 맴도는 것 같은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사색적이기보다 행동적인 그의 작품세계에 저항적인 일면이 있었다는 것은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주목해야 할 대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프로필

1935. 1. 22 서울 출생
1956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 졸업
1962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데뷔
1976 합동영화(주) 전무이사겸 기획실장 역임
1980 태창영화(주) 대표이사 사장 역임
1990 (주)한국기독교영화제작소 대표이사 역임
1995 (주)기독교TV방송 전무이사겸 방송본부장 역임
1999 한국영화감독협회 제20대 회장 역임 
2002년 월드컵기독시민운동 협의회 부회장 취임(현)
2000- (사)한국영화감독협회 초대 원장 피선, 춘사 나운규 영화예술제 집행위원장
대종상 집행위원,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조직위원
2001- 춘사 나운규 기념사업회 회장

작품명

1962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1963 대폭군, 숙부인
1968 /풍랑객
1969 석양에 떠나가다/의적 홍길동
1970 민비와 마검/벌거벗은 태양
1971 대감신랑
1974 박수무당/아리랑
1976 어머니/내마음 나도 몰라
1977 저 높은 곳을 향하여
1980 통천노호
1982 소림사 물장수
1992 불행한 아이의 행복 등 40여 편 감독 및 제작

수상 경력

1926 대학 연극 경연대회 연출상 수상
1962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대통령 최우수 작품상 수상
1976 <어머니>로 대종상 최우수 작품상 수상
2001 문화관광부 보관훈장 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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