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리히터의 음악에 대하여 가장 단순한 선율로 감정을 건드리다

by.최다은(SBS 라디오PD,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 팟캐스트 <김혜리의 필름 클럽> 제작) 2019-05-20조회 1,937
지난 3월 초 콘서트 하나를 보러 일본 도쿄에 다녀왔습니다. 작곡가 막스 리히터(Max Richter)의 대표작 <The Blue Notebooks> 음반에 실린 곡을 연주하는 자리였습니다. 유럽에서야 중소도시까지 돌며 투어를 하는 그이지만 상대적으로 팬이 적은 한국에는 올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했기에 과감한 결정을 내렸죠. 10여 년 전 콜드플레이 공연이나 국내 아이돌의 도쿄돔 공연을 보기 위해 일본에 간다는 사람들을 볼 때 ‘정성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제가 그걸 하고 있더라고요.
 

막스 리히터는 현재 현대음악과 영화음악을 두루 포괄하며 활동하는 영국의 스타 작곡가입니다. 바흐-베토벤-쇼팽 등으로 이어지는 서양음악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그걸 소위 우리는 ‘현대음악’이라고 통칭하는데, 그 영역 안에 막스 리히터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의 음반은 ‘노란딱지’로 알려진 유서 깊은 클래식 레이블 도이치 그라머폰에서 발매됩니다.) 대학에서 클래식 작곡을 전공하고 전자음악까지 공부한 그는 많은 20세기 작곡가들이 그러했듯 개인 작품을 발표하는 동시에 영화음악 작업에도 몰두합니다. 2008년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 Waltz With Bashir>(아리 폴만)의 음악감독이 된 후로 매년 두세 편 이상을 작업해오다 몇 년 전부터 <미스 슬로운 Miss Sloane>(존 매든, 2016), <몬태나 Hostiles>(스콧 쿠퍼, 2017) 등 미국 메이저 작품과 HBO TV 시리즈에도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국내에 막스 리히터의 이름이 알려진 건 그의 대표곡인 ‘On The Nature Of Daylight’가 여러 영화에 삽입되면서부터입니다.

<셔터 아일랜드 Shutter Island>(마틴 스콜세즈, 2010), <디스커넥트 Disconnect>(헨리 알렉스 루빈, 2012), <컨택트 Arrival>(드니 빌뇌브, 2016) 속에서 들리던 이 곡은 매번 강한 인상을 남기는 동시에 작품별로 다른 감상을 전하는 놀라운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이미 다른 영화에서 사용됐다면 피할 법도 한데 계속해서 선택됐다는 건, 그만큼 이 곡이 매력적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릴 만한 가능성을 여전히 갖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죠.

한데 그 가능성이란 역설적이게도 이 곡의 단순한 구조에서 나옵니다. 쓰이는 화성은 단 네 가지뿐이며, 딱히 기억하고 따라 부를 수 있는 주제 선율도 없습니다. 첼로 두 대, 비올라 하나, 바이올린 두 대로 악기 구성도 단출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다이내믹함이 없진 않습니다. 비슷한 화성과 선율을 반복하더라도 음량을 달리하거나 선율을 한 옥타브 올려 연주하면서 음악적 표현을 풍성하게 해냅니다. 곡 자체의 밀도가 높지 않아 다른 요소와 결합이 쉬우면서 감정적으로는 충분히 사람을 뒤흔들어 놓으니, 특히나 영화 안에서 사랑을 많이 받은 것이지요.

사실 앞서 말한 특징이 이 한 곡에만 해당되는 건 아닙니다. ‘미니멀리즘’으로 분류되는 음악의 경향이기도 한데요. 실험성과 복잡성이 극도로 치달았던 현대음악의 발전 단계에서 반작용처럼 탄생한 미니멀리즘은 말 그대로 선율이나 리듬, 화성의 요소를 최소화한 음악입니다. 대중에게서 멀어졌던 현대음악은 미니멀리즘을 계기로 다시 관객과 가까워집니다. 이런 흐름의 중심에 필립 글래스(Philip Glass)가 있었고,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뮤지션들이 성장해 컨템퍼러리 음악계에 다수 출현하게 됐죠. 막스 리히터도 그중 하나이고요.

미니멀리즘 음악의 투명성과 단순함은 관객의 마음뿐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 안에도 잘 녹아들었고, 필립 글래스가 <디 아워스 The Hours>(스테판 달드리, 2002)로 대성공을 거둔 후 점점 그 지분을 넓혀왔습니다. 여전히 할리우드에서는 존 윌리엄스 스타일의 오케스트라 음악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만, 한편에선 ‘필립 글래스의 아이들’이 만드는 새로운 사운드가 또 다른 주류로 자리 잡고 있죠. 특히나 이들은 기존의 미니멀리즘 음악에 테크놀로지를 적극적으로 결합해 음악과 음향의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영화음악 스타일을 창조했습니다. 막스 리히터는 물론 <라이언 Lion>(가스 데이비스, 2016)으로 오스카 음악상 후보에 오른 더스틴 오 할로란(Dustin O’Halloran), <사랑에 대한 모든 것 The Theory of Everything>(제임스 마쉬, 2014)으로 골든 글로브 음악상을 수상하고 <컨택트>로 화제를 남긴 요한 요한슨(Johann Johannson) 등이 이 분야의 대표주자죠.

할리우드 중심의 국내 외화 시장에서 이들이 만든 음악이 자주 들릴 날은 어쩌면 요원해 보입니다. 그래도 기대를 접지 않는 건 아주 느리게나마 저의 이런 팬심을 공유하는 분들이 늘어난다는 점 때문인데요, 지난 3월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 ‘On The Nature of Daylight’이 삽입됐다는 소식은 그래서 더더욱 반가웠습니다. 이 글도 언제일지 모르는 막스 리히터의 내한을 하루쯤 앞당기는 역할을 하길 바라며,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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