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2016년 말, 뉴욕에 거주하는 한인 영화학도로서

by.한동균(영화애호가) 2016-12-16조회 8,086
맨해튼 타임스퀘어의 정경. 네온 사인 속 문구: “Trump victory causes ‘SERIOUS CONCERNS’ in Middle East”

미 대선이 치러졌던 지난 11월 8일, 거의 자정에 가까운 시간 힐러리 클린턴이 쭉 앞서던 필라델피아 주의 색깔이 붉은색에서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승리의 여신이 도널드 트럼프에게 미소를 짓고 있었음이 거의 확정 된 순간이었다. 그날 밤과 이후의 며칠 동안 42번가의 타임스퀘어의 한 건물의 광고판엔 트럼프가 미칠 영향을 경고하는 문구가 걸렸고, 뉴욕의 시민들은 퇴근 후 매일 저녁 맨해튼의 트럼프 타워 앞으로 몰려가 그들의 대통령 당선인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였다.

이튿날 아침엔 소위 말하는 ‘뉴욕 버블’을 꺼트리기라도 할 기세로 비가 내렸다. 현재 필자가 재학 중인 컬럼비아 대학교의 예술 대학은 ‘뉴욕 버블’의 전형적인 예시라고 할 만한 집단이다. 버니 샌더스의 지지자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자신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고, 몇몇 공화당 지지자들은 대선 레이스 내내 침묵을 지키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집단. 몇몇 미국인 학생들은 실의에 빠져 수업에 나오지 않았고, 그나마 농담을 던질 힘이 남아 있던 영화학도들은 흐린 하늘을 가리키며 ‘이것이 새로운 시대의 모습이구나…’라며 쓴웃음을 겨우 지어냈다. 유학생과 미국인 학생의 비율이 6:4일 정도로, 타 국적의 학생들이 많은 집단이지만, 미국의 군사 정책이 영향을 미치는 나라 출신들이 꽤 많은 탓에, 우리는 국적을 불문하고 함께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을 공유하고 서로를 달랬다. 영화학도들뿐만 아니라 영화과의 교수들도 어느 정도 충격을 받긴 마찬가지였다. 많은 극작 혹은 연출 분과의 교수들이 본격적인 수업 시작 전 30~40분의 시간을 대선에 대해 말하는 것에 할애했고, 학장은 모든 예술학도에게 장문의 이메일을 보냈다. 학과 건물의 로비 한쪽 벽면엔 ‘다가올 시대의 예술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써 붙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졸도Swoon>(1992)과 <세비지 그레이스Savage Grace>(2007)를 연출한 영화감독이자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화 연출을 가르치는 중인 톰 케일런이 사석에서 내게 해준 말이었다.

자신의 연출 수업 시간에 <살인의 추억>(2003)을 예시로 보여줄 정도로 봉준호 감독의 열렬한 팬인 케일런은 종종 내게 한국 사회에 대해 묻기도 하기에, 우리는 각자가 속한 사회뿐만 아니라, 타자로서 각자의 사회에 관해서도 얘기를 나누었는데, 무수한 긴 한숨들이 지나간 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챙길 때, 그가 마지막으로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클리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서로 더 사랑하고 지켜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럴 수 없다면 우리에게 더 이상 희망은 없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바로 그 순간에 그의 말이 내게 와 닿진 않았다. 말이야 바른 말이었지만, 그의 말마따나 클리셰처럼 느껴졌달까. 하지만 정확히 그날 밤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잘 기억나진 않지만, 케일런의 말을 곱씹으며 시간을 보내던 중, 한국에서 날아온 기사 하나를 며칠이 지나 뒤늦게 읽은 순간, 그의 말은 더 이상 클리셰로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11월 5일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2차 범국민 행동에서, 10대 청소년들이 폴리스 라인 앞에 늘어서 경찰을 지켰다는 내용이었다. 방금 읽은 것을 머리로 이해하기도 전에 눈물이 먼저 왈칵 쏟아졌다.

클리셰가 무엇인가? 어떠한 이야기를 풀어냄에 있어 독창적인 고민 없이, 이미 사용될 만큼 사용된 장치를 쉬운 선택지로 골라 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이 반복 사용된 듯 보이는 보편적인 장치라도, 적절한 곳에 위치해 확실하게 효과를 발휘한다면, 아무도 그것이 클리세라고 어깃장을 놓지 않는다. 경찰에게 보호받아야 할 10대 청소년들이 평화 시위를 지키기 위해 오히려 경찰을 보호하려고 나섰다는 이야기가 우리가 서로 더 사랑하고 지켜나가야지만 희망이 생겨날 수 있을 것이라는 누군가의 메시지와 만났을 때, 나는 마치 ‘문제에 처한 주인공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을 실행할 용기를 낸다.’는 아주 보편적인 스토리의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를 보는 관객이 된 기분이 들었다.

흔히 정치 비관론에 빠진 이들은, 다시금 뭔가를 바꿔보려고 움직이는 사람들을 향해 냉소를 던진다. ‘그래 봤자 변하는 것은 없더라.’, ‘겪어 보니 그 놈이 그 놈이고, 다 똑같더라.’라는 흔한 푸념부터, 심하게는 ‘촛불은 바람에 쉽게 꺼진다.’까지 등의 논리가 일종의 갑옷이자 눈가리개가 되어 그들을 둘러싼다. 어쩌면 그들이 보기에 역사 속에서 무수히 반복되던 착취와 지배 그리고 그에 대한 저항의 시도들은 역사의 클리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의 저항과 움직임은 때때로 즉각적인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세대와 세대를, 그리고 세기와 세기를 거쳐 더딘 응답을 언제나 받아내곤 했다. 누군가가 지금 신분제의 부활과 노예 사유화, 그리고 여성의 정치 참여 제한을 주장한다면 그 누군가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겠지만, 사실 노예 해방이 이뤄지고 여성 참정권이 인정받은 것은 이 길고 긴 인류의 역사의 끝자락, 불과 지난 한 세기 동안 이뤄졌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침묵하는 기득권의 냉소와 탄압을 겪어 내고 당연해야 하는 것들을 이뤄내려는 사람들의 지난한 노력과 그 과정은 길고 긴 인류의 역사라는 이야기 속에서 분명 효과를 발휘한, 클리셰가 아닌 그 무엇이다.
 

1989년의 할로윈데이, <오즈의 마법사> 속 인물 도로시로 분한 ACT UP의 멤버가 ‘도널드 트럼프를 체포하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시위에 임하고 있다. [사진출처]Surrender Donald! A Queer Call to Action Since 1989

사실 도널드 트럼프(와 그가 대표하는 집단)에 대한 저항도 이번 미 대선보다 훨씬 이전부터 있어 왔다. 케일런이 속해 있기도 한 국제단체 ACT UP(AIDS Coalition to Unleash Power)의 멤버들은 도널드 트럼프가 트럼프 타워를 건축하며 받았던 육백이십만 달러의 세금 혜택이 뉴욕의 빈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구축할 예산으로 사용될 수 있었을 가능성을 지적하며, 트럼프를 가난한 자들을 소외시키고 부유한 자들의 특권을 강화하는 잘못된 체제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1989년 10월 31일 맨해튼의 트럼프 타워 앞에서 트럼프에 저항하는 시위를 펼쳤다. 1989년의 그 날 20대 청년이었을 톰이 트럼프 타워 앞에 서 있었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그 해 태어난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가 한 명의 영화감독이자 미디어 아티스트로서 트럼프와 그로 대변되는 이 사회의 시스템과 싸워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내가 살아온 세월만큼 시간 동안 거대한 부조리와 싸워왔다면 지칠 법도 할 텐데, 앞서 언급한 대화 이후 며칠이 지나 수업 시간에 교수와 학생으로서 다시 만난 케일런은 대선 결과를 다시금 언급하며 ’바로 이것이 우리가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이유다.’라고 자신의 학생들에게 말했다. 영화라는 것은 하나의 매체이자 언어이며, 감독 혹은 작가가 되길 지망하는 우리는 각자의 가치와 신념을 가지고 세상에 맞서 영화라는 언어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의미의 발언이었다.

그렇다, 미국이냐 한국이냐의 지리적 문제를 차치하고, 지금은 영화에 대해 말할 때가 아니라, 영화가 말해야 할 때다. 우리가 어딘가의 광장에 모여 우리의 목소리로 부정에 맞서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화 또한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용기를 내서 그것을 말해야만 하는 시기이다. 평론가 강소원은 11월 23일 자로 부산일보에 게재된 본인의 칼럼에서 올해 부산독립영화제 출품작 대다수의 문제가 ‘절망적인 시대를 절망적인 영화로 담아냈다는 데 있지 않고 그 절망적인 시대를 바라보는 자신만의 시선과 목소리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지금 광장으로 뛰쳐나온 세대의 영화 속에선 왜 그러한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나는 강소원의 이러한 지적이 단지 부산의 젊은 감독에게만 해당하는 분석이 아닌, 필자가 속한 세대의 감독들이 만든 지난 몇 년간의 독립 영화 전반에 적용 가능한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로 하여금 영화 속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행위 자체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만든, 지난 역사 속의 여러 사태에 대항할 때마다 느낄 수밖에 없었던 무력감이 우리의 말문이 잠시 막히게 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느리고 더디게 승리를 쟁취한 적이 있으며, 지금은 또 다른 아주 길고 긴 싸움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중이다. 누군가가 살아온 평생보다 더 오랜 시간 광장에서 싸웠지만 지치지 않은 이가 있으며, 누군가보다 훨씬 적은 세월을 살았지만, 용기를 가지고 광장에 발을 디딘 이들이 있다. 당장은 우리의 이러한 또 한 번의 저항이, 그간 무수히 있어 왔던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는 클리셰적인 시도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다시 한번 느린 승리를 쟁취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분명 나아지는 중이고, 우리가 써내려가는 중인 우리의 역사와 우리의 영화에서 이러한 시도들이 클리셰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선 이렇게 주장하는 필자부터 그동안의 비관론을 버리고, 다시 한번 희망을 바라보려고 한다. 나로 하여금 너무나 당연한 것이 모두 클리셰는 아님을 깨닫게 해준 광장의 청소년들에게 이 지면을 빌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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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 설명: 미 대선 이튿날인 11월 9일, 맨해튼 타임스퀘어의 정경. 네온 사인 속 문구: “Trump victory causes ‘SERIOUS CONCERNS’ in Middle East”(트럼프의 승리는 중동 지역에 심각한 문제들을 초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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