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틀리지 상사 Sergeant Rutledge 존 포드, 1960

by.허문영(영화평론가) 2015-09-10조회 9,890
러틀리지 상사 Sergeant Rutledge (1960)

존 포드가 66세가 되던 해에 만든 <러틀리지 상사>는 평자들이 존 포드의 세계를 말할 때 거의 거론되지 않는 영화다. 나 역시 이 영화를 실패작으로 생각하며 아직 재평가받을만한 점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실패에는 뭔가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점이 있다. 그 점에 대해 짧게 말하려 한다.

<러틀리지 상사>는 분명히 실패작이다. 물론 포드에게도 실패작 혹은 범작의 목록이 있다. 하지만, 도덕적 감정이 화면의 활력을 억누르거나(<밀고자>), 인물들이 이야기에 끌려다니거나(<모호크족의 북소리>), 반대로 인물의 과도한 성격 표출이 영화의 흐름을 방해하거나(<영광의 길>), 너무 설명적이어서 밋밋한 산문이 되어버린(<마지막 함성>) 영화들과는 다른 의미의 실패가 여기엔 있다. 뭔가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혹은 불성실로 인해 엉성해지고 느슨해진 것이 아니라, 작가가 고의로 작품을 파괴하려는 듯한 기괴한 몸짓이 있다. 그 몸짓을 아름답다고도 고결하다고도 말할 수 없지만, 그 작가가 파괴와는 정반대의 것을 너무나 능숙하게 해오던 사람이라면, 거기엔 무어라고 단정하기 힘든 어두운 결기가 있다.

줄거리는 이렇다. 제9 기병대 소속으로 흑인이지만 ‘탑 솔저’로 불리며 존경받던 러틀리지 상사(우디 스트로드)가 군사 법정에 선다. 부대장을 살해하고 그의 딸을 강간 살해한 혐의다. 러틀리지와 함께 전장을 누빈 젊은 중위 켄트렐(제프리 헌터)이 변호를 맡고, 백인 인종주의자가 검사를 맡은 법정에서 증인들이 하나씩 등장하고 그들의 진술이 플래시백으로 펼쳐진다. 범인은 따로 있었음이 밝혀진다.

존 포드의 영화를 봐온 사람들에게라면 이 이야기는 너무 건전해서 놀랄 지경일 것이다. 백인의 인종주의와 몽매한 군중심리를 비판하며, 노예해방 이후에도 지속된 흑백차별을 고발하고 있다는 점, 무엇보다 흑인을 서부극의 주인공으로 삼는 모험을 감행했다는 점 등에 주목하면 <분노의 포도>(1940) 이후 20년 만에 포드가 진지한 사회성 영화를 만든 것처럼 보인다. 조너선 로젠봄처럼 명민한 평론가도 이 영화를 인디언을 전면에 내세운 <샤이엔의 가을>, 여성이 주인공인 <일곱 여인>과 더불어 만년의 존 포드가 정치적 소수자에 시선을 돌린 영화라고 평했다. (이런 평가와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IMDb 사이트에 오른 이 영화의 평점은 놀랍게도 7.6이다. 우리가 걸작으로 칭송한 <도망자>(6.6), <라이징 오브 더 문>(6.8)보다 월등히 높다.)

이런 부류의 도덕적 판단에 더 이상 귀 기울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작품의 자질과는 완전히 무관하며, <아파치 요새>를 다시 들먹일 필요도 없이 포드의 세계에서 고결함과 야만성은 인종이나 젠더와는 완전히 무관하다는 것을 이미 여러 영화에서 확인해왔기 때문이다. 차라리 (직업적 감독으로서의 포드에게 주어진) 이야기의 과도한 건전함이나 정치적 올바름이 이 영화의 자기 파괴적 몸짓과 연관돼 있는 건 아닐까라고 추측해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법정 스릴러에 서부극, 전쟁물, 로맨스를 뒤섞은 이 영화의 표면적 실패는 법정 스릴러로서의 실패다. 영화의 초반에 이미 우리는 러틀리지가 강간 살해범이 될 수 없는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임을 본다. 정답의 반은 이미 처음부터 제시되어 있는 셈이다. 하워드 혹스나 빌리 와일더가 손댔다면 곳곳에 수수께끼와 트릭이 숨겨진 미스터리가 되었을 테지만, 포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중범죄를 다루는 판사들이 법정에서 술 마시고 휴정시간에 도박을 하는 장면들, 그리고 사안의 중대함에 무관심한듯한 가벼운 농담과 유머의 장면들, 그러니까 이제는 포드적 클리셰라고 부를만한 이완과 중지의 장면들이 들어서 있다. 엉성하다기보다는 정교하고픈 의지가 없는 미스터리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하는 것은 범인이 밝혀지는 마지막 순간이다. 러틀리지 변호의 실패가 예상되는 순간, 한 남자가 증인을 자처한다. 그는 인디언에게 피살된 자신의 아들이 범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몇 번의 신문 끝에 변호인 켄트렐 중위는 바로 그 남자가 범인임을 밝혀낸다. 이 과정이 너무 짧고 너무 갑작스럽다. 남자가 자기 아들을 범인으로 지목하기 위해 나서는 장면도 갑작스럽지만, 더 갑작스러운 것은 켄트렐의 공격이다. 그는 신문을 하다가 갑자기 남자를 때린다.



치밀한 신문의 자리에 들어선 돌발적 폭력. 이상한 일은 남자가 가격을 당하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자백해버린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논리로는 변호인의 폭력으로 인해 증인이 진실이 말하게 된다는 것이지만, 정교한 신문으로 증인을 심리적 궁지에 몰아넣는 치밀한 전개가 여기엔 없으며, 켄트렐의 가격은 공포를 불러일으킬 만큼 가혹하지도 않다. 미스터리 영화를 봐온 우리에게 특별한 인상으로 남는 것은 범인이 마침내 밝혀진다는 표준적 전개과정이 아니라, 슬랩스틱에 가까운 켄트렐의 주먹질이다. 이 주먹질은 서사 내적으로는 켄트렐의 분노의 표현이거나, 자백을 얻어내기 위한 술수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 행위의 돌발성과 우스꽝스러움은 오히려 미스터리 서사로서의 자신을 부정하거나 훼손하려는 영화 자체의 초서사적 몸짓처럼 보인다.

존 포드가 이런 부류의 장르에 서툰 감독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이보다 2년 전 그가 영국에서 만든 <기데온 경감>은 마치 빌리 와일더의 것처럼 보이는 매끈하고 정교한 짜임새의 형사영화였다. 켄트렐의 주먹질 쇼트는 그렇다면 주어진 표준적 서사의 한계 지점에서 펼쳐지는, 우리를 종종 감동시켜온 존 포드 특유의 강한 쇼트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건 아니다. 이 장면에는 장면들의 연쇄 안에서 그 연쇄의 구속을 초월했던 그 위대한 쇼트들이 지닌 심원한 떨림과 반짝임이 없다. 켄트렐의 주먹질은 그저 이 미스터리 서사의 자기훼손 행위일 뿐이다.

존 포드는 왜 이런 훼손을 태연히 저질렀을까. 자포자기일까, 아니면 (스튜디오에 대한) 모종의 저항일까. 아니면 이 영화의 이야기에 대한 은밀한 반대의 표현일까. 알 수 없다. 다만 1969년의 한 인터뷰에서 포드는 이렇게 말한 적은 있다. “난 거창한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아. 나는 주방에서 영화 만들고 싶어.... 옛날 열정은 사라졌어, 그런 거 같아.”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건 그의 주관적인 동기는 아니다. 켄트렐이 주먹을 휘두를 때, 변호인으로서의 그의 자격과 미스터리로서의 이 영화의 자격, 나아가 작가로서의 포드 자신도 동시에 부정된다. 이 발작적인 부정의 결단은 어떻게 해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정당화되거나 의미화될 수 없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자기훼손이 모종의 비극성을 띠게 되는 것 같다.

이런 의문을 염두에 두고 다른 장면 하나를 떠올려보자. 러틀리지와 켄트렐, 그리고 그의 부대는 아파치의 갑작스러운 습격을 맞아 전투를 치른다. 이미 체포된 상태인 러틀리지는 돌아가면 교수형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도망가지 않고 용맹하게 전투에 참여한 뒤 밤을 맞는다. 부대원들은 ‘들소 대장(Captain Buffalo)’의 노래를 부르고 켄트렐은 친절하게도 ‘들소 대장’이 이상적인 군인을 뜻하는 말임을 설명해준다. 노래와 설명이 함께 이뤄지는 동안 카메라는 동상처럼 서서 경계임무를 서고 있는 러틀리지를 부감으로 비춘다.

이 장면이 놀라운 것은, 포드의 세계에서 이처럼 영웅을 노골적으로 찬미하는 장면이 이 영화 전에도 후에도 없기 때문이다. 영웅을 묘사할 때의 전형적인 촬영 각도에다 영웅을 찬미하는 노래, 그리고 그에 대한 친절한 설명까지. 보는 사람이 화가 날 정도로 진부하고 게으른 장면이지만, 아마도 포드 자신이 더 화를 냈을 만한 장면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포드가 러틀리지라는 영웅을 찬미하기 위해 이 장면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절대 믿을 수 없다. 그가 20대 초반에 만든 데뷔작에서도 이처럼 진부한 장면은 없었다. 나는 반대로 생각한다. 포드의 다른 영화들에서 비슷한 사례조차 찾아볼 수 없는 이 과도한 진부함에는 포드 자신의 자기 조롱이 있다. 이 장면에서 포드는 마치 이 영화 전체를 진부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봐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 같다.

왜 스스로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이 상투적인 장면을 만드는 게 필요했을까. 자신이 전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인데도 어쩔 수 없이 만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환멸의 다른 표현일까. 아니면 이 역시 자포자기의 선택일까. 이 장면의 자기 조롱에는 또 다른 이상한 점이 있다. 러틀리지는 지금 가만히 서 있다. 그는 지금 경계임무를 맡고 있는 것이지만 여하튼 눈동자 외엔 움직임이 없다. 움직임이 없는 그를 카메라는 동상처럼 찍고 있다. 혹은 하나의 사진으로 보이도록 찍었다. 포드가 영화사상 인물의 움직임을 가장 아름답게 찍었던 사람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장면은 마치 포드 자신이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것처럼 찍혀있다.

켄트렐의 주먹질이 미스터리 서사로서의 자기훼손이라면 들판의 러틀리지 장면은 영화로서의 자기훼손처럼 보인다. 좋은 영화를 보기 원한다면 이런 영화까지 챙겨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보고 나면 이런 자기 조롱과 자기부정을 태연히 저지르는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정말로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나도 대답을 알고 있지 않으며, 그가 우리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복잡한 인간이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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