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디어 마이 지니어스 구윤주, 2020

by.김소희(영화평론가) 2020-12-29조회 5,469
디어 마이 지니어스 스틸
현재의 거울 

대학교 졸업을 앞둔, 통상적인 교육의 끝자락에서 돌이켜 본다. 다시 초등학생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과연 다르게 살 수 있을까. <디어 마이 지니어스>(구윤주, 2020)는 진로 선택의 기로에 놓인 감독이 교육의 시간을 돌아보는 이야기다. 돌이켜 보았을 때 가장 후회되는 부분은 정작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곰곰이 들여다보지 못한 채 그 시간을 통과해버렸다는 것이다. 감독에게는 시간을 되돌릴 능력이 없지만,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어린 동생 윤영이 있다. 감독은 어머니의 관리하에 촘촘하게 짜인 윤영의 일상에 개입하면서 새로운 교육을 위한 답을 찾고자 한다.
 
영재 교육에 관한 이야기라고 홍보되었지만, 정작 영재 교육이라고 할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어머니의 교육열은 남다르다. 어머니는 한 달에 두 번 도서관에 출근해 딸이 읽을 만한 책을 선별하고 한 번에 대출할 수 있는 최대 권수인 26권을 꽉꽉 채워 대출한다. 책을 운반하기 위해 장 볼 때 쓰는 카트는 필수다. 미리 비워둔 책장 속에 26권의 책을 꽂아두고 딸이 하나씩 빼 읽을 것을 상상하는 기쁨은 욱신거리는 팔목 통증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꼼꼼하고 성실한 매니저인 어머니는 매번 딸이 돌파한 책의 권수와 제목을 노트에 기록해왔고 지금 막 기록된 숫자가 7,000을 넘었다. 영어 학원에서 주최하는 1만 원의 상금이 걸린 100단어 영어 콘테스트를 위해 우는 딸을 달래가며 늦은 시간까지 공부시키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 유난스럽기는 해도 어딘가 소박하게 느껴져 정감이 갈 정도다. 
 

영재가 되고 싶다는 윤영의 소망도 대책 없이 솔직하다. 과거 영재 시험을 통과한 감독은 동생에게 ‘영재란 사람들이 붙인 이름일 뿐’이라는 진실을 누설한다. 그렇다고 해도 영재 시험에 통과하고 싶은 윤영의 소망은 꺾이지 않는다. 윤영이 영재가 되고 싶은 이유는 ‘무언가 높아진 기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영재는 허상이지만, 그 허상이 주는 열매는 실재한다. 높은 교육열을 비판하기 이전에 성적이 곧 정체성이 되는 학생의 시간에서 학업 성취의 기쁨은 쉬이 포기할 수 없는 부분임을 인정해야 한다.

<디어 마이 지니어스>는 교육의 당사자로서 가족을 비판적으로 보진 않는다. 교육 현실은 오직 가족을 통해서만 드러나기에 결과적으로 교육을 비판한다고도 보기 힘들다. 남은 건 어머니의 교육 방식을 비판하고 어린 동생을 구하고 싶은 감독의 욕망 그 자체다. 이 프로젝트가 가능했던 것은 어머니와 어린 동생 사이에 놓인 감독의 위치 때문이고, 실패한 원인 역시 그 때문이다. 감독은 종종 어머니에 대한 냉정을 잃는다. 특히 어머니가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깔끔하게 청소된 집을 보는 것과 윤영의 하루가 계획대로 실행되는 것이라고 말하며 요즘 둘 다 제대로 되지 않아 속상함을 토로할 때 감독은 어머니보다 먼저 눈물을 보인다. 카메라에 포착되지 않은 감독의 눈물은 그런 딸을 보는 어머니의 표정 변화를 통해 드러난다. 카메라 앞에 투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교육의 당사자로서의 어머니와 윤영이 아닌, 이들의 눈에 비친 감독의 모습이다. 감독은 질문으로 무장한 채 호기롭게 동생을 대하지만, ‘도대체 이걸 왜 찍고 있냐’와 같은 동생의 뼈 때리는 역질문에 종종 맞닥뜨린다. 애초에 윤영은 감독에게 ‘아주아주 재미있게 찍어 달라’고 주문하며 아무렇지 않게 상황의 주도권을 잡은 바 있다. 감독은 윤영의 일기장 속에 어느 날 ‘굶주린 독수리’였다가 다른 날 ‘월트 디즈니’도 된 자신을 발견하며 감정의 널을 뛴다. 이쯤 되면 조련당하는 쪽은 윤영이 아닌 감독이다. 어머니와 동생은 카메라의 대상이 됨과 동시에 자신을 찍는 딸과 언니의 모습을 비춰낸다.
 

인생의 세 시기를 상징하는 모녀는 서로 과거를 투사하는 선형적인 관계에 놓인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그런 면도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영화가 향해가는 곳은 각자의 현재를 찾는 것이다. 카메라 앞에 두고 마주 앉거나 나란히 앉은 이들은 서로의 현재를 비추며 각자 저마다의 출발선에 선 사람으로 존재한다. 감독은 마치 하나의 쌍처럼 종종 자신을 어린 동생의 옆에 나란히 세운다. 함께 거울을 보며 양치질을 하거나 카메라 앞에서 양팔을 물결치는 장난스러운 춤도 추며 둘의 관계를 수평적인 것으로 그리고자 한다. 꿈이 뭐냐는 질문에 동생은 ‘나는 구윤영이 될 거야’라고 답했고, 그 의미는 ‘더 나은 내가 되는 것’이라 똑 부러지게 정의한다. 그 대답은 영화가 다다른 장소가 어디인가를 보여준다. 그곳은 내가 나를 비추며, 내가 다시 내가 되는 자기 증식의 세계다. 가족을 통해 교육 현실을 찍고자 했으나 돌고 돌아 나를 성찰하게 되는 무한의 미로. 영화는 무언가를 비판하거나 답을 내리는 영화가 아니다. 다만 그 안에서 누구라도 자신의 단면을 마주할 넉넉한 표면을 제시한다. 마침내 우리는 교육을 통해 추구해야 할 하나의 원점과 같은 질문에 도달한다. 그리하여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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