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외출 장병기, 2019

by.이지현(영화평론가) 2020-06-25조회 1647
할머니의 외출 스틸
인식(임형국)이 출근을 준비하는 사이, 치매에 걸린 어머니(송광자)와 딸 소진(권잎새)은 ‘사물 맞추기’ 놀이를 한다. 날마다 반복되는 이 게임에서 한 사람은 반복을 인식하지만, 다른 사람은 매번 잊어버린다. 그래서 이 행위는 무기한 계속될 수 있다. 단순하지만 고통스러운, 그럼에도 견딜 만한 일상은 그렇게 지속된다. 그러던 중 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들 태진의 물건을 어머니가 끄집어낸다. 기억하는 자와 기억하지 못하는 자의 갈등이 서서히 고조된다. 어느 누구도 잘못한 사람은 없지만, 어떤 이는 피해자가 되고 또 다른 이는 처형자의 위치에 오른다. 기억이 침범한 내면의 경계는 인물 사이의 골을 파고든다. 누군가 고통에 비명을 지르더라도, 그 소리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인물들 각자의 내면에 한숨으로 남을 뿐이다.

처음에는 몇몇 장면의 연출이 아쉬웠다. 정면 원쇼트의 대화 표현은 어색했고, 리듬감 없이 등장하는 인서트도 거슬렸다. 그런데 자꾸만 생각이 났다. 내게 있어 장병기 감독의 <할머니의 외출>(2019)은 마음에 남아 뭉글뭉글 떠오르는 영화였다. 그러던 중에 감독의 인터뷰를 보았다. “처음에는 컬러라고 생각하고 촬영한 작품이다. 그런데 편집을 마친 뒤 화면을 보는데 처음의 의도를 화면이 가리는 것 같았다. 묘하게 따뜻하게 느껴지는 10월의 가을 화면이 영화와 안 맞았다.” 계속될 수 없는 게임을 인지하게 된 남자 주인공의 체념을 영화는 흑백으로 그리고 있었다. 그의 선택에 동의하게 됐다.
 

영화 속 모든 모티브는 ‘과거’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이를테면 사건의 시발점이 되는 아들의 ‘운동화 한 짝’이 그렇다. 이 물건의 등장으로 울음을 터트리는 자는 없다. 이미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절대 옅어질 수 없지만, 영화는 ‘슬픔’이나 ‘애정’ 같은 진부한 단어로 이 감정들을 꾸미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이곳에는 클리셰가 없다. 불같이 화를 내는 인물도 없고, 감정에 취하는 자도 없다. 진짜 아픈 감정이 그렇게 천천히 바깥으로 드러난다. 일상에 기대어서, 흘러가는 사건을 관망하며 영화는 아픈 기억을 어루만진다. 죽음에 이르는 예고 역시 마찬가지로 담담하게 그려진다. ‘현재’라는 틀에 갇혀, 인물들의 마음이 도덕적인 딜레마에 휩싸인다. 잠재적이고 가상적인 감정이 시간을 지배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남자 주인공에게 이야기가 집중되는 구성은 적절한 선택처럼 보인다.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가정이 모두 그로부터 시작된다. 말 그대로 이 인물은 ‘인식’하는 자이다. 뜨겁고도 무거운 가을의 온도가 그를 거쳐 형상화된다. 진정한 비극의 주인공으로서 남자는 존재하고 있다. 만일 <할머니의 외출>이 아름다운 색으로 칠해진 수채화였다면, 영화가 품은 시간의 뼈대는 드러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회하여 산만하지 않은 방식으로, 영화는 흑백의 그림자를 내민다. 폭발적 내면을 보여주지 않고서도, 달콤한 시간을 끄집어내지 않고서도, 관객들은 그저 선험적으로 무해하고 관조적인 감상에 이른다. 때문에 이 작품은 시간의 이미지와 맞닿아 있다. 무언가의 회귀를 간절히 바라면서,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집중한다.
 

마지막 장면을 떠올린다. 할머니의 상황에 대해 아버지는 딸에게 전화 너머로 설명하는 중이다. 그의 목소리에서, 바라보지 않아도 전달되는 아이러니한 감정을 깨닫는다. 영화에 드리워진 암흑의 실루엣은 어느새 새벽을 향한 밤의 그림자가 되어 있다. 현실이란 악몽에 덧입혀진 어설픈 레이어는 이제 곧 벗겨질 것이다. 생각해보면 누구도 옳지 않은 자는 없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간혹 실수하고 공황에 빠지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은 영화의 결말은 그렇게 가느다란 희망과 만난다. 예민한 주인공이 약한 숨을 내쉬고, 단호한 ‘생략’이 모든 것을 암시한다. 아마도 우리 주변을 떠돌던 일상의 어두움은 극복될 것이다. 이 결말을 딱히 아프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영화가 품은 모호한 형상은 사실 우리들 자신과 몹시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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