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설태호 - 반공 군사 영화의 신화, 영화 감독

by.문상훈(시나리오 작가) 2008-11-11조회 4,685

아주 매혹적인 말 한마디가 떠오른다.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 다 그만한 사유가 있기 때문에 그런 낭만적이고 매력적인 호칭들을 붙여줄 것이다. 그렇다, 나도 주저 없이 이 시대 충무로의 마지막 로맨티스트, 영화감독 설태호를 그렇게 부르고 싶다. 그와 함께 있는 맥주집안은 늘 안온했고, 그와 함께 있는 충무로 뒷골목의 막걸리 집은 노상 정이 넘쳐흘렀다. 또한 설태호 감독이 함께 하는 영화사 안은 항상 웃음꽃이 피고 또 피고 또 피어났다. 눈이 오고 비가 내려 촬영이 펑크나거나 연기자의 스케줄이 안 맞아서 촬영이 마냥 지연돼도 설태호 감독은 기다림에 지친 스태프들을 위해서 기꺼이 삐에로가 돼 주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설태호 감독과 같이 하는 술자리에선 전혀 술값 걱정을 할 이유가 없었다.

충무로가 늘 따듯한 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론 주머니가 가벼운, 그래서 춥고 긴 겨울이 많은 영화인들을 힘들게 했다. 영화 일이 많은 사람보다 없는 사람이 많았으니까..그래도 영화예술을 한다는 긍지, 자부심 하나로 충무로를 떠나지 못했던 그 춥고 서러운 긴 세월, 충무로의 그 이름 없는 골목들은 많은 영화인들이 남몰래 흘린 눈물이 눈발이 되어 흩날리도 하고, 때론 웃음이 넘쳐흐르는 초원이 되기도 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닌가? 그 세월에 설태호 감독의 곁에 있으면 겨울에도 추운지 모르고 폭염 속에서도 더운지 모르게 그렇게 많은 영화인들이 그와 함께 충무로를 지켜 갔다.

단세포적으로 말하면 술값이던 밥값이던 늘 설태호 감독이 도맡아 내는 그는 한마디로 호구였다. 그의 곁에 있으면 주머니가 비어도 배불렀고 없어도 얼큰하게 취했으니까... 
설감독은 자기 아닌 남이 돈 내는 것을 보는 스타일이 이 아니다. 술값을 다 털어 내고 차비가 없으면 집에 까지 한시간 반을 걸어 간 적이 한 두 번도 아니였다. 난 설태호 감독을 티끌 하나 묻지 않은 하얀 눈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와 만나면 어느 자리에서건 늘 허허 웃는 위트와 유모어가 넘치는 스트레스 해소제였고 활력소였고 그는 윤활유였다. 그래서 인지 설감독 주위에는 늘 친구들이 많았다. 그런데 또 한가지 신기한 것은 자주 만나는 그의 친구들 그 누구도 얻어먹는 것 좋아하는 사람들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밥값이나 술값을 계산하는가? 궁금하겠지요?  간단하다. 술값이던 밥값이던 설감독 보다 먼저 내는 비법이 있다. 먹기 전에 들어가면서 카운터에 설감독 모르게 넉넉히 돈을 내고 먹고 나올 때 잔금을 받는 수법이다. 이에 당황한 설감독은 아예 먹으러 갈 집에 미리 전화로 예약을 하면서 술값을 아무 한 테도 받지 말라고 단단히 엄포를 놓는 거다. 이차 삼차 갈 집도 대략 정해진 단골집이 있으니까 한 십 여 군데다가 미리 전화를 해놓는 데는 먼저 돈을 내고 싶어도 어찌 할 도리가 없었던 거다.

영화계에는 설태호 감독과 절친했던 선후배 동료들이 많았으나 그 중에도 멜로드라마를 잘 만드는 김기 감독, 청소년드라마의 선두주자 김응천 감독 (작고),그리고 이 세 감독의 시나리오를 단골로 써서 공급했던 나 이렇게 네 사람을 충무에서는 사 형제라고 부르기도 했다. 설태호 감독은 유모어 감각이 남 다르다. 시나리오 심사를 들어가서 하루에 수 십 편의 시나리오를 읽는다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심사에 설태호 감독이 참여하면 양상은 달라진다. 하루의 고된 심사가 끝나고 저녁회식 자리에선 설 감독의 좀 야한 유모어가 튀어나오고, 자중은 배꼽을 잡고 나뒹굴어지는 웃음 바다가 되기 때문이다. 동료 심위원들과 유모어 대회를 열면 언제나 일등은 설태호 감독이 따놓은 당상이였다.

설태호 감독은 함경남도 단천이 고향이다. 19세때 홀홀 단신 남하한 실향민, 한시도 잊어 본적이 없는 이북 단천에 두고 온 어머니. 설감독의 모친은 중견 탈렌트 나문희씨를 쏙 빼 닮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텔레비젼 드라마에서 나문희씨가 나오면 그녀를 보면서 어머니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에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내가 말야, 이산가족 상봉을 하게 돼 가지고 이북에 가서 오마니를 만나면 난 총살을 당해도 다시는 오마니 곁은 떠나지 않을 게야, 여기 있는 아내와 자식들한테는 몇 십 년을 지극 정성 다 했지만 오마니 한데는 단 하루도 효도를 해보지 못한 후래자식이니끼니' 그렇게 말하면서 설감독은 술잔을 꼭 쥐고 그 주름진 눈가에 이슬을 묻히곤 했다.

이산에 아픔의 멍우리를 풀지 못한 한 때문 이였을까, 설태호 감독은 유독 반공영화나 군사영화를 주도적으로 만들어 냈다.
정창화 감독과 이만희 감독에게서 연출수업을 받고 1963년 설태호의 감독 데뷔작 '살아야 할 땅은 어디냐' 허근욱의 실화소설이 바탕이 된 실향민의 고통을 담은 방공영화였다. 같은 해 해병문관이었던 체험이 밑그림이 된 'YMS504의 수병' 1965년 '신화를 남긴 해병' '위험한 보수' 1967년 '0호작전' 이렇게 반공영화와 군사영화만을 고집스레 만들어 오던 설태호 감독은 일정기간을 자신의 특기인 유모어와 해학이 넘치는 영화를 연출하기 시작한다. 1970년 '운수대통 일보직전' 연이어 같은 해 '남대문 출신 용팔이'가 대박을 터트린다.  당시의 쾌남아 스타 박노식을 주연으로 출연시켜 장안을 웃음바다로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의 코믹 액션 '조폭 마누라' 신라의 달밤' '달마야 놀자' 그 이상의 코믹액션 붐을 일으키면서 연이여'용팔이' 씨리즈가 탄생한다. '역전 출신 용팔이' '운전수 용팔이' '신입사원 용팔이'가 황금알을 낳으며 한 시대를 풍미 한다. 1970년대는 군사정권의 연장선상에서 정치 경제 사회는 끝간데를 모르게 암울한 시대였다. 억압에 시달리고 궁핍에 찌들고 숨쉬기조차 답답하던 그 시대에 용팔이 씨리즈는 시민들의 탈출구였다. 일자무식 시골 청년 용팔이 (박노식)가 무일푼으로 서울에 올라 와서 벌이는 해프닝, 무식한 촌놈이 얼렁뚱땅 돈을 벌고 여차하면 주먹과 발길질로 약아 빠진 서울 놈들 코피 터트리는 그 통쾌함에 수많은 관객들이 참았던 숨통을 터트렸던 것이다. 그렇게 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던 설태호 감독은 방향을 틀고 이산의 아픔을 다시 되새기듯 반공영화와 군사영화로 몰두하기 시작한다.

1973년 제2회 한라 문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특공대와 돌아오지 않는 해병'을 연출하고 1973년 간첩 잡는 귀신 오제도 검사의 실화를 바탕으로 ' 특별수사본부와 기생 김소산'에 윤정희 최무룡을 출연시켜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키면서 여간첩 영화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뒤를 이어 '특별수사본부와 여대생 이난희 사건'이 극장가를 강타 하며서 여간첩 영화들이 줄을 잇기 시작한다.  설태호 감독은 바람돌이처럼 '용팔이' 바람을 일으켰고 '여간첩'을 소재로 다시 바람 몰이를 하고 나서 기수를 또 다시 군사영화로 돌렸다. 1976년 제15회 대종상 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한 '원산공작'을 연출하여 영화감독으로서 흥행감각과 예술감각을 두루 갖춘 감독으로서의 위치를 견고히 했다. 설감독은 여세를 몰아 연속적으로 군사영화를 만들어 갔다. 1977년 '케논 청진공작' '도솔산 최후의 날''수병과 제독''제3공작' 대형 전쟁영화 '땅울림'등 계속 군사영화를 만들어 갔고 설감독은 잠시 쉬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마지막이라 할 극영화 역시 군사영화인 걸작 '에미의 들'을 연출하여 춘사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렇다고 설감독이 군사영화와 반공영화, 그리고 코믹액션 영화만을 고집한 것은 아니다. 설태호 감독은 멜로드라마와 어린이들의 따듯한 사랑이 담뿍 담긴 영화들도 연출하였다. 1974년 '사랑이 있는 곳에' 1975년 '십 년 만에 외출' 1984년 안성기 주연의 '깊고 깊은 그곳에' 그리고 설태호 감독은 제작까지 겸한 대만 로케이션 작품 '스잔나의 체험' 1987년 'LA 용팔이'를 가지고 영화 팀들에게 유독 입국을 힘들게 했던 미국 로케이션도 감행했다. 어린이들의 정과 휴먼 드라마로는 1978년 '슬픔을 저 별들에게도 ''누가 이 아픔을' '둘도 없는 너'등을 꼽을 수 있다.

그 외에도 설태호 감독은 뼈에 사무치는 이산의 한을 안고 국군 홍보영화도 수 십 편을 연출한 한마디로 한국영화계에서는 반공군사 영화에 대가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70 고령인 지금도 살태호 감독은 청춘 같은 의욕에 불타 극영화 한편이라도 더 만들려는 의지와 정열로 충무로를 그리워하며 예의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문상훈(시나리오작가) / 2002년


<프로필>

1929. 5. 26 함경남도 단천 출생

1963 <살야할 땅은 어디냐> 데뷔


작품명

1963 살야할 땅은 어디냐 /YMS504의 수병
1965 신화를 남긴 해병/위험한 보수
1967 0호 작전
1970 운수대통 일보직전/남대문 출신 용팔이/역전 출신 용팔이
1971 운전수 용팔이/신입사원 용팔이
1972 특공대와 돌아오지 않는 해병/혈보산천
1973 특별수사본부와 기생 김소산/특별수사본부와 여대생 이난희 사건
1974 어둠속의 목격자/사랑이 있는 곳에/암살지령
1975 십년만에 외출
1976 원산공작/보루네오에서 돌아온 덕팔이
1977 케논청진공작/둘도 없는 너/도솔산 최후의 날
1978 대동강 출신/수병과 제독/슬픔은 저별들에게도
1979 제3공작/ 누가 이 아픔을
1980 땅울림
1981 복수는 내게 맡겨라
1984 깊고 깊은 그 곳에/스잔나의 체험
1987 LA용팔이
1988 햄버거 쟈-니
1992 에미의 들

수상 경력

1976 <원산공작>제15회 대종상 감독상 
1973 <특공대와 돌아오지 않는 해병> 제2회 한라문화제 감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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