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현장][인터뷰]THE CMR: 디렉터스 위크 프로그래머 임필성&민규동 감독

by.나원정(중앙일보 기자) 2020-11-27조회 2,741
“60년대 이후 한국영화, 하면 ‘충무로’였잖아요. 근데 지금 충무로에 있는 영화사가 거의 없거든요.”(임필성 감독)
“충무로란 단어가 주는 올드함, 다가가고 싶지 않은 비호감의 이름을 껴안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을지로가 ‘힙지로’가 되고, 이날치의 국악 공연이 주는 신선함처럼 즐길 수 있는 ‘힙함’을 만들고 싶었죠.”(민규동 감독)

‘THE CMR-디렉터스 위크’. 올해 한국영화감독조합과 새롭게 손잡고 출범한 제5회 충무로영화제(12월 1~5일)의 새 이름이다. 왕년의 한국영화 1번지 충무로의 재탄생이란 의미로 영어 첫 글자만 따온 ‘THE CMR’에 국제영화제란 명칭일랑 떼고, ‘감독주간’이란 뜻의 영문부제(Directers Week)를 달았다. 국내 전무후무한 ‘감독에 의한, 감독을 위한, 감독의 영화제’(슬로건)다. 중구문화재단이 공동 주최했다. 프로그래머를 자처한 ‘허스토리’의 민규동 감독, ‘마담 뺑덕’의 임필성 감독을 24일 서울 충무아트센터에서 만났다.

충무로엔 2007년 고전영화의 ‘발견, 복원, 창조’를 내걸고 나선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 2016년 새 장르로 갈아입은 충무로뮤지컬영화제가 출범했지만 모두 4회 만에 수명을 다한 터. 올해 제5회 영화제가 성사될 수 있었던 건, 앞서 두 영화제를 각각 운영위원장, 예술감독으로서 이끈 김홍준 감독이 개최시기를 두 달여 앞두고 다급히 감독조합 문을 두드리면서다. 윤제균 감독과 더불어 감독조합 공동대표인 민 감독은 “온전히 장르를 감독으로 설정하고 이름도 바꾸고 새로 출발할 수 있다면 해보겠다고 했다”면서 1998년부터 개최해온 감독들이 서로 한해 영화들을 돌아보는 시상식 ‘디렉터스 컷 어워즈’가 토대가 됐다고 했다.

“오프라인으로 부딪혀야 재밌는 행사여서 올해 디렉터스 컷 어워즈는 내년으로 넘겼지만, 감독이 중심이 돼서 주차관리, 티켓발급, 테이블세팅, 음식준비, 청소 같은 작은 일까지 직접 호스팅하는 전통이있거든요. 이번(THE CMR)에도 감독들이 전면에 나섰어요. (코로나19로) 좀 세포가 죽어있던, 짓눌렸던 감독님들이 몸 움직이면서 감독으로서 자기 존재감을 워밍업하고, 그런 시기라고 생각했죠.”

영화제는 1일부터 닷새간 네이버TV, 네이버 시리즈on, 틱톡(TikTok), 줌 등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해 비대면으로 열린다. 구석구석 창작자들다운 아이디어가 가득하다. 개막작 ‘The CMR’은 중구 15개동을 감독 15인이 각기 세로 화면의 단편에 담은 옴니버스 프로젝트. 올해의 장편영화 9편, 단편 10편을 각기 선정한 상영 프로그램 ‘쌀롱 드 씨네마’엔 상영 후 각각을 연출한 감독에게 또 다른 감독이 진행을 맡아 질문하는 관객과의 대화(GV) ‘감감묻(감독이 감독에게 묻다)’도 마련했다. ‘충무로 클라쓰’ 섹션에선 이경미 감독 등이 OTT 오리지널 작품 연출에 대해 말하는 ‘극장을 탈출한 감독들’, 연기자로 출발한 감독들의 체험을 나누는 ‘감독이 된 배우들’, 최근 시나리오 작법서를 낸 오기환 감독의 강연 ‘흥행하는 글쓰기’를 진행한다. ‘한숨 토-크’ 섹션에선 윤제균‧이준익 등 올해 신작 개봉을 연기해야 했던 굵직한 감독들의 ‘코로나 시대 감독살이’, 개막작으로 신개념 세로 영화를 만든 감독들의 분투기도 들을 수 있다.
 

 
나원정: 프로그램은 어떻게 구상했나.
임필성: 일정이 타이트하게 진행되는 영화제고 감독들이 다른 사람한테 해달라는 얘기를 주로 하니까, 혼자 할 줄 아는 일이 별로 없잖나(웃음). 고민의 핵심은 감독들이 중심이 된 영화제에서 영화 좋아하는 관객들, 영화학도들한테 보여줄 수 있는 게 뭘까였다. 두 번째는 저희 감독조합 회원이 370명 정돈데 감독들도 다른 감독들의 작업에서 어떤 걸 궁금해 할까. 마스터클래스(충무로 클라쓰)도 원래 영화감독인데 OTT 화제작을 찍은 이경미 감독을 모셔와서 어떤 일이 있었나 저부터 궁금했다. 마스터클래스는 사전 녹화했는데 촬영하던 강대규 감독도 도중에 진지한 질문을 막 하더라. CG가 많지않은 영화를 주로 찍던 이경미 감독이 한 에피소드에 CG 몇백컷짜리 작품을 찍었잖나. 젤리 괴물의 첫 소스는 뭐였고 창작 과정에 어떤 괴로움이 있었는지 저부터 궁금했으니까. 또 배우와 감독을 겸업하거나 아예 감독 변신한 배우들이 많아지니까, 왜 오게 됐을까 묻고 싶었다. 한국 감독의 80% 이상이 시나리오를 겸해서 쓰고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도 얘기하면 재밌지 않을까. 상영 프로그램도 올해 개봉한 독립영화 대표작, 상업영화 흥행작과 영화제 수상 단편 및 해당 감독의 전작 단편까지 한눈에 정리할 수 있게 마련했다. 색깔은 좀 없을지 몰라도, 코로나19 때문에 모든 영화제에 쫓아가서 볼 수 없었던 감독, 관객들 한번에 보면 소위 얘기하는 충무로 정신, 충무로의 문화와 이어지는 면이 있지 않을까. 내년을 위한 일종의 ‘프리 페스티벌’로 준비했다.
민규동: 게으른 자들을 위한 컴필레이션인 셈이다(웃음).

나원정: 감독조합은 올해 OTT SF 시리즈 ‘SF8’, 여성주의적 영화를 고찰한 ‘벡델데이’ 등 새로운 플랫폼, 인식에 꾸준히 도전해왔는데, 이번 개막작도 세로란 점이 신선하다.
민규동: 영화제도 새로워지고 공간도 새로워지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새로, 새로’ 하다가 ‘세로로 찍자’고 결정했다(포스터에 적힌 ‘충무로, 새(세)로 보다’에도 ‘새’와 ‘세’를 합한 형태의 글자가 사용됐다). 감독조합 밴드에 공고를 받아서 추첨을 통해 4대 1 경쟁을 뚫고 당선된 15명에게 행정동을 추첨으로 나눠주고 영화 ‘사랑해, 파리’처럼 미션을 주고 찍었다. 제작비 300만원 주고 한 달 동안 알아서 찍으랬다. 세로란 느낌이 특화된 영화도 있고 여전히 가로와 세로가 구분되지 않는 영화도 있다. 다들 고민했을 것이다. 일반적인 대화샷을 못 찍고 풀샷의 개념이 달라지니까. 위아래조차 달라지기 때문에 자기가 익숙한 언어를 뒤집어야 한다. 스마트폰으로 한 번도 안 찍어본 감독님이 강의를 듣고 공부해서 시작한 작품도 있다. 이옥섭 감독님의 ‘동화동’은 구교환 배우가 나와서 본 적 없는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고, 신아가 감독님의 ‘신당5동’도 몰입감이 굉장하다.

임필성: 2분이든, 3분이든 짧은 작품이라도 감독한테 좋다고 생각한다. 정규 영화 하겠다고 5년, 10년 기다리면 감독의 정체성이 모호해진다. 이번 개막작도 일종의 짧은 작품이라도 만들 기회를 주는 일종의 수요 창출이다. 네이버TV는 전체 15편을 각 4분짜리 풀 버전으로 개막일부터 볼 수 있고 틱톡에선 3분짜리 재편집된 버전을 개별 관람할 수 있다.


나원정: GV와 토크 관람은 무료지만 직전에 상영되는 장‧단편 상영작 온라인 관람은 1,000원(장편 기준)가량 결제해야 한다. 상영작을 행사 스케줄에 맞춰 실시간 온라인 상영하는 점도 새롭다. 앞서 국내 비대면 영화제들에선 잘 시도하지 않은 방식이다.
민규동: 신개념 시도다. 코로나에서 살아남은 영화들, 개봉 성공했다고 하지만 직접 GV, 무대인사를 못 했잖나. 또 단편은 1+1로 감독의 전작까지 튼다. 모두 한 시간씩, 원하는 스태프, 배우 다 데려와서 모든 진행은 감독조합 소속 감독이 맡는다. 감독들이 딱 한 주간만이라도 자기 정체성이 존중받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밀도 있게 할 수 있는 시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었다. 각 제작사와 협의해서 성사했다.

나원정: 장편 상영작은 독립영화 ‘69세’ ‘남매의 여름밤’ ‘찬실이는 복도 많지’부터 상업영화 ‘남산의 부장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오케이 마담’ ‘반도’ 등 선정 폭이 넓다.
민규동: ‘SF8’처럼 플랫폼은 다변화되는데 그런 작품이 갈 수 있는 영화제 성격은 정해져있더라. 이번 선정작엔 영화제 환영작뿐 아니라 아주 대중적인 영화도 담았다.
임필성: 상업영화는 나름의 신선한 시도를 하고 관객한테 의미 있는 평가를 받아도 비평가가 인정하지 않거나 흘러가버리곤 한다. 어떤 배우의 오랜만에 너무 의미 있는 복귀작이라거나, 기술적으로 굉장히 새로운 제시를 했다거나, 흥행성이 아쉬워도 최소 100명은 더 볼 가치가 있는 영화들이 감독 입장에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찌어찌 종합상차림처럼 됐는데 개성 없는 게 개성인 것 같다.
민규동: 뮤지컬, 건축, 무용…. 넘치는 영화제 속에서 또 하나의 영화제가 공해가 되지 않으려면 의미가 있어야 한다. 감독 자체를 장르로 삼는 영화제는 무한한 확장성이 있다고 본다. 프로듀서, 배우 등도 모두 감독의 관계망으로 풀어갈 수 있으니까. 이번 영화제에선 ‘오케이 마담’의 주연 배우 엄정화, ‘담보’의 성동일처럼 평상시 GV에서 잘 만나기 어려운 배우들도 참석해 이야기를 나눈다.

민규동 감독은 이전에도 감독들의 비전을 담은 영화제를 부산영화제, 전주영화제 등에 제안하며 고민해왔다고 했다. 부산영화제에서 신인감독에게 주는 감독조합상 ‘비전상’이 그런 결과물의 한 예다. 하지만 단순한 시상을 넘어 기존 프로그래머, 평론가와 다른 시선으로 작가, 감독의 영화를 프로그래밍하는 다른 성격의 비전을 새로이 시도해보고 싶다고 밝혔다. 올해 ‘프리 페스티벌’ 이후 내년엔 어떤 영화제의 모습을 꿈꿀까. 코로나 상황이 개선된단 가정 하에 그가 답했다. 

“큰 영화제와 작은 영화제의 갈림길이 오프라인 행사죠. 상황이 가능해진다면 대면 방식의 정통 영화제 형식을 확장시켜보고 싶은 몇몇 아이디어가 있어요.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는. 극장을 벗어나 맛집, DDP, 덕수궁, 남산타워도 가고. 관객을 만날 수 있는 방식에 엄숙주의를 최대한 빼고 좀 더 즐길만한 방식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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