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가장 보통의 연애 김한결, 2019

by.전종혁(영화 칼럼니스트) 2020-05-19조회 4,626
가장 보통의 연애 스틸
타인의 사랑을 비웃지 마라, <가장 보통의 연애>(김한결, 2019)

2010년대 한국 영화는 많은 자본이 투입된 시대극이나 범죄 영화 등의 상업 영화에 치중하면서 코미디나 멜로드라마 같은 소소한 재미를 주는 장르는 점점 힘을 잃었다. 특히 TV에서 흔히 즐기는 로맨틱 코미디를 스크린에서 만나기는 쉽지 않다. 돌이켜 보면 2000년대 할리우드에서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를 필두로 젊은 여성의 일과 사랑을 주제로 한 칙릿 영화 열풍이 불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 <인턴>(2015) 같은 여성 서사 영화들이 호응을 얻은 상황에서 국내에선 과거와 달리 보다 현실적인 연애에 기반한 로맨스 영화들이 기획되었다. 톡톡 튀는 대사와 입심이 재미를 주는 스크루볼 코미디처럼 수다가 늘어났지만, 세련되고 지적이라기 보다는 남녀의 반복되는 다툼, 질투, 이별 등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었다. 

<러브픽션>(2011)은 사랑하는 그녀의 겨털(취향!)과 과거사를 기꺼이 받아들이라고 충고했고, <연애의 온도>(2013)는 서로를 아프게 상처내는 연인이 이성을 잃고 치고받도록 내버려두었다. 이 영화들은 "다신 안 그럴게!", "나, 사랑하긴 해?" 같은 대사로 가득 차 있었다. 즉 누구나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여러 번 내뱉은 말이다. 물론 이런 일상적인 대사는 관객과 쉽게 교감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헤어지자!"라는 대사와 생채기가 난무한 가운데 남성의 이기심과 욕망이 느닷없이 심판대에 올랐다는 데 있다. <봄날은 간다>(2001), <클래식>(2003) 같은 2000년대 영화들이 순둥이 남성의 순애보에 방점을 찍은 것을 떠올린다면 분명 급격한 변화였다. 이제 진흙탕 로맨틱 코미디는 남성 캐릭터의 감추고 싶은 민낯(무책임감과 찌질함)이 모조리 드러나는 무대가 된 것이다. 남성용 면죄부는 소멸하고 그들의 변명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멜로드라마 <건축학 개론>(2012)이 첫사랑의 판타지를 극대화하고 남성의 욕망에 충실히 부합(심지어 과거의 첫사랑 여인을 현실에 소환해 사랑 고백을 들으며 판타지를 완성)했던 것과 다른 노선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남녀가 사랑하고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다시 만나는 과정을 그린다는 점에서 <가장 보통의 연애>(2019) 역시 흔하디 흔한 로맨틱 코미디다. 새로운 회사의 출근 첫날, 직장까지 찾아온 남친과 헤어지려고 싸우는 선영(공효진)과 파혼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해 매일 술을 찾는 재훈(김래원)의 직장 연애담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쉽게 요약하면 "같이 한잔 할래?"로 시작해 취중진담, 두주불사, 설왕설래로 발전한다. 그들이 안내하는 술자리에서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술 권장 영화지만 다소 성급하게 저평가받는 것과 달리 의외로 급진적인 면모가 있다. 사랑과 성공에 대한 판타지나 위로를 내세우는 대신 상처뿐인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내기 때문이다. 

2010년대 한국 영화는 잊힌 과거를 다시 복기하는 문제작을 많이 내놓았지만, '지금, 여기'라고 칭할 수 있는 현재의 문제를 담으려는 기획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82년생 김지영>(2019)이라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상업 영화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의미로 접근한다면 보통의 연애 속에서 ‘가장 보통의 현실’을 찾을 수 있다. 이 영화가 담아낸 직장 에피소드(뒷담화 문화)나 남녀 사랑법은 현실의 지표일 수밖에 없다. 세간의 부당한 평가와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선영을 통해 남성 중심적인 한국 사회의 단면이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입은 피해 등을 부수적으로 고발한다. "남자랑 여자랑 같냐?"라는 말하는 재훈에게 "같지!"라고 외치는 선영의 말이 모든 것을 대변한다. 코미디로 가볍게 풀어냈지만 여성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일상 속에 얼마나 스며 있는지 보여주는 장면들이 스산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여전히 주목하게 만드는 것은 남성 캐릭터다. 재훈은 <러브픽션>의 주월(하정우)과 <연애의 온도>의 동희(이민기)가 보여준 찌질함과 무모함에 비해 한 단계 성숙한 인물이다. 선영과 재훈, 두 사람은 또래지만 사랑의 가치를 믿는 재훈이 사랑의 환상을 믿지 않는 선영에 비해 훨씬 보수적으로 비춰진다. 언뜻 마초(속칭 '꼰대')처럼 보이지만, 재훈은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포장 없이 밝히는 솔직함을 지녔다. 강하면서도 나약한 모습을 모두 보여줄 수 있는 남자. 그의 이상과 욕망은 현실에서 무참히 배반당하지만 그렇게 무너지면서 스스로 자신의 환상에서 벗어난다. 엔딩에서 선영과의 재회는 로맨틱 코미디의 예정된 컨벤션이지만, 그는 섣불리 사랑이라는 단어를 동원하기 보다는 "보고 싶었어"라고 고백하는 그녀의 입술을 읽어낸다. 이 순간 술자리에서의 게임이 ‘사랑의 게임’으로 이어지고 연장된다. 모든 게임은 동등한 파트너가 필요한 법이고, 그 룰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것이 연애의 시작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출발점으로 돌아온다(이제야 남성은 자신의 거울인 여성을 통해 욕망과 대면한 것일까?).

시시껄렁한 농담과 반복되는 투정, 술에 의존하는 밀당이 자유롭게 성행하는 것이 오늘날의 한국형 로맨틱 코미디다. 무모하게 사랑을 갈망하고 실험하는 스크린의 연애 생태계는 우리의 현실과 일상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놀랍게도 우리가 감추고, 잊고 싶어하는 기억과 추억들을 다시 살려내고 있다. 그 남자, 그 여자가 일으키는 사건사고가 그리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나, 자신의 사랑을 돌이켜보게 만드는 ‘로맨틱 정글’로의 초대는 아찔하지만 언제든지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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