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 정승오, 2019

by.이화정(영화 저널리스트) 2020-08-19조회 861
이장 스틸
이 사회의 불균형을 이장하다 

“장남도 없이 (어떻게) 무덤을 파냐!” 큰아버지(유순웅)의 불호령에 아버지 묘 이장을 하러 고향 마을에 막 도착한 네 자매들은 연락이 되지 않은 남동생을 찾아 다시 발길을 돌린다. 그들이 찾아야 하는 장남, 그 이름이 하필 ‘승락’이다. 혜영(장리우), 금옥(이선희), 금희(공민정), 혜연(윤금선아). 승락의 위로 줄줄이 누나들이 모두 왔는데도, 승락의 승낙 없이는 이장이 불가능한 사회. 승락이 아니라 혜연이 사정상 못 왔다면 이장은 진행되었을, 이곳은 뿌리 깊은 가부장제로 여전히 갈등을 겪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딸 넷에 막내아들. 이 집은 말 그대로 아들 낳으려 계속 출산을 했을, 오남매는 구성 자체가 딱 가부장제 가족이다. 이쯤 되면 막내딸 이름이 ‘다음 아이는 아들을 얻겠다’는 염원을 담아 딸 이름은 희생되는 ‘후남’ ‘차남’ ‘필남’이 아닌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걸까. 어쨌든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등 온갖 방법을 다해 찾아낸 승락이 화면에 등장하는 건 영화가 시작된 지 44분 36초 만의 일이다. 전체 러닝타임 94분 중 거의 절반이 지나서야, 카메라는 노트북 앞에 앉은 승락의 뒤통수를 필두로 그의 손가락을 훑어 간신히 그 얼굴을 드러낸다. 그것도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이 모든 상황에 잔뜩 열 받은 첫째 혜영이 승락이 있는 반지하 창문에 돌을 던지면서다. 여자친구 윤화(송희준)의 임신에 책임회피 중인 승락은 여러모로 비난받을 여지가 충분하지만, 그럼에도 가부장제 사회 안에서는 발언권을 가진 중요 인물로 치부된다. 그러니까 그게 남성이 집안의 통솔권을 가지는 이 사회의 가부장제!
 

사실 큰아버지가 승낙을 데려올 것을 ‘명령’한 건 재개발로 이장을 하게 된 지금, 자신 동생의 묘를 매장 대신 화장하려 하는 조카 딸들의 결정을 번복하기 위해서다. 그는 같은 남자인 장남 만은 자신의 편을 들어줄 거라 믿으며, 또 그런 이유로 장남인 승락에게 더 큰 권위를 부여해 주려 한다. 가령 이미 죽은 오남매의 아버지는 혜영의 말대로 ‘그 인간 죽어서까지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존재감을 드러내며, 문제를 회피하기 급급한 승락은 ‘우리가 (언제까지) 걔 엄마야?’라는 누나 금희의 독설을 받는 대상이다. 영화는 가부장제 아래 집안의 권위를 부여받은 남자들의 치부를 거침없이 드러내는데, 그래서 이 영화의 남자들은 한편으로는 귀엽거나 사랑스럽게 그려지기도 하지만, 겉으로 볼 때 무섭거나(큰아버지), 비겁하거나(승락), 말 안 듣거나(혜영의 아들 동민) 지질(금희의 남친) 해서 여자들을 자주 괴롭힌다.

물론 아버지 묘의 이장 문제는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기존 사회 질서에 부합해 흘러가지 않는다. 전형적인 가부장제의 틀 안에서 태어나고 성장했지만, 남매는 변화하는 현재의 사회를 살아가는 인물들이며, 그래서 지금 심하게 이 사회와 부대끼는 중이다. <이장>의 여성인 네 자매는 그래서 마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균형을 찾아가려는 이 사회 여성들의 표본을 보는 것 같다. 첫째 혜영은 싱글맘이라는 상황으로 인사 가산점이 깎여 육아휴직 이후 퇴사를 권고받았으며, 둘째 금옥은 남편의 외도를 알고도 떳떳하게 판을 뒤집지 못하는 평범한 주부다. 두 언니의 ‘실패한’ 결혼 생활에도 셋째 금희는 결혼을 앞두고 있지만, 철없는 남친에 갑갑한 채로 N포 세대의 곤궁은 고스란히 떠안고 있는 청춘이다. 여성 인권을 외치는 막내 혜연은 학내에 자신이 애써 붙여놓은 대자보 위에 ‘너도 결국 한남의 씨에 불과한 종족이다’라는 테러성 반응에 맞서야 한다. 결혼과 출산으로 경력 단절되어 우울증을 겪는 <82년생 김지영>(2019)의 ‘김지영’이 이들의 사촌자매 쯤이라고 해도 어울릴 것 같다. 결국 육아휴직, 남편의 외도, 결혼 문제, 페미니즘 등 대한민국 여성이 겪는 고충의 총합이 이 자매 안에 다 보인다.  
 

정승오 감독은 이장을 하러 오랜만에 모인 남매를 혜영의 미니밴에 탑승시킨다. ‘이장 후 받게 될 500만 원을 누가 갖게 될 것인가’의 문제가 시종 묘한 긴장감을 형성하며 남매간에 그동안 쌓여 있던 갈등을 점화시킨다. 티격태격 가족 로드무비의 원조 격인 <미스 리틀 선샤인>(2006)의 ‘미니밴 버전’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네 자매와 혜영의 아들인 초등학생 동민(강민준), 승낙의 전 여자친구 희준도 한 차에 타고 내리고 해서, 차 안은 시종 구성원이 바뀌고 복닥복닥 거린다. 시동이 걸리고 출발을 한 이상 도로 안에서 쉬이 내리는 건 불가능하고, 앉아있는 자리에 따라 맞붙는 ‘말싸움’ ‘몸싸움’의 조합도 새롭게 재편된다. ‘제한된 상황’ ‘다양한 인물’들이 이렇게 새로운 조합으로 영화의 액션과 리듬, 코믹과 드라마를 만드는 재미들이 모여 <이장>의 미니밴을 굴러가게 만든다. 

<이장>의 이 오밀조밀 갈등이 폭발하는 공간 구성은 사실 정승오 감독의 주특기다. 전작인 단편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2016)은 <이장>의 프리퀄 격인데, 입원한 엄마의 병문안을 간 딸들이 모두 엄마의 침대 위에 올라가 옹기종기 모여 앉은 씬은 가족의 갈등과 화해를 그리는 탁월한 장면 연출이다. 이같은 구성이 독립영화계의 ‘어벤저스급’ 배우들의 앙상블 연기가 제대로 빛을 발하는 터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 자신 역시 가부장제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라 청년 세대를 거친 남성으로서 정승오는 <이장>의 가족들이, 더 나아가 이 사회가 기울어진 관습과 제도에서 벗어나 모두가 동등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이 역시 새벽녘 오남매가 함께 걸터앉은 좁은 툇마루 씬에 말갛고 기분 좋은 장면으로 연출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승낙의 전 여자친구가 승낙의 사과에 보인 일격은 영화를 보는 이들을 위해 남겨둔다. 각자의 가족 깊숙이 공기처럼 스며든 가부장제 사회는 이제 변화하고 있다. 그 관습의 이장을 제안해 주는 영화 <이장>의 질문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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