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용삐용B무비]명동잔혹사 변장호,최인현,임권택, 1972

by.주성철(영화평론가) 2013-09-25조회 7,846

아, 명동! 일본 야쿠자 영화에 신주쿠가 있고 홍콩 누아르 영화에 침사추이가 있다면 한국 다찌마리 영화에는 명동이 있다. 고영남의 <명동44번지>(1965)와 <명동의 12 사나이>(1971), 김효천의 <명동출신>(1969)과 <명동노신사>(1970)와 <명동사나이와 남포동사나이>(1970), 김기덕의 <명동부르스>(1970) 등 당대 다찌마리 영화의 대부분은 종로가 아닌 명동 중심이었다. <김두한> 혹은 <장군의 아들> 시리즈를 통해 종로가 건달들의 주 무대로 떠올랐을지 모르지만, 과거 다찌마리 영화의 본고장은 바로 홍콩의 밤거리만큼이나 별들이 소곤대던 금융과 패션의 중심지 명동이었던 것. 영상자료원에서 통계를 내주면 좋을 것 같다. <명동> 시리즈, <김두한> 시리즈, <왼손잡이> 시리즈, <용팔이> 시리즈 중 과연 어떤 제목이 가장 많은지... 
 
당시 명동의 모습
당시 명동의 모습

아무튼 명동은 왠지 ‘명치정’이라 불러야 그 살벌한 다찌마리의 느낌이 살 것 같다. 일제 강점기 명치정(명동), 황금정(을지로), 본정(충무로) 등 일본인들이 자기 식대로 정(町)을 갖다 붙인 곳들이 주로 일본인 거주 지역이었고, 조선인들은 종로와 동대문을 중심으로 한 경성 북쪽에 거주했다. 바로 그 명치정에 대한 허장강의 간략한 소개로 시작하는(카메라를 정면으로 보고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명동잔혹사>는 변장호, 최인현, 임권택 감독의 옴니버스 영화다. 서로 다른 감독과 배우들이 시대별로 명동 뒷골목 주먹의 역사를 훑어 내려가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허장강만이 역사의 산증인처럼 세 편 모두 출연한다. 

변장호 감독의 1화 <시끄러울 것잉께>는 일제 강점 말기 명동 뒷골목을 주름잡던 친일파 황두식(황해)과 감옥에서 막 나온 박민(박노식)의 대결을 그리고, 최인현 감독의 2화 <갖고 싶은 여자>는 암흑가 생활을 청산하려고 마음먹은 현(최무룡)이 숙(윤정희)과 결혼을 앞두고 보스의 계략에 빠져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뒤 복수를 꿈꾼다는 얘기다. 가장 힘주어 얘기하고 싶은 임권택 감독의 3화 <대결>은 상(김희라)이 자신을 돌봐준 보스(장동휘)의 복수를 실행에 옮기며 명동의 오랜 폭력의 역사를 마무리하는 작품이다. 변장호, 임권택 감독은 물론 당대 최고 액션 스타들이 총출동했는데, 당시 영화제작 실패로 힘들어하던 최인현 감독을 돕기 위해 무보수로 나선 것이라 한다. 그 우정에 감동했는지 영화의 포스터에는 대문짝만하게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한국영화사상 전무후무한 ‘영화인전체’가 참가한 우정영화! 쇽크 초대작!”
 

내용보다 참여하는 사람들의 일정이 더 중요한 이런 ‘품앗이’ 영화는 감독과 배우는 물론, 시나리오 작가까지 ‘시간 되는대로’ 급조해서 뭉치는 B급 기획영화의 일종이다. 더구나 ‘누군가를 도와야 한다’ ‘성금을 모아야 한다’는 명확한 목표가 있기 때문에 상업적일 수밖에 없다. 함께 참여한 변장호, 임권택 감독 중 누군가 괜히 ‘예술’을 하려 했다면, 급전이 필요한 최인현 감독으로서는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갈 것은 빤한 이치다. 게다가 이런 영화가 가능하려면 그 나라의 영화계가 잘 돌아가고 있어야 한다. 한가한 ‘듣보잡’ 영화인들이 뭉쳐봤자 관객들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을 것이다. 잘 나가고 바쁜 사람들이 품앗이를 해야 돈벌이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명동잔혹사>는 당시 한국영화계의 전성기를 방증하는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명동잔혹사와 비슷한 예, 흑전사 포스터
<명동잔혹사>와 비슷한 예, <흑전사> 포스터

가까운 예로 과거 1990년대 초반까지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한 홍콩영화계를 돌아볼 수 있다. 중국 수재민들을 돕기 위한 성금 모금을 목적으로 <호문야연>(1991)이 만들어졌고, 역시 홍콩감독협회에서 자선기금을 모으기 위해 <쌍룡회>(1992)를 만들었으며, <동사서독>(1994)의 제작이 지연되자 추가 제작비도 마련할 겸 그 배우들이 그대로 출연해 만들어진 B급 코미디 <동성서취>(1993)도 있었다. 이들 영화가 정말 변변한 시나리오도 없이 그저 배우들의 개인기에 기대 말 그대로 속전속결로 만들어진 영화라면, 아마도 <명동잔혹사>와 가장 비슷한 예가 될 만한 영화가 바로 나름의 선 굵은 서사를 갖췄던 <흑전사>(1987)일 것이다. 홍콩 무협영화의 전설 장철 감독의 말년 살림살이를 풍족하게 해줄 요량으로 후배 영화인들이 똘똘 뭉쳤던(오우삼이 연출을 맡고 강대위, 이수현, 주성치 등이 출연했다) 영화로, 오우삼 감독 특유의 거침없는 액션 연출을 엿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준비나 촬영 기간이 짧다보니 두서없는 아이디어들을 마구잡이로 뒤섞었는데, 그것이 뜻하지 않게 묘한 B급 쾌감을 불러일으켰던 것. 혹시나 오우삼 감독의 마음속에는 ‘내가 바쁜 시간 쪼개서 도와주는데, 뭐 좀 어설프다고 설마 나한테 항의라도 하겠어?’ 하는(그러니까 정작 자기 영화 연출할 때는 별로 가져보지 못했던) 여유로운 마음이 생기진 않았을까. 그리고 그런 태도가 오히려 뒷걸음질치다 쥐 밟는 격으로 명장면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명동잔혹사>가 주는 의외의 쾌감도 그와 멀지 않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사실 임권택의 다찌마리 영화는 주로 <장군의 아들> 3부작(1990-1992)으로 기억되지만, 그는 과거 꽤 많은 ‘주먹’ 영화를 만들었다. 실제로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대표는 과거 그의 다찌마리 영화들에 깊이 매료돼 있었고, “요즘은 사내다운 사내가 없는 세상 아닙니까. 진짜 사내를 보여 줍시다”라며 <장군의 아들>을 제안한 것은 유명한 일이다. 그 제안을 듣고 임권택 감독이 ‘왜 또 그런 영화를 만들라고 허는 거요’라며 버럭 화를 낸 일도 유명하다. 그는 같은 해 <명동잔혹사>에 참여하고 <돌아온 자와 떠나야 할 자>(1972)를 만들며 그 세계를 완전히 떠났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흥미로운 것은 그가 다찌마리 장르를 다루며 언제나 ‘손 씻고 떠나려는’ 주인공을 내세웠다는 사실이다. 존 포드가 그러하듯 보통 한 장르의 달인이 되어가면서 그런 성찰적 주인공에 이끌리는 법인데, 그는 아예 처음부터 주먹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주인공을 그렸다. 
'(허걱 형님...)' / '똘마니가 건방지게 법률공부냐'
'(허걱 형님...)' / '똘마니가 건방지게 법률공부냐'


'형님, 쉽게 살겠어요.' / '재주가 있는 놈들은 다 빠져 나가란 말이야.' - <돌아온 자와 떠나야 할 자> 중에서
'형님, 쉽게 살겠어요.' / '재주가 있는 놈들은 다 빠져 나가란 말이야.'
- <돌아온 자와 떠나야 할 자> 중에서

그런데 그런 지나친 강박이 B급 상상력으로까지 느껴지는 순간도 종종 있었다. ‘엽기적’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압권의 장면은 (당시로선) 그의 마지막 다찌마리 영화 <돌아온 자와 떠나야 할 자>에 있다. 모범수로 출소한 민수(신성일)는 대학 진학에 실패해 어머니 볼 면목이 없어 조직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인물이라(그러고 보면 2004년 작 <하류인생>에서 영화 속 조승우가 모시는 선배 상필도 의대를 다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조직에 몸담은 인물이다), 부하들을 닥치는 대로 대학에 보내려 한다. 법대 출신 건달 준(윤양하)이 관리하는 나이트클럽에서 법률 책을 펴놓고 고시 공부를 하고 있자, 민수는 재주가 있으면 이 습한 곳에서 다 빠져 나가라고 독려한다. 문득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라는 CF 카피가 떠올랐다. 나와바리를 뺏기고 수금을 못 해와도 좋으니 공부만 잘 하면 된다는 조폭 보스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서 감독님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당시 만들기 싫은 다찌마리 영화를 억지로 만들게 하는 제작자를 ‘맥일려고’ 그런 장면을 넣은 것은 아닌가, 하는 몹쓸 생각까지 살짝 해봤다. 바꿔 말해 다찌마리 장르를 떠나고자 하는 그의 마음은 너무나 간절했다. 이후 <잡초>(1973)와 <족보>(1978) 등을 만들며 그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게 그의 결심은 성공한 것이다. 그의 첫 번째 다찌마리 영화 <욕망의 결산>(1964)에서 밀수꾼들에 의해 비극적 최후를 맞았던 신성일이 <돌아온 자와 떠나야 할 자>에서는 새사람이 되어 출소하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작과 끝인가. 

그런데 같은 해 만들어진 <명동잔혹사> 속 <대결>을 보고 있으면 참으로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그가 또 다른 다찌마리 걸작 <사나이 삼대>(1969)와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1971)를 만들며 터득한 장인의 세공술이 만개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마치 장현수 감독의 <게임의 법칙>(1994)처럼 복수를 끝낸 박노식이 젊은 송재호에 의해 죽음을 맞는 1화 <시끄러울 것잉께>도 흥미로웠지만, 역시 <대결>이 주는 팽팽한 긴장감과 놀라운 액션 연출은 앞의 두 작품을 압도한다. 당시 장동휘와 박노식을 잇는 다찌마리 장르의 ‘젊은 피’였던 김희라는 라스트에 이르러 적들을 궤멸시키려고 작정한다. 장례식에 온갖 조폭 떨거지들이 모일 것을 알기에 다이너마이트까지 준비한다. 선글라스를 끼고 단신으로 장례식장을 찾아간 그의 카리스마가 진정으로 멋지다. 장동휘나 박노식이 보여준 어딘가 ‘구수한’ 멋과는 확실히 다른 세련된 느낌이다. 
 
선글라스 카리스마
선글라스 카리스마

바로 여기서 오우삼의 <흑전사>가 떠올랐다. 임권택은 돈을 벌어야 하는 영화의 기획의도에 맞게, 철저하게 관객들을 현혹하는 가공할 라스트 액션신을 마련한 것이다. 그는 평소 자신의 다찌마리 영화보다 더 나가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정작 자신의 단독 연출 장편영화에서는 보지 못한 액션들이 속출한다. 김희라는 수적 열세에 몰려 총상을 입으면서도 거의 전성기 홍콩 누아르 영화의 주인공처럼 옆으로 몸을 날려 총을 쏘아댄다. 당시 이처럼 총기류를 액션영화에 사용한 한국영화가 있었나 싶다. 결국 다이너마이트까지 동원해 그야말로 적들을 싹쓸이하는데, 임권택 감독이 이후 총기류를 다루는 대규모 액션영화를 연출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 정도다. ‘외인묘지에서 주인공이 일당백으로 싸운다’는 설정만 두고 그는 그렇게 막무가내로 신나게 연출했을 것이다. 
 
다이너마이트에 불 붙이고, 몸을 날려 총 쏘고
다이너마이트에 불 붙이고, 몸을 날려 총 쏘고

그런데 그 무대는 바로 (지금도 쉽게 찾아갈 수 있는) 합정동 외국인묘지다. 천주교 성지라 불리는 절두산순교성지 바로 옆인 그곳은 좋은 일 많이 하신 외국인 선교사들이 묻혀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그래서 뭔가 주인공의 종교적 속죄를 위해(바로 오우삼 영화의 성당 같은 그런!) 그런 곳을 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그는 그 엄청난 라스트신을 미련 없이 이 지긋지긋한 다찌마리 장르와의 성대한 작별인사라고 여겼을 것이다. “오늘의 명동에는 사랑과 낭만 우정이 있을 뿐, 지난날의 악몽은 가신지가 오래다. 명동이여 영광 있으라”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이제는 너무나 늦은 얘기겠지만, 진정으로 <대결>의 장편 확장판을 보고 싶다. 

/ 글: 주성철(씨네21 기자)

PS.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회고전의 ‘임권택 전작전’은 이례적으로 영화제 개막일보다 열흘 앞선 9월 23일(월)에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시작해 영화제 기간까지 계속됩니다. 위에서 언급한 다찌마리 영화들도 당연히 포함돼 있으며, 9월 28일(토) 오후 4시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상영 후에는 오승욱 감독, 주성철 기자의 GV가 있습니다.

박노식
황해
최무룡
윤정희
김희라
장동휘

감독 변장호, 최인현, 임권택
개봉극장 아세아극장
개봉일 1972-06-04
관람인원 37,200(서울)명

 

명동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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