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연, 조민재, 2020

by.홍은미(영화평론가) 2020-10-06조회 853
실 스틸
좋은 사람 곁에 많은 이들이 모이듯, 좋은 영화는 고요히 있어도 눈길을 끈다. 어느 장소에 카메라가 들어서 있는지 잊지 않으며 마주한 대상과 거칠 것 없이 한 호흡으로 숨을 쉰다. 아무렇지 않게 무언가를 하는 영화처럼 보기 드문 영화는 없다. 오래도록 창신동에서 옷을 만들어온 이들의 몸에 밴 시간을 응시하는 이나연, 조민재의 단편영화 <>(2020)은, 보는 이의 감각을 깨워 그들의 시간과 접촉할 수 있도록 만드는 영화다. 두 감독은 영화에 극적인 장치 하나, 격렬한 대목 하나 심어두지 않고도, 창신동 골목 한 편에서 노동하며 살아온 이들의 역사를 슬며시 깨워낸다. 

옷을 만드는 명선(김명선)의 작업실에는 많은 이들이 방문한다. 옷 제작을 의뢰하러 온 디자이너며, 함께 봉제공장에서 일했던 지기, 손수 만든 빵을 들고 찾아온 막내딸과 오래된 동료들이, 품이 넓은 그녀 곁에 머물다 간다. 명선는 꾸밈이 없고 동그란 몸처럼 부드러운 성정을 지닌 듯하다. 그녀는 맛깔나는 농담도 곧잘 던지는데, 일감이 줄자 제봉 일을 접고 대구로 가 새로운 일을 하려는 현(김현)에게는 재치를 뽐내는 말들을 한껏 쏟아낸다. 흥이 많은 현도 명선의 말을 잘 받아친다. 오고 가는 농담 안에서 그들은 헛헛한 마음을 나눈다. 옷을 만드는 일만으로는 생계를 꾸리기 어려워 이런저런 소일거리를 병행하는 명선도 언젠가는 이 골목을 떠날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들의 상실감에 젖어드는 게 아니라 삶의 일부로 여기며 마지막까지 그들의 지속되는 시간을 비춘다. 
 

명선의 작업실에 방문하는 마지막 손님은 명선만큼이나 나이 지긋해 보이는 중희(변중희)다.  콧노래를 부르며 길을 가던 중희는 명선의 작업실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고서는 자연스레 문을 열고 들어간다. 명선은 중희에게 자신이 만든 블라우스를 보여주고 그 옷을 보며 중희는 “옷이 너 닮았다”라고 나긋이 말한다. 이 말은 이상하리만치 감동적이다. 오래도록 이 골목에서 시간을 함께 보낸 동료의 통찰력일까. 예쁘고도 품이 넓어 편안해 보이는 새하얀 블라우스는 정말 명선과 닮았다. 그리고 <실>은 명선이 만든 옷과 명선과도 닮은 것 같아, 이 영화를 특별하게 느끼도록 만든다. 영화는 처음부터 창신동 골목에서 오랜 노동을 해온 이들의 몸과 공간에 새겨진 역사를, 그들이 시간을 지낸 방식으로 담아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우리는 영화의 시작부에서부터, 날렵한 손길로 옷감을 착착 재단해 내고, 매끈하게 재봉해내는 명선의 손을 본다. 그 손에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세월이 스쳐가는 듯하다. 그녀의 숙련된 기술은 젊은 적부터 재봉공장에서 무수한 밤을 지새우며 셀 수 없이 많은 옷들을 만들었기에 습득된 것일 테다. 조민재 감독은 “몸에 담긴 역사는 결코 따라 할 수가 없”어 실제 오랫동안 옷을 만들어 온 자신의 어머니를 출연시켰다고 얘기했는데, 어느 누구라도 그 말을 절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의 손길 하나가 지난한 시간을 말해준다. 또한 명선과 어울리는 그녀와 닮고도 다른 개별 인물들의 얼굴들과, 그들이 서로 어울리는 품새에 이 골목의 오랜 역사가 깃들어 있는 것도 같다. 거기에 골목 여기저기 엉켜 있는 전깃줄과 명선이 낮잠을 잘 동안에 더 크게 들려오는 다른 작업실의 재봉틀 소리가 어우러지면, 이나연, 조민재가 절실히 이해하고 어루만지려 한 이 공간의 시간과 리듬이 이 영화에 살며시 내려앉는다. 

두 감독은, 그리고 <실>은 창신동의 골목을 이루는 많은 존재들에게 무척 깊은 마음을 둔 것 같다. 그대로 보고 존중하고 닮아가고 싶어 하는 건 사랑의 다른 표현이다. 그런 사랑은 아주 어렵다. 세세한 제스처와 표정을 기민하게 읽기도 하고, 다 알지 못해도 온 힘을 다해 상대의 살아온 세월을 가늠해 보려 애쓰게 된다. 이 영화의 골목길 장면들에 마음이 흔들리는 건 구도가 아름다워서나, 그 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몸짓이 생생해 보여서만이 아니다. 그 구도에서만이 공간을 이루는 사람과 사물들과 그곳에 흐르는 공기와 그들이 어울려 만드는 리듬을 조금 더 느껴 볼 수 있으리라고 이 영화가 믿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존재들의 몸짓과 표정들을 통과해 비로소 이곳의 역사와 소박하게 만난다. 명선이 블라우스 옷감을 재단할 때, 새하얀 천위로 비치는 옛 재봉공장 여성노동자들의 해사한 모습과 그들의 투쟁 현장에서, 그리고 명선이 현재 동료들과 함께 보내는 골목의 한 편에서 그들의 시간이 이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본다. 명선이 이 골목을 떠난 후에도, 이곳의 한 편에는 명선과 흐엉(당티 흐엉)처럼 어두운 밤에 작업실을 떠나고 이른 새벽에 작업실 불을 밝히는 노동자들이 있을 것이다.
 

영화 초반부에 세 대의 카메라가 마주하는 장면이 있다. 하나는, 골목 한쪽 벽에 자신이 만든 옷을 걸어놓고 사진을 찍는 명선의 핸드폰 카메라이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인 관광객의 손에 들려 있는 카메라며, 마지막은 <실>의 카메라다. 세 대의 카메라는 언뜻 닮은 듯하지만  대상을 대하는 태도도, 카메라 앞에 놓인 존재와 함께 한 시간도 다르다. 노동운동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나라에서 온 이방인은 창신동의 역사를 거시적으로 읽으며 개별 존재들을 세부 요소들로 묶어낸다. 그는 명선의 손과 그 육체에 배인 시간과 유머감각을 느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실>의 카메라는 명선과 그녀가 살아온 장소를 느껴보러 온 힘을 다하지만 명선이 자신이 만든 옷을 찍을 때의 마음을 다는 모를 것이다. 다만 느껴보려 한다. 그 하나하나의 마음이 영화의 숏 하나하나에 담겨 있다. 그 마음들이 현현하는 <실>은 놀랍고 아름다운 영화며, 무엇보다 ‘영화’인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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