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신성일, 전설이 되다 한국영화박물관 기획전시

by.조소연(연구전시팀) 2019-05-20조회 1,019
행사프리뷰 스틸
개막식에 함께한 동료 영화인들

신성일은 1960년 <로맨스 빠빠>(신상옥)로 데뷔한 이래 50여 년간 514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한국영화사상 톱스타의 지위를 가장 길게 누린 배우다. 1960년대 초 청춘영화를 통해 스타로 발돋움한 후, 기성세대에 반항하는 청년을 넘어 1970년대 무력감에 빠진 중년 남성을 대변했고, 1980~90년대 역사의 무게에 짓눌린 장년의 얼굴을 만들어갔다. 하지만 그가 보여온 다양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를 영원한 청춘의 아이콘으로 칭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전시는 신성일의 영화 세계에서 특히 ‘청춘’이란 키워드에 주목한다. 신성일은 청춘영화로 엄앵란과 함께 스타덤에 올랐고, 청춘영화를 통해 대체 불가능한 스타로 장기간 자리매김했다. 물론 신성일이 없었다면 1960년대 청춘영화 장르 역시 전성기를 구가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성일은 1960년대 청춘영화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신성일이 어떻게 영원한 청춘의 아이콘이 되었는지 1960년대 청춘영화 장르와 함께 조명해보고자 했고, 이를 총 7개 섹션으로 구성했다.

뉴스타(申星) 넘버원(一)
배우 신성일의 일생과 한국영화사에 남긴 전설적인 기록을 사진, 영상, 유품(트로피 등), 통계 등을 통해 쉽고 재미있게 알 수 있도록 전시했다. 신성일이 생전에 가장 아꼈다는 ‘최악배우상’(1967)도 직접 볼 수 있다.

은막의 황금 콤비 신성일 & 엄앵란
한국영화사에서 최초로 스타 시스템, 콤비란 말을 만들어낸 신성일과 엄앵란은 흥행 보증수표이자 청춘영화의 대표적인 심벌이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신성일-엄앵란이 만들어낸 스타 콤비를 이용한 흥행 시스템은 엄청난 것이었다. 젊은 시절의 신성일과 엄앵란 모습은 물론 신성일이 소장했던 결혼 앨범도 직접 볼 수 있다.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
당시 서울 관객 25만 명을 동원한 당대 최고의 흥행작으로, 청바지와 가죽점퍼, 반항적인 눈빛의 신성일은 이 영화를 통해 기성세대에 저항하는 반항적인 캐릭터의 상징이 되었다. 영화 속 독창적인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는 두수(신성일)의 방을 공간 그대로 재현해 관람의 재미를 더한다.
 

청춘영화
1963년에서 1968년까지 흥행한 장르로, 주로 도시 공간을 배경으로 하면서, 서구 문화에 대한 동경과 욕망이 드러나고, 전통적인 가부장제 사회에 반항하는 젊은이들의 좌절과 분노를 새로운 영상 감각으로 표현한 영화들을 말한다. 신성일은 청춘영화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신성일이 출연한 주요 청춘영화의 포스터 35점을 전시한다.

신성일과 트로이카
김지미의 스타덤도 건재했지만, 문희?윤정희?남정임 등 신인 여배우들의 급속한 성장은 청춘영화와 1960년대 한국영화의 붐을 이끌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수많은 여배우의 청춘영화 파트너는 오직 신성일 한 명뿐이었다. 신성일과 여배우들이 동반 출연한 작품을 사진과 하이라이트 영상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휏션스타
1960년대 청춘영화에 등장한 패션은 ‘스타’를 탄생시키고, 청춘영화의 붐을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60년대 남성들의 패션 아이콘은 자타 공인 신성일이었다. <맨발의 청춘>에서 두수(신성일)가 입은 흰 가죽 재킷과 요안나(엄앵란)가 입은 더블 단추 원피스를 복원 제작해, 전시 관람의 재미를 더한다.

렛츠 트위스트 어게인
청춘영화 속 댄스홀은 배우 신성일의 욕망과 좌절, 번뇌와 고민을 드러내는 공간으로 자주 활용됐다. 재현된 댄스홀에서 신성일과 트위스트 김의 다양한 모습을 영상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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