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또 내일 Tomorrow After Tomorrow 임권택, 1979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14-05-29조회 12,165
내일 또 내일 Tomorrow After Tomorrow

'산책, 양산을 든 부인'
'산책, 양산을 든 부인'

'야외 습작. 왼쪽을 마주보는 여인' '야외 습작, 오른쪽을 마주보는 여인'
'야외 습작. 왼쪽을 마주보는 여인' '야외 습작, 오른쪽을 마주보는 여인'

같은 영화를 두 번 만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여기서 리메이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위대한 모네를 생각하는 중이다. 1875년 클로드 모네는 <산책, 양산을 든 부인>을 그린 다음 거의 같은 구도로 1886년 <야외습작, 왼쪽을 마주 보는 여인>을 다시 그렸다. 그리고 그해 이 작품과 하나의 짝을 이루는 <야외습작, 오른쪽을 마주 보는 여인>을 그렸다. 이 작업은 반복이지만 둘 사이의 차이에는 아르장퇴이으의 철교와 봄꽃이 만개한 들판에서의 작업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 다음 다시 베퇴이으에서의 겨울을 셈에 포함시켜야 한다. 모네는 같은 대상을 다시 그렸지만 그는 그 대상이 이미 같은 시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대상이라고 불렀다. 그런 다음 수련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지베르니에서의 수련. 그리피스가 <국민창생>을 찍고 있을 때 모네는 그의 정원에서 수련으로 천지창조를 하고 있었다. 하나의 수련. 다음 수련. 오전의 수련, 오후의 수련. 여기에는 예술에서의 독특한 보편성과 특수한 일반성 사이의 대립이라는 다소 까다로운 질문이 뒤따라온다. 핵심은 예술이 행위이기 때문에 반복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배움을 영화에로 가져오고 싶다. 동일한 작업이 반복될 때 나는 거기서 종종 진정한 행위를 발견하곤 한다. 히치콕은 1934년 영국에서 <암살자의 집>을 찍은 다음 할리우드로 건너와서 1956년에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를 다시 만들었다. (두 편의 영어제목은 모두 이다) 오즈는 1934년과 1959년에 두 편의 <부초>를 찍었다. 또한 1949년에 <만춘>을 찍은 다음 같은 이야기로 1962년 예기치 않게 그의 마지막 영화가 된 <꽁치의 맛>을 찍었다. 프리츠 랑은 몇 차례이고 지치지 않고 마부제 박사의 커튼 뒤로 돌아갔다. 작품에서 무언가 반복될 때 왠지 예술에서의 순수한 순간성이랄까, 혹은 그것이 담보하는 영원성이 손상 받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들을 보고 있으면 나는 질문을 바꿔보고 싶어진다. 영화에서 반복이 무엇이냐고 질문하는 대신 반대로 이들 작품 안에 들어와서 무엇이 반복을 성립시키느냐고 물어보고 싶어진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영화에서의 일반적 규칙을 유지시키는 따분한 보편성으로부터 재빨리 빠져나와 반복을 성립시키는 바탕 위에서 보다 우월한 형식을 향해 도약하려는 의지의 프로그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말을 반복하고 싶다. 무언가를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잘 전진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때 여기에는 분명히 반성이 포함되어 있다. 니체의 교훈. 세계의 변화에 대해서 가장 성공적인 반응은 실패이다. 그런 다음 거기서 무엇을 덧셈하는가, 혹은 뺄셈하는가. 다소 멀리서 임권택의 영화를 따라가고 있으면 뭐랄까, 몇 차례이고 같은 영화를 두 번 만들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나는 이것이 임권택의 참된 운동 중의 일부인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 그 자신은 이런 운동에 대해서 반복해서 경멸을 표시했고 때로는 대담의 형식을 빌어서 자기를 자석처럼 끌어당긴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두렵다고도 말했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한다. 당신이 잘 알만한 사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천년학>이 <서편제>의 속편이라기보다는 무언가 이 영화를 다시 찍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천년학>은 <서편제> 이후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마치 <서편제 version 1.5> 처럼 보일 때가 있다. 많은 이야기가 그 후일담이지만 또 그만큼 많은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진행된다. 가장 당혹스러운 순간은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서편제>가 처음 시작했던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간 다음 <천년학>을 다시 시작할 때이다. 그런 다음 이야기는 미처 <서편제>에서 하지 못한 버전의 다른 줄기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서편제>에서 송화의 동생 동호는 가족을 떠난 다음 고수로서 북을 놓아버리고 완전히 다른 일을 한다. <천년학>에서 동호는 가족을 떠나는 것까지는 마찬가지이지만 여전히 그런 다음에도 계속 북을 두드리며 누나 송화를 찾아다닌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장군의 아들>을 만들면서 임권택은 “이제까지 부정해왔던 영화들, 그런데 몸에 익어버린 것들로부터 얼마나 떨치고 나왔는지 나 자신을 한번 점검해보고 싶은 거요” 라고 말했다. 나는 좀 더 은밀한 예를 들고 싶다. <만다라>를 찍은 다음 원래 임권택이 만들려고 한 영화는 비구니에 관한 이야기 <비구니>였다. 겉으로는 <만다라>에서 스님을 찍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비구니를 찍음으로써 서로 젠더(sexual difference)로서 하나의 짝패를 이루기는 하겠지만 그보다는 (개인의 삶 속에서) 소승불교를 다룬 다음 (한국전쟁을 경유하는 역사 안에서) 대승불교를 다루려는 것이 불교에 대한 임권택의 서로 다른 두 가지 질문이었다. 그러나 <비구니>는 1987년 6월 11일 제작가처분 재판 이후 제작을 중단하였다. 하지만 임권택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좀 더 기다린 다음 <아제 아제 바라아제>를 찍었다. 당신이 <비구니>와 <아제 아제 바라아제>의 시나리오를 함께 읽어보면 두 영화의 상당히 많은 씬이 서로 겹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잡초>를 볼 수 없지만 거의 같은 이야기를 현대로 옮긴 <맨발의 눈길>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임권택은 성공한 영화를 반복한 적이 없다. 반대로 그 영화가 불만족스러울 때, 무언가를 망쳐버린 것에 대해서 보상을 요구하기라도 하듯이, 미처 치루지 않은 셈을 마저 청산하기라도 할 것처럼, 그렇게 마치 그 자신의 억압의 귀환이기라도 한 것처럼 되돌아온다. 여기에는 분명히 통과에 실패한 무언가가 웅성거린다. 그때 둘 사이의 차이가 무언가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내일 또 내일>, <오염된 자식들> ​​​​​​
<내일 또 내일>, <오염된 자식들> ​​​​​​

나는 어쩔 수 없이 임권택의 영화 중에서 순서를 역순으로 본 영화들이 있다. 그때 나중에 온 것을 먼저 본 다음 먼저 온 것을 나중에 보면서 생각지도 않은 일종의 전도된 관계의 네트워크를 발견하게 된다. <오염된 자식들>이 막 개봉했을 때 먼저 보고 난 다음 <내일 또 내일>을 한참 뒤에 보았다. 두 영화는 서로 다른 원작 소설을 각색하였고, 각자 각색을 했으며, 서로 다른 배우들이 출연한다. <오염된 자식들>은 유익서의 원작 「비를 타고 오른 망둥이」를 나한봉 작가가 각색하였고, 정일성이 촬영했으며, 안성기가 주연이고, 화천에서 제작하였다. <내일 또 내일>은 김용성의 동명 원작소설을 홍파 감독이 각색하였고, 이석기가 촬영했으며, 이덕화가 주연이고, 현진에서 제작하였다. 이 두 편의 영화가 시간적으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내일 또 내일>은 1979년에 만들었고, <오염된 자식들>은 1983년에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두 편의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순서를 뒤집어서 보았을 뿐만 아니라 기억 안에서 서로 너무 멀리 있었다. <내일 또 내일>을 처음 보았을 때 단지 내가 이미 이 영화를 어디선가 보았다는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었다. 그저 그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다음 며칠 후 <오염된 자식들>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비로소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임권택 감독님과 두 번째 전작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고 순서대로 영화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 둘을 거의 연속으로 보게 되었다. 물론 둘 사이의 관계는 희미했고 인상적인 설명 이상으로 둘을 묶는 것은 까다로운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말을 돌리지 않고 <오염된 자식들>은 <내일 또 내일>을 다시 만든 것입니까, 라고 질문했고 둘 사이에는 아무 관계도 없다, 라는 무심한 대답으로 돌아왔다. 그런데도 나는 이 질문을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다. 여기서 지금 작가(les auteurs)들은 같은 이야기를 계속해서 변주한다는 작가주의 이론을 따분하게 되풀이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엔 거기 머물면서 활동하는 힘이 그 무언가를 표현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말하자면 내부의 힘. 거기엔 멈추지 않고 거듭 되돌아와서 미처 감당하지 못한 것을 끌어들여 자기를 다시 구성하는 것이 어디선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만일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반복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내일 또 내일

이번에는 순서대로 따라가 볼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내일 또 내일>을 건드린 다음 <오염된 자식들>을 만져볼 것이다. <내일 또 내일>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다 못해 지루할 정도로 진부한 이야기가 진행되는 영화이지만 이상할 정도로 그 안에서 인물들을 따라가기가 힘들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이야기의 선은 느슨하게 펼쳐져 있는데 그 안을 구성하고 있는 인물들 사이의 이접은 거의 종합을 와해시킬 정도로 서로 섞이고 끌어당기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조정되지 않는다. 단지 거기 변주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무언가 그들이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 공생을 하고는 있는데 각자의 기호들이 만들어내는 힘이 어떤 협주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것을 불협화음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서로 모호한 채로 머물면서도 이미 수없이 본 진부한 이야기 안에서 서로를 착취하고 있을 때, 그렇다, 착취라고 할 수밖에 없는 관계 사이에 생겨나는 교차의 규칙들은 어디에 기대고 있는 것일까. 그러므로 여기서는 먼저 이야기의 선을 따라가면서 갑자기 생겨나는 굴곡들을 쳐다볼 것이다. 이상할 굴곡들, 어쩌면 얼룩들. 거기서 잠시 환상이 멈추고 무언가 응답으로 되돌아온 것처럼 보인다. 무언가? 지금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접었지만 그것을 바라볼 때 매듭처럼 보이는 무언가, 라는 이것임.

진우와 규화
진우와 규화

규화와 미연
규화와 미연

아마도 나는 지금 임권택의 영화 중에서 가장 난처한 순간 중의 하나에 머물고 있는 중일 것이다. 무언가 비스듬히 자리 잡고 있는 장면들. 그 사이에 끼어드는 잔인함. 구태여 바쟁을 빌려 설명하면 <내일 또 내일>은 잔혹영화이다. 세상에 대한 이상한 비전, 화면 위에 표현되는 것과 정반대의 내밀한 내용들. 그 사이에서 살과 신경을 필요로 하는 긴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바쟁의 예. 루이스 부뉴엘의 멕시코 영화들. 윌리엄 와일러의 <작은 여우들>. 히치콕의 <패러다인 부인의 사랑>. 아마도 트뤼포라면 <염소좌 아래서>를 추가했을 것이다. 내가 떠올린 예. 임권택의 이상한 영화들. 나는 다소 장황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다. 서울에서 함께 대학을 다니는 규화와 진우는 고향 죽마고우이다, 라고 썼지만 주인과 노예에 가까워 보인다. 이 영화의 첫 장면. 함께 걸어가던 규화는 길거리 리어커 과일상에게서 귤을 집어 들며 다짜고짜 진우에게 계산을 하라고 말한 다음 그냥 자기 갈 길을 간다. 그러면서 규화는 조금도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진우는 우물쭈물하면서도 자기가 계산을 한다. 규화와 진우, 미연은 어려서 소꿉놀이를 할 때부터 친구였고 진우는 미연을 마음속으로 사랑하며 열심히 연애편지를 썼지만 규화는 그 사이에 “힘으로 미연의 육체를 점한 다음 자기의 여자로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규화는 그걸 진우에게 비밀로 하고 지금 미연을 대전에서 만나기 위해 서울역으로 가는 길이다. 하지만 기차를 타러 가는 규화를 바라보는 진우는 그걸 이미 알고 있다. 비밀을 알고 있는 친구와 그걸 비밀로 삼고 있는 친구. 그런데 이 사이에는 긴장이 없다. 혹은 시작하자마자 그런 긴장으로 이 영화를 진행할 생각이 없다는 것만 같은 태도를 취한다. 왜냐하면 규화는 미안한 감정이 없고, 이 영화는 모든 걸 포기한 듯한 진우의 체념한 목소리로(voice_over_narration)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이야기가 진우의 관점으로 진행되는 것도 아니다. 정작 이야기의 진행은 규화의 편에 서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종종 우리는 진우의 동선을 놓치게 된다. 어느 순간 문득 영화를 보다가 지금 진우는 무얼 하고 있을지 궁금해지기조차 한다. 규화가 미연을 몰래 만나는 건 알지만 그 둘 사이의 시간의 디테일은 진우가 알 수가 없다. 그때 영화는 규화를 따라서 이동한다. 대전에 내려간 규화는 미연에게서 잠자리를 취할 뿐만 아니라 정기적으로 용돈을 받는다. 물론 규화는 미연에게도 미안함을 조금도 느끼지 않는다. <내일 또 내일>은 이렇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시작한다. 이야기는 조금도 이상할 게 없는데 그들 사이의 관계의 감정이라는 문제로 들어오면 갑자기 어리둥절해진다. 왜 이들은 서로에게 이렇게 이상한 관계를 허락하는 것일까. 그런데도 임권택은 이걸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어떤 우여곡절도 없이, 추호도 설명할 생각 없이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진행해나간다. 이상한 여기. 여기에는 두 개의 환상이 충돌하고 있다. 하나는 과정의 환상이고 다른 하나는 겪음의 환상이다. 그 둘 사이에서 주인공들은 견뎌야만 한다. 말하자면 고통 속의 기쁨, 그리고 기쁨 속의 고통을 보는 쪽과 공유하지 않으면서, 아니 그러기는커녕 매번 반대의 자리에서 주고받으면서, 그 자리로 갈 때마다 재빨리 반대의 자리로 오면서, 두 개의 과정이 소진될 때까지 앞으로 나아가는 일만 남게 된다. 

그 뿐만이 아니다. 당신이 임권택의 영화에 익숙하다면 여기에 또 다른 낯선 기호들이 기다리고 있다. 임권택은 시각적 내러티브와 청각적 선율이 서로 모순되게 작동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아니, 차라리 그는 이러한 불협화음이 간신히 만들어놓은 흥을 깨트린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럴 바에는 그 대목에 음악이 없는 편이 좋다는 선택을 한다. 그러나 <내일 또 내일>은 반복적으로 (연주를 포함한) 노래가 끼어든다. 산울림은 이 영화를 위해서 새로이 작곡했고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내일 또 내일’ 이외에도 ‘유리인형’과 ‘어디로 갈까’를 듣게 된다. 그중에는 인스트루멘탈 버전으로 녹음한 ‘바람 부는 강 너머’가 포함되어 있으며(이 노래들은 「산울림 4집」에 다른 방송 드라마를 위해 작곡하고 연주한 곡들과 함께 실려 있다), 임권택도 기꺼이 여기에 호응하여 이 영화 이전에 발표한 노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의 인트로 부분을 발췌해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종종 이 노래들은 이야기를 방해하고 있으며, 때로 가사 말은 은유적 비유로 읽히면서 마치 드라마의 예언자이거나 변사와 같은 역할을 하려는 순간들이 있다. 어쩌면 (미셀 시옹의 지적처럼) 모든 노래 가사 말은 이야기에 덧붙여지는 순간 그것이 의도치 않는다 할지라도 일종의 몽타주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걸 임권택이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냥 그렇게 한다. 이때 이 노래들은 단순하게 주인공들의 진부한 드라마와 기이한 심리상태의 긴장 사이에서 어떤 명령처럼 들린다. 명령? 그렇다. 고통스러운 정감이여, 다시 한 번. 마치 진행되는 고통스러운 이야기가 반복되어야 하기라도 하듯이 거기서 노래라는 통로를 통하여 달콤한 명령처럼 울려 퍼진다.
 


가희
가희




이야기는 삼각관계에서 좀 더 복잡한 조합으로 옮겨간다. 졸업을 한 다음 규화는 기자로 입사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고, 진우는 자취방에서 수공으로 인형을 만들면서 살아간다. 미연을 단념한 진우는 새로운 여자를 만나는데 그 여자를 만나는 자리에 “분위기를 만들어 달라”는 이유로 규화를 찾아와 함께 나간다. 거기서 규화는 가희를 만난다. 말하자면 행위의 반복. 마치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 것처럼 외상적 상황이 반복되고 미처 보지 못한 규화와 미연의 관계의 시작을 보는 것처럼 이야기는 진행된다. 모욕감을 느낀 진우가 먼저 떠나면서 “난 널 미워하고 싶어. 하지만 미워할 수 없으니까 난 참 딱한 놈이야” 라고 말하며 규화에게 돈을 건네준다. 하지만 그 돈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규화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시계 좀 풀러”라고 요구하자 진우는 “미쳤구나. 넌 날 버렸어. 시계 주지. 이게 마지막이야. 절교야” 라고 말하고 떠난다. 그리고 그날 밤 규화는 가희를 데리고 호텔에 간다. 물론 여기서 벌어지게 될 상황은 자명하다. 그런데 진행은 어리둥절할 정도로 고통스럽다. 처음에 두 사람은 호텔 방에서 거리를 유지하고 얌전히 앉아있다. 규화는 설득을 하지만 가희는 거절을 한다. 규화가 가희에게 다가가 (한편으로는) 무릎을 꿇고 (그와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모욕을 가하면서 섹스를 요구하지만 가희는 “자꾸 그러면 때릴 거야”라고 말하고는 규화가 벗긴 세미부츠를 빼앗아 있는 힘을 다해 내리쳐서 쓰러트린 다음 가방을 들고 재빨리 방문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하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다. 규화는 복도까지 쫓아 나온 다음 가희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질질 끌면서 방으로 다시 데리고 들어가 물이 가득 찬 욕조에 쳐 넣고 핸드백을 집어던지고 발로 그녀를 짓누른다. 그런 다음 흠뻑 젖은 그녀를 다시 방문 바깥으로 끌고 나가 핸드백을 집어던지면서 “갈 테면 가봐”라고 쫓아내고 문을 닫아 버린다. 복도에서 망설이던 가희는 돌아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들기면서 규화, 규화, 라고 이름을 부르며 열어달라고 호소한다. 이 장면은 갑작스러운 폭력으로 감정선이 절단되는 듯한 각자의 거절 때문에 놀라게 되고 그런 다음 떠나려던 그녀가 되돌아와 문을 조심스럽게 두들기면서 애처롭게 규화의 이름을 부를 때 포기해버린 (자유로운) 선택이 난처하게 만든다. 두 사람을 묶는 것은 폭력적인 행위의 교환을 나눈 다음에 이루어진 사랑의 행위이다. 이 새로운 조합이 생겨나는 동안 진우는 좀 더 이상한 관계를 만들어낸다. 진우가 사는 자취방은 거대한 저택의 정원 저편인데 그 안채에는 하루 종일 피아노를 치면서 한낮에도 잠옷에 가까운 옷을 입고 외롭게 지내는 미망인이 집사를 거느리며 살고 있다. 그녀는 종종 창문 바깥에 보이는 진우의 방을 쳐다보면서 시간이 나면 그를 방문하곤 한다. 그리고 진우가 가희를 만나러 외출하던 날에는 자신의 죽은 남편의 옷을 빌려주는 호의를 보여주면서 마치 오래된 아내처럼 직접 옷매무새를 만져주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 둘 사이에는 그 이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진우는 사랑의 기호에 대해서 몹시 둔감하거나 혹은 리비도의 몸짓에 대해서 거의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차라리 진우가 사랑하는 대상은 규화라고 하면 모든 것이 쉽게 설명될 수 있을 정도이지만 임권택은 이 둘 사이에 게이 커플로서의 어떤 흔적도 남겨놓지 않는다.






(김용성의 원작소설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잘 설명하긴 어렵지만) 갑자기 이야기는 여기서 다른 차원으로 옮겨간다. 가희는 큰 회사 회장의 애지중지하는 외동딸이었으며 “멋대로 어디론가 아무 연락도 없이 사라진 다음 한참 후에야 돈이 떨어지면 집으로 돌아오는” 딸의 마음을 붙잡은 규화를 사위로 삼고 싶어 한다. 바로 그 순간 미연은 임신을 하고 이것이 추문이 되어 학교에서 퇴직을 당하고 서울로 규화를 찾아온다. 깊은 저녁 남산 레스토랑에서 만난 규화는 미연에게 임신중절을 요구하지만 거절하자 바로 눈 앞 낭떠러지에서 순간적으로 그녀의 목을 조르며 밀어버릴 듯한 행동을 취한다.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은 조지 스티븐스의 <젊은이의 양지>에서 공장 노동자 조지가 재벌 집 외동딸 안젤라의 눈에 들자 동거하던 여자 앨리스를 보트에 태워 물에 처넣는 순간이다. 물론 이 영화는 시어도어 드라이저가 1925년에 쓴 「미국의 비극」을 각색하면서 자연주의 기법의 시선으로 다룬 냉혹한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멜로드라마의 신파로 옮겨놓았다. 나는 임권택이 원작소설을 경유하여 영화와 소설 어느 쪽의 영향 관계 아래 놓여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어처구니없게도 규화의 행동은 레스토랑 음식을 서빙 하는 여자가 창문 바깥을 향하여 주문한 음식이 나왔으니 식기 전에 먹으라는 외침으로 마치 해프닝처럼 갑자기 중단된다. 무언가를 찢어버리는 것만 같은 개입. 사건을 포기해버리는 것만 같은 연쇄망의 절단. 하려던 행위가 중단되었을 때 여기에 고스란히 남은 불만족의 경제학은 다음 이야기의 장면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씬을 반복해서 보았고 볼 때마다 이상하게도 이 장면은 꿈속의 무대처럼 보이기조차 한다. 그래서 꿈속의 나쁜 행위에 대해서 누군가 꿈 바깥에서 외쳐서 깨우는 것만 같은 효과를 보여준다. 그 유명한 프로이드의 예. 아버지, 지금 제가 불타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으세요. 

여기서 다시 시간이 점핑하고 나면 출산을 앞둔 미연은 진우의 자취방을 찾아온다. 병원에서 딸을 낳은 미연은 진우에게 “좋은 여자를 만나서 결혼”하라는 충고를 한다. 말하자면 미연은 자신이 운명의 가장 밑바닥에 추락했을 때조차 진우와 맺어진다는 상상은 단 한 순간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충고에 따르기라도 한 것처럼 진우는 고향에 돌아가 결혼을 한다. 그 사이에 규화는 가희와 결혼을 한 다음 미국에서 비즈니스에 큰 성공을 거두고 돌아와 회사의 전무가 된다. 자, 이제부터 미연과 그 딸의 이야기가 남는다, 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틀렸다. 영화는 여기서 삼분의 일이 조금 넘게 지났을 뿐이며 이야기는 더 복잡해진다. 규화와 결혼을 했지만 가희는 여전히 가출벽으로 기회가 닿을 때마다 집을 떠나면서 연극 연출자와 바람을 피우는 중이다. 게다가 그녀는 미연과 그 아이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규화에게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한다. 진우는 고향에서 결혼을 했지만 그의 아내는 새로운 남자가 그녀 앞에 나타날 때마다 요사스러운 웃음을 지으면서 유혹한다. 미연의 딸은 그녀의 아버지가 키우고 그녀는 혼자서 가난하게 전화 교환수를 하면서 살아가는 중이다. 이때 이 모든 이야기를 규화에게 들려주는 사람은 (다소 놀랍게도) 예전 진우가 살던 자취방의 저택 주인인 미망인이다. 심지어 그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미연의 집 주소도 갖고 있다. 여기까지 쫓아왔을 때 나는 거의 길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말 그대로의 부조리. 삶의 일상생활이라는 장소 안에서 진부한 인물들은 계속해서 활동하면서도 매번 기괴한 선택을 반복해서 하면서 점점 더 상황을 나쁘게 만들어나간다. 여기서 가능한 것들 중에서 매번 가장 나쁜 선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걸 단지 그들의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이야기는 잘 알겠는데, 잘 알 뿐만 아니라 이런 진부한 이야기의 진행에 대해서 비슷한 수많은 영화의 제목을 알고 있는데, 이 이야기 속의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유지하는 감정선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내일 또 내일>이 만족스럽지 않다 할지라도 나는 이 영화에 까다로운 질문이 포함되어 있다고 믿는다. 이상하게도 임권택은 <왕십리>에서 <오염된 자식들>, 혹은 <나비 품에서 울었다>에 이르기까지 무언가 세상의 밤 안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왜 그런 것일까. 뭐랄까, 여기에는 곤궁에 처한 임권택이 있다. <족보>에서 <짝코>를 거쳐 <만다라>로 가는 임권택이 있지만 반대로 매번 마치 그 자리에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처럼 이 안으로 되돌아온다. 지금, 여기라는 문제는 단순하게 임권택에게 동시적인 삶의 평행관계가 아니다. 만일 여기서 올바른 대답을 구하지 못하면 우리는 <길소뜸>의 냉담함과 <티켓>의 참혹함 사이에서 길을 잃을 것이다. 무언가 계속해서 실망스러운 과정의 반복. 그 안에서 부서지는 과거. 새로 떠오르는 기괴한 교환 관계. 임권택은 몇 번이고 물어본다. 그런 계약관계를 맺어도 괜찮은 것일까. 말하자면 당연히 몰락해야 하는데도 그 안에서 다시 시작하는 세계라는 암흑. 자기가 포함되어 있는 세계의 변화와 영화가 바라보는 세계 사이의 무심함 사이에서 임권택은 반복해서 어디까지 몰입하여 건드려보아야 할지와 어디까지 다가간 다음 멈춰 서서 쳐다보아야 할지를 측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할 때의 이유이다. 임권택은 반복을 통하여 부분과 관계 사이에 놓인 암흑과 현실적인 동일성을 얻고 싶어 한다. 반복을 통하여 얻은 매번의 새로운 관계.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영화)와 (영화의) 세계 사이에 놓인 불화를 설명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것이 암흑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서사가 사라진 시간 안으로의 진입.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월드. 강제된 선택의 상황. 나는 당신에게 임권택이 <티켓>이후 <화장>까지, 1985년 이후 2014년까지 두 번 다시 우리와 평행하는 시간으로 돌아온 적이 없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물론 <아제 아제 바라아제>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구니를 따라 산사를 떠돌면서 현재의 시간과의 끈은 느슨해진다. 그런 다음 <축제>를 말하고 싶을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시작하면 호남 저 시골 마을로 내려가 장례식을 치르는데 모든 시간을 바치고 있다. 거의 이야기되지 않는 <창(娼) 노는 계집>조차 현재의 시간에 이르자 문득 영화가 끝나버린다. <달빛 길어 올리기>를 말하고 싶을 것이다. 반대로 이 영화는 한지(韓紙)를 따라 현재의 시간을 떠나 불가능한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주기 바란다.

 

미망인
미망인


말하자면 여기서는 당신께서 이 질문을 안고 이야기를 따라가 보기 바란다. 아직 아무 것도 정리되지 않았는데도 여기에 다시 규화와 미연의 딸 옥희가 이야기 안으로 들어온다. 규화는 세속적 성공을 노리면서 가희를 붙잡아야 하기 때문에 옥희를 데려가야만 하고 미연은 자기가 딸을 키울 결심을 한다. 물론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한국영화사 안에서 <미워도 다시 한 번>(과 그 변주들)에서 수 없이 보았다. 임권택은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다. 규화는 미연과 다시 한 번 그녀의 집에서 섹스를 나눈 다음 옥희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진우는 아내와 이혼을 하고 규화를 찾아온다. 그때 진우에게 미연이 술집에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은 규화이다. 말하자면 규화는 옥희를 데려온 다음에도 계속해서 미연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 데도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는 사진을 진우에게 보여준다. 모두를 집어삼키고 있는 정념의 지옥. 모든 관계가 망가졌는데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생활이라는 기계. 하여튼 그 안에서 살아야 한다. 거의 맹목적인 사슬. 규화는 이제 사업에만 몰두하고, 미연은 옥희의 주변을 맴돌고, 진우는 미연의 주변을 맴돌고, 가희는 규화의 주변 바깥을 떠돈다. 이때 규화의 부동산 사업 확장을 위해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인물로 갑자기 큰 저택을 소유하고 있는 미망인이 다시 (난데없이?) 그 앞에 등장한다. 미망인은 단지 “땅을 사자는 사람은 많아요. 우리 측에서 땅을 팔겠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무수한 사람들이 찾아들어요. 허지만 안 팔아요. 내 땅을 내놓을 이유가 생긴다해도 선진물산에는 팔지 않겠어요. 왜냐하면 그 회사에 이규화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죠.”라는 대답을 전한다. 그 대답은 당신이 올바르게 내가 보낸 편지를 읽을 줄 안다면 당신에게만 팔겠다, 라는 뜻이다. 물론 규화는 그것이 전달되는 회로를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해야 하는 (그것이 도덕적으로 바르지 않기 때문에) 올바른 대답의 행위도 알고 있다. 말하자면 그 행위는 그 둘의 관계에서 오로지 목표의 경제학 안에서는 옳지만 전체 안에서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잃어버리는 행위가 된다. 그러는 동안 미연은 옥희를 되찾아가고 그런 미연을 데리고 진우는 고향으로 다시 한 번 더 돌아간다. 물론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거기서 그 둘은 소꿉장난 시절의 행위를 반복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돌아간다.





여기서 이 이야기를 멈출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다. 규화가 실패하는 것이다. 그가 생각했던 사업은 부도의 형식으로 되돌아오고 미망인은 경제적으로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된다. 희생의 경제학은 이 영화가 멜로드라마라는 것을 증명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그때 비로소 가희는 규화와의 인연이 다했음을 깨닫는다. 둘은 바닷가까지 함께 드라이브를 한 다음 포옹한다. 그리고 피로에 지친 규화는 잠깐 잠이 든다. 그가 깨어났을 때 발견하는 것은 파도가 치는 바위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가희의 하이힐(뿐)이다. 처음 규화를 때렸던 그 신발. 자동차 앞창 유리에는 그녀가 마치 피처럼 붉은 립스틱으로 써놓은 유서가 남겨져있다. “규화! 진실된 자리에 앉고 싶었어요. 방황을 끝내며, 가희” 마치 잠깐의 꿈과도 같았던 도약의 입구와 끝. 규화와 자본을 중재한 매개항의 소멸. 하지만 여전히 그는 자기가 도착해야 할 곳을 알지 못한다. 규화는 (감옥에서 풀려나온 가희의 아버지를 경유하여) 다시 한 번 미망인의 곁으로 간다. 자기에게 모든 것을 주겠다고 말한 다음 모든 것을 가져간 유일한 사람. 그녀는 규화가 왔을 때 망설이지 않고 자기의 선택을 들려준다. “당신의 날개를 꺾어놓고 싶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불안했어요, 두려웠어요,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규화라는 파랑새를 붙잡고 싶었어요” 이 메시지를 올바르게 읽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는 운명론의 간극이 존재한다. 최종순간이란 결국 무엇인가. 규화는 자신이 손에 넣고자 했던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혹은 실패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돈의 관점에로 이야기를 옮기면 이것은 하나의 자본이 다른 자본에로 이행하는 과정 중에 규화가 잘못 끼어든 잠깐 동안의 오류(인 척하면서 정확하게 작동한 재전유)로서의 매개의 사건이 소멸하는 시간이다. 임권택은 이야기 안에서 규화를 선과 악 사이에서 나쁜 존재로 설명하는 대신 이중의 관점을 취해서 처음에는 규화를 자본의 환상이라는 무대에서 만들어낸 이상적인 주체로 만들고 그런 다음 마치 자기 자신의 어리석은 욕망에 이끌려 자발적으로 추락하는 것처럼 가정된 (다소 도식적으로 설명하자면) 평균이윤율 경향 저하의 법칙에 따라 시장에서 배제시킨다. 말하자면 주체로부터 대상에로의 이동. 물론 이것을 이야기가 경제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야기가 종종 교훈극처럼 진행되는 것은 사실이다. 어떤 교훈? 자본의 순환 속에서 마모되어가는 주체의 소멸에 관한 교훈. 멜로드라마처럼 보이는 이 이야기에서 규화에게 추락을 안겨주는 것은 그의 감정이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완전히 그의 바깥에서 작동하고 있는 시장 주기 안에서의 산업의 이동과 이자의 증가에 따른 자본의 해체과정이다. 여기서 사용된 부엉이들이 다소 불편하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임권택은 현대의 삶 안에서의 경제활동에 관심이 많다. 이때 임권택의 관찰은 인간이 경제 활동에 개입하는 과정이 아니라 반대로 경제가 인간의 활동에 개입하는 방식과 순서에 있다. 이 순간 이야기에 말 그대로 별안간 전도가 벌어진다. 그가 여기서 지식의 도구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1979년이 분할하는 삶의 방식 안에서 화해하지 못하는 것들 사이의 충돌을 건드린다. 영화가 자기가 살아가는 시간 안에서 새로이 나타난 기호들을 다루는 까닭은 일어났던 사실이 아니라 사실이 가져다주고 있는 분쟁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쳐다보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내일 또 내일>은 어느 순간에 이르면 거의 와해직전까지 와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줄 때가 있다. 물론 그것을 임권택이 모를 리가 없다. 그는 자기가 그 힘에 밀려나고 있는 것처럼 자기 영화를 다룬다. 내가 궁금한 것은 무엇이 그를 밀어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가 그 힘으로부터 영화를 방어하느냐는 것이다.




이야기는 순환을 그린 다음 규화를 고향에 함께 살고 있는 미연과 진우, 그리고 옥희에게로 이끈다. 그리고 거기서 그가 보는 것은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고 있는 미연과 진우, 그리고 옥희이다. 규화는 옥희와 잠깐의 행복한 시간을 갖지만 그 앞에 나타난 미연은 옥희를 안고 아무 말 없이 딸에게 준 선물인 장난감 타조를 집어던진 다음 그 자리를 떠난다. 거절당한 선물. 이제 더 이상 할 일이 남지 않은 규화는 역에 와서 기차를 기다린다. 그때 진우가 다리를 절면서 나타난다. 그리고 규화에게 말한다. “빨리 니 마누라랑 딸을 데려가라, 둘 다 나에게는 큰 짐이야. 그렇다고 지금 찾아가라는 얘기는 아니다. 변칙처럼 지름길만 찾아 미친개처럼 날뛰는 네 놈의 못된 버릇을 고치기 전에는 찾아가려고 발광을 해도 내주지 않겠어. 그렇다고 따라나설 미연이도 아니니까. 당당하게 대로를 택하기 전에는 말이다.” 규화는 잘 설명하기 힘든 표정을 지은 다음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그때 막 개발되고 있던 강남의 풍경이 멀리 보이면서 걸어가는 규화의 롱 쇼트 위로 진우의 마지막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규화는 옥희를 통해서 살아있는 자기 자신을 확인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규화라는 하나의 인간은 옥희를 통해서가 아니라 미연이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길고도 끈질긴 구원의 되풀이에서 손을 들고 난 후에 내가 얻은 단 하나의 결론이다. 오미연이라는 여자는 이규화라는 남자 없이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갑작스러이 끝을 맺는 것만 같은 이야기의 끝. 

누군가 이야기의 줄기만을 따라왔다면 그래 알겠어, 규화라는 인물에 대한 설명은 충분해, 하지만 진우는 도대체 왜 그런 행동을 하는가, 라고 질문할 것이다. 나는 여기에 임권택의 궁극적인 실패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말을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여기서 실패는 <내일 또 내일>에 미학적 기준을 들이미는 말이 아니다. 진우는 규화를 끈질기게 저쪽에서 이쪽으로 잡아당기려간옛寧?쓴다. 이 쪽? 그렇다. 말 그대로 임권택이 생각하는 (아직은 그래도) 가능한 세계, 무심코 지나가 버렸지만 모든 노력을 기울여서라도 되찾아야 할 시간, 진정한 행복이 있다고 믿어지는 장소. 세 사람 사이의 교집합으로서의 고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곳. 규화(와 미연)의 딸이 (부(富)가 만들어내는 불행을 맛본 다음) 유일하게 행복을 느끼는 동네. 그 무엇보다도 규화가 자발적으로 플래시백이 유일하게 가능해지는 풍경. 만일 진우가 없었다면 규화는 되돌아와야 할 (저 쪽으로부터) 이쪽의 지평도 사라질 것이다. 여기에는 그 둘 사이의 고리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거의 희생적인 노력이 뒤따르고 있다. 그것을 임권택은 진우의 목소리를 통해서 “구원의 되풀이”라고 개념화한다. 여기에는 단순하지만 몹시도 분명한 이분법이 그 둘 사이를 쪼개내다시피 하고 있다. 이때 그 둘을 나누는 것이 가능해지는 까닭은 그 둘 사이를 오가는 진우라는 매개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그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자기에게 기회가 왔을 때조차 기꺼이 규화를 위해서 그 자리를 비워놓은 다음 자신이 무효라는 존재가 되기를 기대한다. 말하자면 진우는 지치지도 않고 과거와 현재 사이를 왕복운동 하면서 그 둘 사이의 순환을 거의 참을 수 없는 단계까지 기다린 다음 기회가 다가오자 있는 힘을 다해서 규화를 여기로 잡아당기려는 이행의 시도를 되풀이한다. 그렇다면 그런 되풀이 운동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미 대답을 알고 있다. 임권택은 먼저 (진우와 같은) 매개자를 삭제한 다음 (규화처럼) 주체에서 대상으로 추락하는 인물을 다시 한 번 바라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오염된 자식들>에서 되풀이 될 것이다. (계속)



1979년 120분 컬러 1.33
감독  임권택

주식회사현진
각본  홍파
촬영  이석기
조명  장기종
편집  김희수
음악  산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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