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리 김진유, 2018

by.듀나(영화평론가) 2020-06-09조회 1007
나는 보리 스틸
보리는 강릉에 사는 11살 여자아이다. 보리, 엄마, 아빠, 남동생으로 구성된 4인 가족은 부러울 정도로 평화롭고 화목하다. 이들이 다른 ‘정상가족’과 다른 점은 단 하나. 보리를 제외한 다른 세 명은 귀가 들리지 않는 농인이라는 것이다. 영화의 전반부는 보리가 농인과 청인의 세계를 오가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친구 아빠가 하고 있는 중국집 배달 주문은 늘 보리의 몫이다. 은행에서 부모의 통역을 하는 것도 보리 몫이다.

유일한 청인으로서 가족 내에서 조용한 소외감을 느끼던 보리는 자신도 가족 내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잦은 잠수로 귀가 어두워진 해녀 할머니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본 보리는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깨어나지만 여전히 소리는 들린다. 보리는 시치미를 뚝 떼고 귀가 안 들리는 척 하지만 이 거짓말은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일반적인 청인 관객에게 보리의 행동은 당황스럽다. 농인 가족 사이에서 보리가 느끼는 소외감까지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소리를 잃는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장애를 얻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후 아이가 얻게 될 불편함을 생각하면 이는 좀 오싹한 생각이다. 게다가 우리는 농인인 보리의 동생이 일반 학교에서 느끼는 불편함을 이미 목격하고 있다. 생각 없는 아이도 아닌데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여러분은 설득될 수 있는가?

마지막에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제한된 경험 안에서 세상과 예술작품을 보고 이해한다. 우리의 시야는 독서와 같은 간접 경험으로 넓어질 수 있지만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 어떤 관객이 끝까지 보리의 생각과 행동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김진유의 <나는 보리>(2018)가 약한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 영화가 그 관객의 이해범위 바깥에 있을 뿐이다.

보리의 소원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자면, 김진유는 보리와 마찬가지로 코다(CODA, Child of deaf adult), 즉 농인 부모와 자란 청인이고 소리를 잃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자신의 실제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 바람은 김진유 개인만의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김진유는 농인 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청력을 잃기를 바라다가 실제로 농인이 되어 행복해진 사람을 직접 만난 적이 있고 그 이야기도 <나는 보리>에 반영되어 있다. 
 

보리의 이야기는 우리가 단순히 장애, 비장애라는 이분법으로 보는 세계가 보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복잡한 곳이고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해결하는 것도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으며 심지어 그것이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 보리에게 농인과 청인의 구별은 장애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체성의 문제이다. 11살의 아이가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는 질문. 나는 누구인가. 보리는 다른 아이들이 가지 않고, 심지어 있는지도 모르는 자기만의 길을 간다. 

농인을 흉내내면서부터 보리는 이전과는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사람들이 보리를 농인 취급을 하면서 이전에도 알고는 있었지만 충분히 체감하지 못했던 또다른 정보가 들어온다. 이 중 일부는 김진유의 단편 <높이뛰기>(2014)에 먼저 비슷한 내용으로 반영된 적 있는 직설적인 혐오와 편견이다. 다른 일부는 선의에 바탕을 둔 정보 누락과 왜곡이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어느 정도 치료할 수 있다면 그건 좋은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를 위해 약간의 정보를 누락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다시 생각해보라.

어두울 수 있는 이야기지만 영화는 의외로 밝다. 김진유는 <나는 보리>에서 불필요한 복잡함과 어둠을 허용하지 않는다. 보리와 보리의 가족은 모두 밝은 사람들이고 종종 위태롭고 위험한 일이 벌어져도 이야기는 동화적 명쾌함 속에서 해답을 찾는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쉬운 길을 간다는 말은 아니다. 세상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스펙트럼 위에 살고, 보리의 가족은 그 중 빛이 많고 화사한 영역에서 자기네들의 삶을 자기 식으로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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