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뉴우스]1964년 6·3항쟁의 현장

by.이정은(고려대 한국사학과 BK21PLUS사업단 연구교수) 2018-05-31조회 5,738
 6·3항쟁의 현장

1964년 6월 3일 대학생들은 서울 시내와 전국 주요 도시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했다. ‘6‧3항쟁’으로 일컬어지는 이 날 시위의 직접적 원인은 박정희 정권의 한일회담 추진이었다. 5·16군사쿠데타 정부에 이어 1963년 12월 민정 이양으로 들어선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 자금을 일본에서 구하기 위해 한일협정 조기타결을 기도했다. 반면 야당 측에서는 이를 ‘대일 저자세외교’라며 비판했다. 학생들 역시 ‘한일회담 굴욕 타결 반대’를 외치며 1964년 3월 24일부터 시위에 나섰다. 

계속 이어졌던 반대시위는 6월 2일 박정희 하야를 내건 고대생들의 가두시위에 이어, 다음날인 3일, 서울 시내에서만 약 1만2천여 명이 넘는 대학생들이 나오며 저항의 절정을 이뤘다. 그리고 이 6·3항쟁의 현장은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역사영상융합연구팀에서 미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이하 NARA)을 통해 수집한 <South Korean University Students Demonstrate>라는 약 18분짜리 영상에 잘 담겨있다.  

영상에서 드러나는 시위는 다채롭다. 흰 가운을 입은 약대생들의 행렬이 있는가 하면, 무장한 경찰들과 팽팽한 몸싸움을 하는 학생들도 있다. 당시 고려대 재학생으로 한일회담반대시위에 적극 참여했다고 알려진 이명박 전 대통령의 모습도 찾을 수 있다. 가두시위 도중이던 ‘이명박 대학생’은 다른 학생들과 진지하게 무언가를 상의 중에 있다. 
 
서울 약대생들의 시위
서울 약대생들의 시위

무장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는 대학생들
무장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는 대학생들

당시 고대생으로 항쟁에 참여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
당시 고대생으로 항쟁에 참여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

 
시위 당일, 비가 오기 시작하자 많은 이들이 우산을 손에 들었다. 하지만 각 대학 단위별로 가두시위에 나선 많은 대학생들은 비를 맞으며 소속 대학을 밝힌 플래카드를 내걸고 도심 곳곳을 뛰어다녔다. 아래와 같이 ‘단국대학’이라 적힌 커다란 플래카드와 더불어 태극기를 앞세운 단국대 학생들의 시위 행렬이 대표적이었다. 

태극기와 ‘단국대학’ 플래카드를 든 단국대 학생들
태극기와 ‘단국대학’ 플래카드를 든 단국대 학생들

무장 경찰과의 대치 속에 시위는 일부 과격한 양상을 띠기도 했다. 학생들은 최루탄을 쏘는 경찰에 맞서기 위해 돌을 던지며 대항했다. 영상은 학생들의 투석전 현장과 더불어 투석전이 남기고 간 도심에 굴러다니는 수많은 돌멩이들도 보여주고 있다.

경찰에 맞서 투석전에 나서는 대학생들
경찰에 맞서 투석전에 나서는 대학생들

투석전의 흔적
투석전의 흔적

학생들은 철사를 두른 바리케이드를 직접 손으로 옮기며 경찰의 저지선을 뚫었다. 트럭 탈취에 성공한 일부 학생들은 1960년 4·19 항쟁 당시처럼 트럭에 올라타 거리를 활보하기도 했다. 수많은 이들이 환호를 보냈고, 실제 많은 시민들이 시위에 합류했다.
 
경찰의 바리케이드를 옮기는 대학생들
경찰의 바리케이드를 옮기는 대학생들

트럭에 올라타 시위를 벌이며 이동 중인 대학생들
트럭에 올라타 시위를 벌이며 이동 중인 대학생들

영상에서는 6‧3항쟁 당시 학생들이 내세웠던 다양한 주장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약대생들은 “민생고 끝이 없다 부정부패 규탄한다”는 주장과 더불어, 경찰의 최루탄 발포에 항의하며 “최루탄은 人體(인체)에 맹독성”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나섰다.
 
 “민생고 끝이 없다 부정부패 규탄한다” “최루탄은 인체에 맹독성”
 “민생고 끝이 없다 부정부패 규탄한다” “최루탄은 인체에 맹독성”

서울대생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학생들은 “不信(불신) 받는 朴政權(박정권)은 辭退(사퇴)하라!”, “Y.T.P는 割腹(할복)하라!” 등의 주장을 앞세웠다. 특히 ‘YTP’는 당시 박정희 정부가 학내 사찰을 위해 이용했던 서울대 내의 대표적 단체였고, 학생들은 이에 대해 큰 분노를 드러냈던 것이다.
 
 “박정권 사퇴하라”, “Y.T.P는 할복하라”
 “박정권 사퇴하라”, “Y.T.P는 할복하라”

“박정희 물러가라” 요구와 함께 학생들은 일본과의 회담에 가장 앞장선 ‘김종필-오히라 메모’의 주인공 김종필에 대해서도 “김종필을 추방하라”라며 적개심을 드러냈다.

"김종필을 추방하라"
"김종필을 추방하라"

 "박정희 물러가라"
 "박정희 물러가라"

 
그 외에도 “五(오) 원짜리 죽 먹는 놈 너만 잘났냐. 십만 원짜리 자가용 타는 놈 나도 잘났다 –국회의원”이라는 정치인에 대한 풍자라든지, 일본자본과의 교류에 앞장섰던 당시 재벌을 향한 “타도하자 亡國財閥(망국재벌)”과 같은 특색 있는 비판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날의 시위는 결국 밤 9시 50분 박정희 정부의 비상계엄 선포로 끝이 났다. 무장 군인들의 진주 앞에 학생들의 저항 열기는 한동안 숨고르기에 들어가야만 했다.
 
"5원짜리 죽먹는 놈 너만잘났냐 십만원 짜리 자가용 타는 놈 나도 잘났다."
"5원짜리 죽먹는 놈 너만잘났냐 십만원 짜리 자가용 타는 놈 나도 잘났다."

"타도하자 망국재벌"
"타도하자 망국재벌"


1) 「South Korean University Students Demonstrate」 (한국근현대영상아카이브 NARA수집자료) 참조. 영상에는 영어 내레이션이 있지만, 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 않는다. 내용은 위 링크에 들어가면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실제 사실과는 다른 오류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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