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The Man Who Shot Liberty Valance 존 포드, 1962

by.허문영(영화평론가) 2015-08-11조회 13,204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The Man Who Shot Liberty Valance (1962)

서부극은 기원적이다.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막 무언가 시작되었고 그것이 모종의 질서를 향해 꿈틀거리고 소용돌이치며 나아간다. 무언가는 새롭게 태어나 굳건해지며, 무언가는 조용히 혹은 몸부림치며 사라지고 잊혀간다. 남겨진 것들은 정말 남겨질 가치가 있는 것이었으며 사라진 것들은 정말 사라져 마땅한 것이었는가. 서부극은 기원을 기억하며 그렇게 묻는다. 서부극의 매혹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다루는 기원이 사료를 통해 재구성된 태고의 것이거나 이야기꾼에 의한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기원이라는 단어에 어울리지 않는 아주 가까운 과거의 역사적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들 스스로 의식하진 못했을지라도, 영화사 초기와 고전기에 서부극을 만들었던(혹은 만들도록 요구받았던) 미국 감독들은 혜택받은 창작자들이었다. 18세기 말까지 세계 지도에 존재하지 않던 미국은 19세기를 거치며 유혈과 혼란을 대가로 거대 국가의 모습을 갖춰나갔고, 그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는 국가 형성과정의 고통과 불안과 희열을 직접 겪었다. 근대적 정체성이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 건국의 역사가 그들의 가족사에 새겨져 있었던 셈이다. 자신의 가족과 이웃의 이야기를 돌아보는 것만으로 그들은 근대적 정체성이라는 복합적 의제의 사회적 기원에 이를 수 있었다. 서부극이라는 기억의 서사에서 개인, 가족, 민족, 지역 공동체, 국가는 자명한 것으로 주어져 있는 단위가 아니라 끝없는 교란과 충돌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 다른 단위들과의 관계를 정립해야 하는 과도적이고 유동적인 단위였다.

서부극의 기원성에 대한 또 다른 면은 서부라는 장소에 있다. 서부는 미국의 서부지역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이면서 동시에 미개척지, 무질서, 황야를 뜻하는 보통명사이다. 현대 미국의 형성과정에서 원주민 축출이라는 정복전쟁의 요소와 신세계 개척이라는 요소를 분리하기 힘들다 해도, 개척자들의 장소는 결국 미지의 위협과 희망을 품은 채 끝없이 펼쳐진 황야였다. 그들의 왜소한 공동체는 광대하고 텅 빈 공간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했다. 기원의 자리에 버티고 선 무심하고도 냉혹한 황야의 풍경. 역사와 문명은 풍경을 내부로 끌어들였는가, 아니면 풍경은 문명의 서사를 넘어 초역사적 시간을 살고 있는가. 이것은 서부극의 또 다른 물음이다. 서부극은 지리적으로도 기원적이다. 기원에 놓인 풍경의 시간을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납득시킨 사람은 물론 존 포드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The Man Who Shot Liberty Valance(1962)

태그 갤러거가 도덕의 시대(The Age of Morality)라고 이름 붙인 시기(1962~1966)의 첫 해에 68세의 존 포드는 후대의 평자들이 서부극의 만사(輓詞)라고 부르게 될 걸작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를 내놓는다. 포드는 이후에 <도노반의 산호초>(1963) <샤이엔의 가을>(1964) <일곱 여인>(1966) 등 세 장편을 더 만들었고 <서부개척사>(1962)의 한 에피소드와 TV 시리즈 한편을 연출했다.

이 영화는 두 가지 점에서 특별하다. 하나는 풍경이 없는 서부극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모뉴먼트 밸리라는 유례없는 영화적 풍경을 발명한 존 포드는 긴 이력의 마지막 단계에서 포드 서부극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고유한 풍경을 지우고 실내 서부극, 혹은 연극적 서부극으로 부를만한 이례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다른 하나는 플래시백의 구성이다. 100여 편에 이르는 포드의 필모그래피에서 플래시백이 영화의 본론을 구성한 것은 이 영화를 포함해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1941) <롱 그레이 라인>(1955) 등 극소수다. 풍경 없는 플래시백, 내성(內省)과 회한, 사라진 것들의 침묵과 기억....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는 고요하고 섬세하고 아름답고 슬픈 영화다.

줄거리는 이렇다. 노년의 상원의원 랜섬 스토다드(제임스 스튜어트)와 아내 할리(베라 마일즈)를 태운 기차가 작은 서부 마을 신본에 도착한다. 몰려든 기자들에게 랜섬은 한 사람의 장례식 때문에 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에 관한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래전 젊은 법률가 랜섬은 법률책 몇 권만 들고 명성과 부를 찾아 동부를 떠나 서부로 향한다. 신본 외곽에서 랜섬 일행이 탄 마차는 리버티 밸런스(리 마빈) 일당에게 강도를 당한다. 여성 승객을 보호하려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랜섬을 톰 도니폰(존 웨인)이 발견하고 신본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할리에게 데리고 와 치료받게 한다. 법으로 리버티를 응징하겠다는 랜섬, 랜섬의 방식을 비웃는 소목장주이자 강한 서부 사나이 톰, 톰과 랜섬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랜섬에게 마음이 기우는 할리. 세 남녀 사이엔 감정적 긴장이 높아간다. 대목장주에게 고용되어, 톰과 랜섬이 이끄는 신본 주민들의 주 편입(statehood) 시도를 저지하려는 리버티는 마침내 랜섬을 결투에 끌어들인다. 랜섬은 기적처럼 리버티를 쓰러뜨린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랜섬은 이후 정치가로 승승장구하지만, 기원의 진실은 다른 데 있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는 고전적 서사의 기술이라는 면에서 거의 완벽한 영화다. 존 포드 특유의 리듬감과 유머가 빚어내는 활력은 여전하지만, 사건들은 빈틈없이 맞물려 있고 매끈한 기승전결의 구성이 전개되며 인물들은 분명한 정체성으로 성격화되어 있다. <황야의 결투>의 산만하고 거의 어처구니없기까지 한 구성(17회 참조)을 감안하면 이 영화의 정교함은 놀라울 정도다. 역사적 사실과 장르적 관습이 교직된 이야기의 복잡성과 냉소와 감상과 격정이 중첩된 정조의 풍성함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서부극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비교 대상을 찾기 힘들다. 이야기를 꼼꼼하게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한 편의 긴 논문이 필요하리라. 서부극을 근대적 정체성의 기원에 대한 질문의 서사로 이해한다면,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는 아마도 최상의 서부극이 될 것이다.

하지만 존 포드의 세계를 탐색해온 우리를 숙고하게 만드는 것은 풍경의 실종이라는 이례적 사태다. 오슨 웰즈의 말대로 다른 감독의 영화에 나오면 표절처럼 보이는 모뉴먼트 밸리가 없는 존 포드의 서부극을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상상하기 힘들다. 물론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를 모뉴먼트 밸리에서 찍지 않은 어쩌면 사소할 수도 있는 현실적인 이유가 궁금한 것은 아니다.(포드는 2년 뒤 <샤이엔의 가을>을 찍기 위해 다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뉴먼트 밸리를 찾는다.) 우리의 관심사는 포드의 서부극에서 풍경이 사라지면 무엇이 달라지는가라는 문제다. 당겨 말하면 풍경의 실종은 단순히 이야기의 공간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넘어 무언가 영원히 사라져버린 듯한 아득한 상실감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풍경의 실종과 플래시백의 구조는 모종의 내면적 연관이 있는 것 같다.

플래시백은 사라진 것들을 현재에 불러온다. 불려 나온 과거는 현재의 감정적 결핍을 메우는 향수의 대상이거나, 현재의 진실의 결핍을 메우는 결정적 사실이거나, 대개 둘 중 하나다. 전자의 경우(주로 멜로드라마에서) 현재는 계기적 시점일 뿐 과거가 완결된 서사로 등장하며, 후자의 경우(주로 필름누아르와 미스터리에서) 과거의 보충으로 현재가 완결된다. 존 포드는 드물게 플래시백을 사용하면서도 둘 중 하나를 택한 적이 없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는 전자처럼 보이지만 실은 불려 나온 과거 자체가 점점 망가져 가면서 플래시백의 마지막에 이르러도 회상 주체가 정박할 곳, 혹은 현재로 돌아올 수 있는 서사의 매듭이 보이지 않는다(8회 참조). 이 때문에 플래시백이 끝나도 현재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플래시백의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기괴한 순환구조가 만들어진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는 후자처럼 보인다. 제목부터 ‘누가 리버티 밸런스를 쏘았나’라는 범죄 미스터리의 표제어로도 읽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랜섬이 마침내 고백한 과거의 결정적 사실(리버티를 쏜 사나이가 랜섬이 아니라 톰이라는)은 현재의 사실로 승인받지 못한다. 편집장은 “전설이 사실이 될 때, 그 전설을 기록합니다.”라고 말하며 새로 밝혀진 사실을 기록하지 않는다. 그의 말은 실은 애매하다. ‘사실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사실로 밝혀진다’는 것이 아니라 ‘사실로 유통된다’는 뜻일 것이다. 그의 말은 사실상 동어반복이다. 하나의 전설이 충분히 힘 있고 광범한 전설이 될 때, 그 전설을 기록한다는 것이다. 사실의 진실성 여부는 관심사가 아니다. 플래시백이 밝혀낸 진실은 무화되며, 현재는 플래시백의 진실 없이 완결된다.(마지막 대사는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랜섬 스토다드에게 기차 차장이 각별한 친절을 베풀며 하는 말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게라면 못 해 드릴 일이 없지요”이다. ‘그 사나이’는 여전히 랜섬이다.)

물론 이것은 극 중 현실 속에서 그러하다는 뜻이다. 관객인 우리는 플래시백을 거쳐 현재에 대한 교정되고 확장된 앎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그 앎의 정체는 무엇일까. <아파치 요새>(16회 참조)의 결말에서 써스데이 중령의 허황된 전설을 들었을 때처럼 전설의 허구성과 힘을 다시 알게 된 것 정도일까.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의 플래시백에서 우리가 본 것은 어떤 정보, 그러니까 톰 도니폰이야말로 어떤 대가도 없이 리버티 밸런스라는 절대악을 처단한 진정한 영웅이었다는, 극 중 현실이 사실로 수용하지 않은 사실뿐일까. 물론 그럴 리는 없다. 이 영화는 두 번 봐야 하고, 플래시백은 다시 플래시백 해야 한다.

옛 친구(연인)의 부고를 듣고 노부부가 먼 길을 왔다. 또 다른 두 옛 친구(링크, 팜피) 외엔 마을의 누구도 그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사내, 그리고 노부부와 두 친구가 조문객의 전부이며 관청의 지원금으로 만들어진 관에 놓인 외로운 노인의 죽음. 놀랍게도 여기엔 어떤 애도의 언사도 없고, 장례식은 등장하지 않으며 치러졌는지조차 알 수 없다. 네 조문객은 초라한 관에 담긴, 관객인 우리는 보지 못하는 시신을 볼 뿐이다. 그들의 유일한 애도 행위는 선인장꽃을 관 위에 두는 것이다.

그 관에 잠든 자가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플래시백의 마지막 시점에서부터 영화의 현재까지는 아마도 3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을 것이다. 악당 리버티 밸런스의 이름은 남았지만 그의 이름은 사라지게 만든 세월. 그 세월은 그 사내에게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영화의 서사는 단 하나의 단서도 주지 않는다. 이름도 삶도 완전히 잊힌 수십 년의 텅 빈 시간, 텅 빈 존재. 사내의 육신은 하루 전에 죽었지만 그의 존재는 오래전, 정확히 말하면 랜섬이 ‘그 사나이’로 오인되어 영예의 삶을 시작한 플래시백의 마지막 장면에서부터 지워졌다. 부츠도 권총 벨트도 없이 누운 그의 시신, 그의 얼굴은 스크린에서도 가려져 지워졌다(등장인물이 보는 것을 특권적 시선을 지닌 관객이 보지 못하는 장면은 영화를 포함한 시각 매체가 가진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지금 부재하고 아주 오래전부터 부재했다.

이 플래시백의 가장 놀라운 점은 플래시백을 통해 알려진 사실이 아니라 현재 시점과 플래시백 시점 사이에 놓인 톰 도니폰이라는 인물의 완전한 공백의 시간, 공백의 삶이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서도 그 사이의 시간이 지워져 있지만, 플래시백이 플래시백의 시작 시점으로 되돌아가는 강박적 노스탤지어의 순환운동이 빚어내는 감상적 정조가 그 공백을 의식하지 못하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서는 현재의 사실과 과거의 사실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고 있는 서사가 그 공백을 환기한다. 존 포드는 그 공백에 어떤 말도 바치지 않으며, 단 하나의 프레임도 할애하지 않는다. 마땅히 무언가 있어야 할 곳에 혹은 우리가 무언가 있기를 바라는 곳을 완전히 비워버린 것이다.

부재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곳에 구체적 실체로 존재하는 무언가이다. 랜섬이 톰의 시신을 보고 있는 장면에서 시신이라는 육체적 대상은 우리 눈에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잠정적 부재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다른 의미의 부재는 공백으로밖에 접근할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의 무언가이며 이를 근원적 부재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지난 30년간의 톰의 시간이, 그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 말해 누구도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서사 안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그 시간은 이 근원적 부재의 차원에 놓여 있다.

현재 시점에 톰 도니폰은 영원히 떠났다기보다 근원적 부재에서 잠정적 부재(스크린에 등장하지 않는 시신)로 돌아온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신은 물리적으로는 짧은 시간만 지속할 뿐인 존재이므로, 그는 근원적 부재에서 죽음이라는 또 다른 근원적 부재로 이행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는 잠정적 부재에 대해선 말할 수 있지만 근원적 부재에 대해선 말할 수 없다. <리버티 밸런스>에는 한 영웅의 죽음에 대한 동정과 슬픔이 있다. 가볍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감정은 일련의 사건들의 효과와 인물에 대한 동일시에서 비롯된 표면의 감정이다. 하지만 여기엔 동정적 슬픔과는 다른 차원의 쓰라린 상실감, 아득한 허무감이 있다. 영화를 보는 우리가 의식했던 의식하지 않았던, 그 상실감과 허무감은 근원적 부재의 차원과 연관될 것이다. 플래시백을 통해 불려 온 사실이 아니라 불려 오지 않은 혹은 불려 나올 수 없는 공백, 그 말할 수 없는 부재가 보는 이의 마음을 깊은 곳에서 흔든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를 보기 전까지는 이런 플래시백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하나의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왜 톰 도니폰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도 근원적 공백으로 사라졌는가. 이 질문은 우리가 서부극을 보면서 해왔던 질문과 사실상 같은 것이다. 왜 서부사나이는 잘못을 바로잡고도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나는가. 이 영화 제목을 변용한다면, 누가 톰 도니폰을 쏘았는가. 태그 갤러거는 흥미로운 대답을 제시했다. 그것은 랜섬 스토다드이다. 랜섬이 대변하는 법과 질서가 톰이 대변하는 힘과 자유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수긍할만한 해석이지만 우리는 또 다른 대답을 생각해볼 수 있다. 톰 도니폰을 쏜 것은 그 자신이다. 여기엔 얼마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그날 밤 랜섬과 리버티의 결투에서, 톰이 숨어서 리버티를 쏘지 않았다면 백면서생 랜섬이 쓰러졌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톰은 할리를 얻었을 것이다. 이 결투는 꽤 복잡한 게임이다. 결투의 승자는 법적 책임을 지지 않으므로 랜섬이 쏘았다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다만 법의 배타적 신봉자이자 무력의 반대자로서의 자기 윤리는 붕괴된다. 톰이 쏜다면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다. 힘과 자유의 신봉자로서의 톰의 자기 윤리는 전혀 손상되지 않지만, 그는 결투자가 아닌 제3자이므로 명백한 살인자가 된다. 톰은 연적(戀敵)을 위해 살인자가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살인자라는 사실을 발설할 수 없다. 톰의 선택이 정의감의 발로인지 사랑하는 할리의 간청 때문인지는 불분명하다. 결과적으로 톰은 힘의 영웅이라는 자리도, 연인 할리도 이미 법의 챔피언인 랜섬에게 모두 넘겨준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상실은 바로 악당 리버티다. 리버티가 살아있는 한 공동체는 톰의 총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리버티가 사라지는 순간, 톰의 자유(liberty)도 공동체 내에서의 존재 이유도 사라졌다. 리버티를 쏜 순간 그 총알은 결국 톰 자신을 향한 것이다.

왜 서부사나이는 잘못을 바로잡고도 떠나는가. 적어도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라면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 그는 ‘바로잡았기 때문에’ 떠난 것이다. 총으로 바로잡는 순간 그는 존재의의를 상실하거나 문명과 불화할 수밖에 없다. 링고 키드(<역마차>)는 복수에 성공하고 나면 영원한 감금 혹은 추방을 피할 수 없다. 이산 에드워즈(<수색자>)는 공동체도 더 이상 원치 않는 복수의 여정에 나선 동안 문명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며 복수가 완수되는 순간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자 떠날 수밖에 없다. 전쟁 장르와 혼합된 기병대 서부극을 제외한 포드의 서부극은 서부 사나이의 자기 살해에 관한 이야기, 총알이 자신을 꿰뚫을 줄 알면서도 방아쇠를 당긴 사내의 이야기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는 은유적 죽음으로서의 떠남을 시신으로의 귀환으로 대체한 것이다.

풍경의 상실이라는 사태로 돌아오자. 앞서 풍경을 잃고 무엇이 달라졌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포드 서부극에서 풍경은 혹은 모뉴먼트 밸리는 문제를 해결한 서부사나이가 돌아가는 공백의 장소다. 그곳은 말해질 수 없고 묘사될 수 없는, 죽음과 같은 층위에 있는 비지(非知)와 무시간성의 심연이다(6, 7회 참조). 링고 키드도 이산 에드워즈도 닥 할러데이도 그곳으로 돌아갔다. 그 곳은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의 플래시백이 환기한 근원적 공백과 동질의 장소다. 하지만 이 은유적 해석은 어딘가 불충분하다. 모뉴먼트 밸리라는 무시간적 풍경에로의 떠남은 사건의 서사 너머의 장소, 지금 이곳 아닌 어딘가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거기엔 상상력을 응원하는 낭만적 바깥이 있다. 그러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는 바깥이 없다. 바깥이 있던 자리에 놓인 것은 지금 이곳의 관, 그리고 가려진 시신이다. 바깥은 이제 사라졌고 세계는 바깥 없는 폐쇄공간이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가 실내 서부극이라면 그것은 많은 장면이 실내에서 촬영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 서사의 바깥이 사라진 서부극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딱 한 장면을 꼽으라면 이 쇼트를 꼽을 수밖에 없다.

말 탄 사내가 무언가를 끌고 마을로 들어오고 있다. 조금 뒤에 알게 되지만 그 사내는 톰 도니폰이며 그가 달구지에 태운 것은 강도를 당한 뒤 심하게 다친 랜섬 스토다드이다. 그는 중상자를 구하려는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천천히 움직인다. 우리는 포드의 영화에서 영웅이 처음 등장하는 순간을 수차례 만나왔다. 젊은 링컨(<젊은 날의 링컨>)이 마을에 처음 등장할 때, 그리고 이름없는 성직자(<도망자>)가 위험한 마을로 진입할 때, 그들은 마치 망설이듯 느리게 움직였다. 톰은 결국 랜섬을 위해 모든 것을 잃는 선택을 하게 될 미래를 예감이라도 하듯, 그래서 그 운명의 자리에 오기를 주저하듯 천천히 다가온다. 그는 이제 그를 위한 출구가 사라진 세상 속으로 그렇게 걸어온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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