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의 시간 윤성현, 2020

by.김현수(씨네21 기자) 2020-06-05조회 1619
사냥의 시간 스틸
<사냥의 시간>(윤성현, 2020)에 담겨있는 ‘영화’들에 관하여

영화가 시작하면 두 명의 양아치가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면서 네가 내 옷을 몰래 입었네 마네를 가지고 말씨름을 한다. 구제 옷을 훔쳐 외국으로 넘기는 브로커 형을 통하면 300벌 정도를 팔았을 때 100불은 벌 수 있을 거라 말하는 장호(안재홍)와 “가오 떨어지게 그지 새끼도 아니고 남이 입던 옷을 으트케 팔어?”라며 불평하는 기훈(최우식)의 대화를 보여주던 카메라는 이들이 편의점 문을 나설 때 따라 나가서는 거리 풍경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훑는다. 그리고 두 사람이 탄 자동차가 출발하면 퉁퉁탁탁거리는 음악과 함께 영화의 타이틀이 화면에 박힌다. 나는 이 첫 시퀀스에서 이미 <사냥의 시간>이란 영화를 당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없는지가 결정된다고 본다. 장호와 기훈이 그들의 우두머리 격인 친구 준석(이제훈)의 출소 날에 마중을 나가는 이 첫 시퀀스는 비유하자면,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 빠져드는 터널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신이다. 이 영화는 앞으로 망해버린 미래 도시의 을씨년스러운 거리 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될 것이며, 그 거리의 주인공들은 ‘스투시’와 ‘슈프림’을 즐겨 입는 양아치들이 될 것이란 사실을 끝내 주는 사운드와 미술로 꾸며서 보여준다.

최근 몇 년 간 나는 이렇게 용감한 오프닝 신을 가진 한국영화를 보지 못했다. 편의점에서부터 장호와 기훈을 따라 나선 카메라의 움직임은 <칠드런 오브 맨>에서 주인공 테오(클라이브 오웬)가 커피를 사서 카페를 나서다가 폭탄이 터지는 장면과 유사하다. 두 사람이 준석을 만나러 교도소까지 가는 와중에 보여주는 길거리 풍경에는 <아키라>가 상상하며 담아낸 2019년의 망해버린 도쿄 거리의 이미지와 <공각기동대>의 홍콩과 상하이 뒷골목을 섞어 만들어낸 이미지, <증오>에 등장하는 파리 외곽 상트르 레비뉴의 낡은 아파트 이미지 등이 뒤섞여 있다. 윤성현 감독이 제시하는 미래 도시 서울의 이미지는 수많은 서브컬처 이미지에 기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영화로 신속하게 빠져들도록 의도한 이 오프닝 신이 되려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도 작용한다. 이 영화를 스마트폰이나 모니터, TV로 관람한 대부분의 관객은 영화가 제시하는 방식대로 이 판타지의 세계에 빠져들지 못한 것 같다. (이야기가 아닌) 내가 지금 뭘 본 것인지, 이미지를 믿지 못한, 혹은 속지 않은 관객은 아마도 다음 신에서는 귀를 의심하게 됐을 것이다. 원화 가치가 폭락해 수중에 지니고 있던 화폐가 휴지조각으로 변해버리고, 도모할 미래 역시 불투명한 상황에서 준석의 무리들은 범죄를 모의했다 실패한 전력이 있다. 그 책임을 준석 혼자 떠안고 감옥에 다녀왔으며 이제 이들은 또 다른 범죄를 구상한다. 캐릭터의 상황을 묘사하는 이 클럽 장면에서 주인공들은 직설적이고 낯간지러운 대사를 주고받는다. 이를테면 하와이를 닮은 대만의 어떤 섬에 가서 사업을 할 수 있다는 말, 20만 불만 있으면 아는 형님이 소개해준 대로 관광객을 상대로 한 장사로 한 몫 잡을 수 있다는 말, “야 거기 가서 우리 다시 시작하는 거야. 이 지옥에서 벗어나서.”라는 준석의 대사를 들을 때 아마도 추정컨대, 많은 관객들은 영화가 그저 허황된 것들을 휘황찬란하게 제시하고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영화가 시작한 지 7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눈과 귀를 모두 의심하게 되는 순간이 펼쳐진다.

그런데 나는 <사냥의 시간>이 공개된 후 지난 몇 주간 이 오프닝 장면을 10번도 넘게 돌려봤다. (어떤 스피커를 보유하고 있는지에 따라 확연한 차이가 느껴지는) 가슴을 울리는 프라이머리의 음악과 허공을 헤매는 듯한 카메라워크, 그리고 직설적인 대사가 만들어내는 조화는 나의 눈과 귀를 모두 만족시켜줬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다시 보는 중인데 <사냥의 시간>의 오프닝은 말그대로 키치적이다. 나는 진지한 몰입을 스스로 거부하게 됨으로써 오히려 이 판타지의 세계로 손쉽게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었다. <사냥의 시간>은 동화에 가깝다. 이 영화의 오프닝 신이 용감하다고 느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스스로를 지옥에 갇혔다고 여기는 순진한 악동들이 끔찍한 범죄를 모의하는 오프닝. 별 의미 없는 20만 불이란 숫자. 인생 역전을 모의하면서 펼쳐 놓는 너무나도 소박한 하와이 같은 대만의 섬 이미지. 윤성현 감독이 꾸며 놓은 서브컬처 기반의 환상 동화 첫 페이지를 2020년의 관객들은 상당히 낯설어 하는 듯하다.

2019년, 윤성현 감독을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한다. 그가 후반작업과 편집 중인 <사냥의 시간>을 소개하며 해준 말도 기억한다. 그날의 대화 주제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헬조선’에 대한 문제의식, 데뷔작 <파수꾼>(2010) 이후의 두 번째 윤성현 영화라는 어떤 기대를 배반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자신이 오랫동안 꿈꿔왔던 80년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향한 애정에 대해 그는 꼼꼼하게 설명했다. <사냥의 시간>에서 윤성현 감독은 헬조선에 관한 문제의식을 이미지로 표현한다. 영화 내내 준석이 감옥에 갈 수밖에 없었던 과거 범죄가 뭐였는지, 이들을 추격하는 한의 사정이 무엇인지, 준석과 상수(박정민)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기에 <파수꾼>의 한 장면을 재현하듯 하는지 등등 저간의 사정을 알 길이 없다.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이 순진무구한 청년들이 탈주극을 벌이는 과정에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결국 거대한 조직의 보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무력한 순간의 핏빛 안개가 곧 헬조선이다.
 

또 윤성현 감독은 <파수꾼>과 <사냥의 시간>의 차이에 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파수꾼>을 감독 윤성현이 가져가야 하는 방향이나 테두리로 생각했던 것 같다. <파수꾼>은 어찌 보면 내 안에 없는 재료를 가지고 나를 바꿔가며 만든 작품이다. 남자아이들이 주인공이지만 <파수꾼>의 연장선상이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정서적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파수꾼>이 현미경같이 내면을 들여다보는 영화라면 <사냥의 시간>은 현상 체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말했다. 이 영화의 현상 체험은 윤성현 감독이 좋아하는 80년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기인한다.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작품으로 일본 만화 <베르세르크>와 <아키라>를 꼽는 그는, <파수꾼> 이후 한동안 사이버펑크 영화를 준비하다가 <사냥의 시간>으로 선회했다. 추격자 한과 준석 무리의 대치를 통해서 그는 <매드맥스>와 <터미네이터>를 오마주한다. 준석이 친구들에게 도박장을 털자고 꼬시면서 “다 잘될 거야.”라고 말하는 부감숏에서는 저 멀리 화려하고 거대한 빌딩들이 만들어내는 마천루의 이미지가 펼쳐진다. 그 위에는 네온사인을 내건 애드벌룬이 하나 둥둥 떠다닌다. <블레이드 러너>가 상상하며 꾸몄던 영화 속 2019년의 도시 풍경이 떠오른다.

마지막으로 <사냥의 시간>에서 가장 마음을 뒤흔든 이미지는 예고편에도 잠깐 등장하는 장면인데 이 무모한 범죄를 모의하고 나서 준석 무리가 창고에서 총을 테스트해보는 장면의 이미지다. 허름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청년들은 서로 총구를 겨누며 웃고 떠들지만 며칠 뒤면 그들의 인생은 세상에서 처음 겪는 끔찍한 악몽으로 뒤덮이게 될 것이다. 그들이 새로운 삶을 꿈꾸면서 마지막으로 콩알만한 행복에 겨워하는 순간. <시티 오브 갓>과 <고모라>의 이미지가 <사냥의 시간>에도 담겨있다. 
 

<사냥의 시간>을 둘러싼 이미지의 재료가 무엇이 됐건 관객은 어색한 가짜라며 충분한 거리두기를 지켰다. “내 시간을 사냥당했다”며 댓글을 토해내던 관객들이 돌비 애트모스를 지원하는 극장 시스템에서 이 영화를 봤다면 어땠을까. 그 압도적이면서 디테일이 뛰어난 총격 소리와 음악에 지금보다는 더 빠져들 수 있었을까. 안개 자욱한 도시의 뒷골목, 사방이 꽉 막혀 미로 같은 지하 주차장, 더는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항구의 끝자락이 지닌 을씨년스러운 이미지를 대형 스크린에서 봤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마블과 블록버스터의 시대에, 그리고 하필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OTT의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간 <사냥의 시간>에 대해서는 언제든 더 길게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다. 그 대화의 주제는 언제나 영화적 향수로 가득한 레퍼런스 영화 리스트가 될 것이다. 우리는 <사냥의 시간>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이미지의 재료에 관해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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