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다 조일형, 2020

by.박수민(영화감독) 2020-12-08조회 1,547
살아있다 스틸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증의 확산으로 인한 거리두기는 영화 산업의 존립을 위협했다.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이 매체의 가장 본질적인 체험 행위를 덜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극장의 위기에 부쳐 내 경우만 고백하자면, 강도 높은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 동안 나는 극장에 채 열 번도 가지 않았다. 2020년은 열두 살 이후의 내 인생에서 가장 극장에 안 간 해가 되었다. 

교회에 절대 안 가는 기독교인은 자랑스러운 일면조차 있지만, 극장에 통 안 가는 시네필이 그렇지는 못할 것이다. 위기가 왔을 때 말이 아니라 육체로 증명할 수 없다면 진실한 사랑이 아니다. 나의 뜨뜻미지근한 사랑은 그 사실을 절대로 들켜선 안 되는 바로 나 자신에게 뽀록났다(‘뽀록나다’는 속된 표현이나, 엄연한 표준어다). 나는 시네필로 자각할 자격을 상실했다.

지난 봄, 방역 상황을 주시하며 시네마테크와 멀티플렉스의 예매와 취소를 반복하던 중, 설마 확진자와 접촉해 감염되는 한이 있더라도 봐야만 하는 영화가 나타났다. 마침내 나를 극장으로 다시 불러들인 영화는 조지 A. 로메로의 <시체들의 새벽>(1978)이었다. 40여 년간 국내 개봉한 적이 없었던, 모든 현대 좀비 장르물의 원본이 하필이면 “이 시국에” 극장에 걸렸다. 

이 영화에 대한 내 오랜 사랑과 강박(커버에 “안녕하시었어요?”가 적힌, 출시 제목 <이블 헌터>의 비디오로 접한 이후, 인생이 어떻게 망했는지 글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7855 (오독의 라이브러리, 2017-08-03, cine21)을 쓴 적 있다) 때문에, 이런 상황일수록 더욱 극장에서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상한 조바심에 사로잡혔다. 같은 작품의 DVD가 판본별로 있고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뇌내(腦內) 재생할 수도 있지만 꼭 극장이어야 했다.
 

4월 15일, 나는 전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창궐한 상황에 거의 텅 비다시피 한 쇼핑몰의 극장에서 <시체들의 새벽>을 보았다. 극장엔 개봉 취소나 연기된 영화들의 선전물만 덩그러니 놓인 채 관객은 커녕 표를 확인하는 직원조차 보이질 않았다. <오메가 맨>(1971)의 찰턴 헤스턴처럼 객석에 홀로 앉아 “이제 이런 영화는 안 만드는 모양이군!” 읊조릴까 했는데, 나를 포함해 총 네 명의 관객이 들어왔다. 좀비 떼를 피해 아무도 없는 쇼핑몰 안에 숨어드는 영화 속 주인공도 딱 네 명이다. 극장이 선전한 리클라이너가 편안했고, 방역이 아니라 방해받지 말라고 만들어놨던 칸막이가 있는 관람은 쾌적했다. 영화가 끝나고, 똥땅거리는 쇼핑몰 음악과 함께 좀비들이 지상에서 뒤뚱거리며 엔드 크레딧이 오르자 깨달았다. 나는 영화를 보러 왔다기보다 영화를 현실에 재현하러 온 관객이었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는 말은 옳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 기침 소리가 들리자 나의 나들이는 심리적 자해처럼 느껴졌고, 픽션은 현실의 고민이 되었다. <우주전쟁>(2005)의 말미에 허망하게 고꾸라지던 외계인들처럼 인간이라는 종도 겨우 바이러스에 함락되는가. 세상이 망하기 전에 영화부터 사라질까. 그럼 다 같이 종말을 맞이할 때까지 나는 뭘 먹고 사나? 또 언제 극장에 올 수 있을까? 극장이 이렇게 망할 줄이야. 친구의 영화가 결국 극장 개봉 대신 OTT를 택했을 때, 강제 넷플릭스 진출을 축하한다며 주고받은 메시지는 그나마 다행이란 위로에서 어떤 우려로 남았다. 극장이 아니라면 내가 만들고 싶어 하는 영화는 영화일까? 극장 밖에서 영화는 진정으로 존재할까?

혹시나 만약에 정말로 극장이 사라지더라도, 물론 영화까지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이미 영화는 어디에든 넘칠 정도로 있다. 손아귀의 디바이스, 책상 위 모니터, ‘언택트’ 시대를 맞아 거실에 “거거익선”으로 장만한 4K 디스플레이 속에 극장만큼 충분히 친숙하고 또렷하고 거대하게 존재한다. 거의 극장에 있는 것 같은 환경을 구현해주는 VR 어플까지 있다. 영화는 아날로그(필름)가 아니라 생성될 때부터 디지털(파일)이고, 네트는 광대하며 스트리밍은 빠르다. 

그러니 둘 중에 하나만 영영 잃어야 한다면,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은 극장의 죽음이다. 만국의 시네필들이여 선택하라. 그러나 이렇게 외치고픈 충동이 울컥할 것이다. 아뇨, 극장에서가 아니면 그건 결코 영화가 아니에요. 영화는 오로지 극장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 커다란 스크린으로 내 망막에 눈부시게 빛으로 쏟아질 때만 영화예요. 이 빛과 어둠의 예술은 극장에서만 기적을 일으킨단 말입니다. 객석에서 모두와 함께 울고 웃으며 다 같이 탄식할 때만! 시네마테크를 향한 내 예전 간증을 지금 다시 적노라니 가슴이 뜨끔하다. 그 믿음은 유효합니까?
 

6월, 여름 시즌에 내야 할 영화들이 줄줄이 훗날을 기약하고 뒤로 밀리며 눈치만 볼 때 한 영화가 매를 맞아보겠다는 듯 용감히 개봉했다. 극장에 같이 가려 동행을 구했지만 누구도 나서질 않고, 코로나 때문이 아니어도 내가 고립된 인간임을 직시하며 혼자 <#살아있다>(조일형, 2020)를 보러 갔다. 체온을 재고 연락처를 남긴 다음 극장 안으로 들어와, 테이핑으로 간격을 띄워놓은 좌석에 앉으니 이 정도면 극장은 오히려 전에 없이 쾌적한 상태로 지속할 수 있을 걸로 보였다.

처음 이 영화의 정보를 접하고, 미국 작가가 쓴 시나리오지만 한국판 리메이크가 아니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같은 시나리오로 두 편의 영화가 동시에 제작되며, 감독의 연고지도 미국 기반이라고 했다. 나는 괜히 영화사들이 이제부터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외국에서 사오고 모국어만으로는 업계에서 버틸 수 없게 되는 상상을 했다. 캐릭터와 플롯만 정확하게 보고, 모호하게 문장력으로 눙치는 시나리오는 솎아지는 날이 오는 거다. 퇴출 확정이군. 아무튼 티저를 보고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틱톡 시대에 도래한 SNS 맞춤 좀비 스릴러일까 싶었는데, 시의적절한 아이템이 시국에 맞춤인 결과로 나왔다. 심지어 감독 역시 코로나 때문에 입국을 못하고 미국에서 화상을 통해 원격 편집과 마스터링을 했다니 거의 언택트 시대의 산물 같은 영화다. 

좋든 나쁘든 원하건 말건 간에 세상에 의해 현실이 되는 픽션이 있고, 이 영화도 그렇다. 하루아침에 바깥세상이 망해 집 안에 꼼짝없이 갇힌 남자(유아인)가 고립 끝에 별 수 없이 나도 망할까, 하다가 맞은편에 사는 여자(박신혜)와 소통하고 함께 살아남고자 서로 돕는다. 좀비 떼를 피해 둘이 도망갈 수 있는 세상의 가장 멀고 높은 곳이란 겨우, 아파트 옥상이다. 이 세팅은 지금 현실과 닮았다. 팬데믹으로 집에 갇힌 우리는 마스크를 끼고 밖으로 나서는 일에 종말이 온 듯 호들갑을 떤다. 이 영화 속 캐릭터의 생존 투쟁도 절박하기보다 호들갑 같다.

영화를 보면서 걸리는 개연성은 이제 나 같은 직업병자 아니면 위키에 비판 항목을 적는 사람에게만 문제일 것이다. 관객 눈에 즉각 보이지 않는 맥락과 읽히지 않는 의미부여 대신, 상황에만 집중해서 단순명쾌하게 콘셉트만 끝까지 밀고 가는데 의외로 산뜻하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나는 이렇게 공권력을 긍정하는 좀비 아포칼립스 영화를 본 적이 없다. 국가가 해시태그(#)를 검색해 당신이 SNS에 남긴 생존 증명만으로 헬기에 특수부대원을 태워 구하러 온다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나타났는데 어째 그다지 촌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이걸 문제 삼고 싶은 내가 촌스러운 것 같았다. 영화는 무리 없이, 딱 아파트 옥상까지만 도달했고, 살아남았다.

나는 무리를 보길 기대했었다. 영화란 만드는 과정도 그 결과물의 내용도 온통 무리하는 것이라 믿어 왔는데, 그 무리한 욕망을 관객에게 납득시키는 게 영화 아닌가? 이제 다들 그런 영화는 안 만드나? 개인적인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를 긍정하기로 했다. 극장을 나서는 순간 깨끗이 잊히게끔 만든, 딱 그 정도의 적당한 야심을 품은 영화가 주는 미덕을 생각했다. 이런 하이 콘셉트 영화를 더 많이 더 잘 만들 수 있게 된다면, 언젠가는 뒤통수를 후려치는 기분을 선사하는 현실의 우화 같은 작품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인 나로선, 다만 그 수준에 도달한 시나리오가 또 어느 미국인이 영어로 쓴 책이 아니도록 애쓰면 될 일이다.

<#살아있다>는 코로나 상황의 박스오피스에서 선전하여 초여름의 극장가가 잠시나마 지탱할 수 있도록 견인한 공이 있다. 극장이 살아있고 다녀간 관객이 무탈함을 세상에 알려줬던 것이다. 8월 중순 2차 대 확산이 발생하여 다시 극장이 셧다운을 거듭하는 동안에는 넷플릭스에서 월드와이드 영화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한국산 콘텐츠 중 최초 기록이라니, 팬데믹 상황의 전 세계 구독자들이 꽤 공명한 것 같고, ‘K-좀비’라는 모호한 장르도 존재감을 확인했다.
 

K-좀비라니, <괴시>(강범구, 1981) 이후 이런 날이 다 왔다. 그러나 나는 한국산 좀비 영화의 경향에 신체를 물어뜯고 내장을 쏟아내고 그것들을 먹는 직접적인 묘사를 여간해선 하지 않는 것에 의구심을 갖는다. 내가 고어(gore)를 요구하는 건 좀비 영화의 윤리 때문이다. 굳이 보여주지 않을 윤리가 있다면, 마땅히 보여야 할 윤리도 있다고 생각한다. 옛날 좀비 영화에 대한 근본주의를 품은 사람의 무리한 요구일 뿐이려나? 뭐 이제 그런 영화는 안 만드는 모양이니까.  

암담한 거리두기의 시간을 지나 1단계로 돌아왔지만, 극장의 위기는 여전히 녹록하지 않다. 기대했던 많은 영화들이 끝내 극장을 포기하고 OTT로 돌아서고 있다. 왜 영화를 마땅히 극장에 걸지 않느냐며, 손해를 감수하라고 강요할 순 없다. 영화는 결국 돈을 벌어야 지속할 수 있고, 극장은 믿음이 굳건한 몇몇 시네필에게만 의존하기엔 지나치게 크고 구태의연한 산업이다. 이 구태의연한 행위가 영화를 경험하기에 가장 옳은 양식(樣式)이기에 나는 OTT의 영화 독식도 극장의 명예로운 죽음도 언택트와 뉴 노멀 어쩌고 하는 대단한 변화도 원하지 않는다. 

<시체들의 새벽>을 극장에서 보며, 앞으로 인류가 지독히도 재수가 없다면 이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보는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괜찮네? 나다운데,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이런 감상적인 호들갑보다 <#살아있다>를 보고 극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며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기분으로 극장은 안전해, 다음에 무슨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을까? 생각하는 쪽이 훨씬 나았다. 영화의 구원과 극장의 부활에 대한 소박한 믿음을 요상한 맹신의 종교적 호들갑이 하루아침에 막막하게 만들 줄 그땐 몰랐다. 다시 그런 상황이 오는 건 사양한다.

종말, 멸망, 아포칼립스란 그렇게 떠들썩하지 않고 오히려 조용하고 쓸쓸할 거라 생각한다. 집에 갇힌 채 홀로 훌쩍이는 일이 진짜 종말에 가깝다. 이 상황을 탈출해도 별로 대단한 미래는 없겠지만, 그래도 예전의 평화로운 일상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의 행운을 빈다. 그 행운이 너무 힘들게 멀리 있지 않고, 우리가 갇힌 집에서 아파트 옥상 정도의 거리에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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