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의 바람 김유리, 2018

by.장병원(영화평론가) 2020-10-30조회 4,733
영하의 바람 스틸
중반부에 영화의 스타일을 요약하는 한 장면이 있다. 늦은 밤, 열아홉의 영하(권한솔)는 거실 소파에 잠들어 있다. 그가 잠든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영하를 안아 들고 침대에 누인 계부 영진(박종환)이 훤히 드러난 영하의 쇄골 부근에 찍힌 점을 손가락으로 문지른다. 성장기 아버지와의 관계를 추억하는 듯한 이 삽화는 자식을 향한 애틋한 부정(父情)과 자신의 충동에 굴복한 남자가 느끼는 자괴 사이를 진동한다. 연출자 김유리의 개성은 이처럼 스토리의 흐름을 함축하는 중요한 정보, 인물의 감정을 다루는 복합적인 방식에서 나온다. 부분적으로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플롯은 관객들이 영하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을 무심한 말과 행위로만 전달한다. 생면부지의 영진이 이삿짐 트럭 앞에서 서성대는 열두 살 영하(문성안)를 안아 올릴 때, 등교를 준비해야 하는 부산스러운 아침, 머리를 감는 열다섯 살 영하(안진현)의 목덜미 위에 그가 물을 부어줄 때, 바람이나 쏘이자며 차를 몰아갔던 비 오는 날 영진의 초점 없는 눈동자에서 우리는 말해지지 않은 진실을 감지한다. 

김유리 감독은 단편영화 <저 문은 언제부터 열려있었던 거지?>(2013)에서부터 눈여겨보았다. 그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처리된 장면들을 모아 진실을 이야기할 줄 아는 연출자이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주인공의 초점을 상실한 내면 상(像)을 묘사하는 이 단편에서 김유리는 스토리와 감정을 과장 없이 묘사하면서 팽팽하게 제어하는 연출의 힘을 보여주었다. 김유리의 장편데뷔작 <영하의 바람>(2018)은 주인공 영하의 성장기를 그의 삶에 중대한 전기(轉機)가 된 세 개의 시기를 이어 붙여 구성한다. 열두 살, 열다섯 살, 열아홉 살로 도약하는 세 개의 시간 프레임에 걸쳐서 세 명의 다른 배우들이 영하를 연기한다. 이 조각난 7년의 시간 안에서 영하의 세계는 격동한다. 친부가 떠난 뒤 그는 억척스러운 어머니(신동미) 슬하에서 계부와 새 가족을 이룬다. ‘박영하’에서 ‘김영하’로 전환된 이 시기 영하는 믿을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를 목격하면서 또래 사촌이자 친구인 미진(옥수분)과 유대감을 형성한다.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소녀는 병적으로 안수에 집착하는 어머니, 종종 다정하기도 한 계부로부터 방치된다. 
 

가족의 붕괴와 타락한 종교, 아동 학대, 여성의 독립, 불안정한 주거 등 많은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 안에서 영하는 이 무수한 문제들과 싸우고 있다. 세 개의 챕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상술하지 않는 플롯에도 불구하고, 김유리는 영하를 덮친 외풍과 세계로부터 밀려나는 존재의 비의를 침착하게 쌓는다. 보호받지 못한 성장기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그린 이 영화의 핵심 의제는 좌초된 가족이다. 집과 연결된 문제는 10대 소녀가 직면한 고독과 소외의 교차점에 있다. 이야기의 도입부에서 영하는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이삿짐과 함께 버려진 채 서럽게 울고, 스스로 집을 떠나 골방에 들었다가, 마지막에는 집 없이 떠돈다. 거처를 상실한 유랑의 상태로 영하를 몰아가기까지 대다수의 사건은 극적으로 제시되지 않고 생략과 뉘앙스로 전달된다. 이를테면 신앙의 외피를 두른 어머니의 욕망과 의뭉스러운 계부와의 관계는 은근하게 암시된다. 점진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진실의 탐사 과정은 영하의 의식이 성장하는 속도와 흐름에 맞춰져 있다. 
 

바람은 중요한 순간마다 불어온다. 낯선 운전기사가 모는 이삿짐 트럭을 타고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열두 살 영하에게, 완전히 혼자가 되어 폐허의 골목길을 걷는 열아홉의 영하에게도 바람이 분다. ‘영하’는 극중 인물의 이름이자 기온을 표시하는 단위이고, ‘바람’은 자연현상인 동시에 기분전환이라는 의미를 품은 메타포이고, 이루고자 하는 소망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영화는 교회 예배에서 신에게 무언가를 기원하는 어머니와 영하의 모습으로 열리고, 휑한 거리에서 바람을 맞으며 비틀거리는 영하를 끝으로 닫힌다. 의미의 다원성을 가지고 유희하는 제목처럼 인간의 말과 행위는 하나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고, <영하의 바람>은 단일하게 고정되지 않는 스토리의 경계를 진동한다. 존재의 기반을 매섭게 휩쓸고 가버리는 바람, 상실감에 대한 이 이야기 안에는 애조 띈 이미지들이 많다. 특별히 신성함이 느껴질 만큼 초연해 보이는 영하의 얼굴은 인상적이다. 과묵한 영하가 의미심장한 사건을 겪는 동안 관객들은 캐릭터의 내면에 흐르는 감정을 그의 얼굴을 통해 짐작한다. 대사가 전달하는 감정을 모두 합친다 해도 무감하고 스스럼없는 영하의 얼굴을 이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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