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용삐용B무비]데우스 마키나, 그리고...... 이현하, 그리고..., 2002

by.김도훈(영화저널리스트,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 2014-08-22조회 8,673
데우스 마키나, 그리고......

얼마 전 배우 이영진과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영화 한 편이 있었다. <데우스 마키나>라는 영화다. 배우 이영진이 2000년대 중반엔 몸이 얼마나 지금보다 더 유연했던가, 액션 배우를 했다면 우마 서먼이 <킬 빌>에서 보여줬던 것 같은 뭔가를 보여줄 수 있었을 거라는 이야기 도중에 나온 제목이었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은 <데우스 마키나>가 대체 무슨 영화인가 싶을 거다. 물론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단어를 전 국민의 지적 유행어로 만든 진중권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아, 사실 진중권이 연출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영화가 나온다면 꼭 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서울이 일베와 깨시의 전쟁으로 불타오르는 가운데 홀연히 연기를 뚫고 청와대 앞뜰에 착륙한 경비행기 한대. 거기서 진중권이 한 손에 고양이를 안고 라파엘로 그림 속 천사처럼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내리고, 갑자기 신서울시에 출몰한 사도와 대결을 펼치는데….
 
<천사몽>(2001)과 <성냥팔이 소녀>(2002)
<천사몽>(2001)과 <성냥팔이 소녀>(2002)

아,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만, 여하튼. <데우스 마키나>는 지난 2002년 기획에 들어가서 영화의 절반을 촬영해 놓고 갑자기 중단된 미완의 영화다. 이 영화를 ‘삐용삐용B무비’의 마지막에 꺼내놓는 이유? 완성됐더라면 <천사몽>이나 <성냥팔이 소녀>를 뛰어넘는 한국 B급 SF영화의 계보를 훌륭하게 완성했을 거라는 아쉬움 때문이다. 나는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으로 이어지는 그 무시무시한 SF 블록버스터의 시대가 종종 그립다. 그 시기는 그러니까, 충무로로 쏟아져 들어오던 대기업의 엄청난 눈먼 돈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장렬하게 산화하겠노라는 이글이글한 야심이 베수비오 화산처럼 폭발하던 시기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였고,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만듦새였으며, 하나같이 장르의 기본이 하나도 안 된 영화들이었다. 그런데도 그 시대가 그리운 이유는 정말이지 모두가 영화를 막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대기업이 시나리오 한줄 한줄 빨간 펜으로 검사하던 시절에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괴작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어디로 향하는지 누구도 모르는 영화적 에너지의 시대였다. 맞다. 바로 그 시기 때문에 지금 한국 영화계가 이렇게 된 거다. 그런데도 그 시기가 그립다니 이거 참 사람이 경망스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리운 건 그리운 거다.

하여간 다시 <데우스 마키나>로 돌아가자면 이야기는 이렇다. 무대는 2003년이다. 서울의 한 고층빌딩을 과격한 테러 단체가 점거하는데, 한국 최대의 정보 통신 기업은 이걸 진화하기 위해 비밀 인간병기 조직을 투입한다. 작전을 완료하고 돌아가던 인간병기 조직의 미녀(김정화)는 헬기 추락으로 부상당하고, 이를 오토바이 광인 미남(권상우)이 집으로 데려가고, 미남과 미녀는 사랑에 빠지고, 그러나 인간병기인 미녀를 되찾기 위해 정보 통신 기업이 찾아오고, 그들을 질기게 쫓는 인간 최종병기는 배우 이영진이었을 것이다. 만약 이 영화가 끝까지 만들어졌다면 그랬을 거라는 소리다.

<데우스 마키나>를 만들다가 무릎을 꿇고 결국 사라진 감독은 이현하다. 당시 영화잡지의 인터뷰들에 따르면 그는 프랑스 유학파고, 구로사와 아키라에 관한 석사논문을 쓴 적이 있고, 프랑스영화자유학교(CLCF)에서 영화 실무를 공부했다. 나로서는 그의 경력으로는 도무지 이 영화를 가늠할 수 없다. 다만 몇몇 인터뷰들을 통해 대충 <데우스 마키나>가 어떤 영화가 됐을지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는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총몽>, <공각기동대>, <아키라> 등을 적극 차용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이건 사실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 나온 SF영화 중에서 이 세 작품을 적극 차용하지 않은 영화는 거의 없으니까. 형식적인 면에서 이 감독은 “<와호장룡>이나 <매트릭스>와는 달리 원심력과 중력이 느껴지며, 움직임과 기하성을 조화시키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이건 더더욱 모르겠다. 흠. 아마도 원화평의 안무와는 다른 안무를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아니다. 나는 지금 <데우스 마키나>의 이루어질 수 없었던 꿈을 능욕하려는 게 아니다. 정말로 나는 중간에 엎어져서 영원히 스크린에 걸릴 기회를 박탈당한, 만약 만들어졌다면 정말이지 끝내주게 삐용삐용한 B무비가 됐을 이 영화의 운명을 슬퍼하며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거의 100억대의 제작비를 투여한 <데우스 마키나>의 시나리오에는 민병천의 <내츄럴 시티>를 연상시킬 만큼 순결한 나이브함이 깃들어 있으며, 만약 만들어졌다면 적어도 <내츄럴 시티>와 함께 ‘한국 영화가 가장 도전적이었던 시절’을 기념하는 유물로 남았을 거라고 확신한다. 잊혀진 <데우스 마키나>의 이야기를 꺼낸 김에, 나는 몇 편의, 여러분에게 보여질 기회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사라진 몇 편의 장편과 단편을 거론하며 이 글을 마치고 싶다.
 
도살자>(김진원, 2007)
<도살자>(김진원, 2007)

먼저 김진원 감독의 2007년 작인 <도살자>다. 부천영화제에서 상영한 뒤 사라진 이 장편 고문 호러영화는 돼지머리를 가진 괴물을 주인공으로 스너프영화를 찍는 도살업자에 대한 이야기로, 한국 영화에서는 익히 볼 수 없었던 피와 배설물, 내장의 스펙터클이 카메라 바깥으로 진동을 한다. 돼지 발정제를 먹은 (가히 <텍사스 전기톱 대살륙>의 악마를 닮은) 괴물이 남자 희생자를 강간하는 장면에서 당신이 만약 B급 고어영화의 팬이라면 흐뭇해 했을 지도 모른다. 동시에 김진원 감독은 스산한 서울 교외의 배경을 통해 어떤 서정성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데도 성공한다. 나는 김진원 감독이 꼭 다시 호러 영화를 만들면 좋겠다. 
 

또 언급할 영화는 지민호 감독의 2005년 작 <편대단편>이다. 350만 원으로 10년에 걸쳐 완성된 이 영화는 당시 미장센단편영화제에서 꽤 화제를 모았다. 혼자 연출, 제작, 각본, 편집, CG를 다 해내는 지민호 감독의 이 보기 드문 SF 단편은 일종의 ‘안티 <스타워즈>’로, 강제로 군에 징집된 뒤 기억을 삭제당한 식민지 행성의 젊은이들 이야기다. 물론이다. <편대단편>은 꽤나 허술하고, 종종 (이 분야의 오덕들이 만드는 영화가 대게 그렇듯이) 지나치게 진지하다. 하지만 지민호 감독이 좀 더 많은 투자를 받아 장편을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이 생각을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가장 중요하게 언급해야 할 영화는 2010년에 나온 초저예산 SF영화 <불청객>이다. 만년 고시생과 백수들이 택배 상자에서 튀어나온 외계인을 만나는데, 알고 보니 이 외계인은 루저들의 생명을 적립해 늙은 거부들의 수명을 연장해주는 일종의 고리대금업자로, 주인공들이 계약을 거부하자 자취방이 통째로 우주로 날아가버린다. 이건 한마디로 말하자면 ‘88만원 세대의 SF 어드벤처’로, <이나중 탁구부> 시절 후루야 미노루를 연상시키는 정말 기가 막히게 엇나가는 풍자 코미디로 가득하다. 아니, 나는 <불청객>보다 더 웃기는 영화를 2010년 이후로 한국 영화계에서 본 적이 없다. <불청객>이 소규모 개봉관에서 약간의 화제를 모은 뒤 이응일 감독은 애니메이션 회사에 들어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지구를 지켜라!> 이후 가장 발칙한 데뷔작이었던 <불청객>의 감독이 아직도 메가폰을 잡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슬플 따름이다. 

자, ‘삐용삐용B무비’를 마치며 내가 바라는 소원은 두 가지다. <데우스 마키나>의 묻혀있는 필름만이라도 다시 발굴해서 단관에서라도 상영을 하는 것, 그리고 이응일, 김진원, 지민호에게 어떤 독지가나 어떤 진취적인 제작자라도 나타나서 제작비를 좀 지원해주는 것. 내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한국 B무비의 역사가 바뀔….리는 만무하지만, 적어도 기념할 만한 B무비들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데우스 마키나,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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