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찬실이는 복도 많지 김초희, 2019

by.김효정(영화평론가) 2020-04-10조회 8,249
찬실이는 복도 많지 스틸

“영화란 말야…..” <찬실이는 복도 많지>(김초희, 2019)의 첫 대사는 마치 앙드레 바쟁(Andre Bazin)이 던진 일생의 프로젝트, “영화란 무엇인가?”(What Is Cinema?)에 대한 거대한 답변으로 시작을 하려는 듯 하다. 그러나 곧 이어지는 다소 허망한(?) 에피소드들은 영화의 존재론적 사유와는 좀 거리가 있어 보인다. 오히려 찬실이의 일상은 유쾌한 잡담에 가깝다. ‘잡담’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것이 우리 모두가 늘상 나누고 공유하는 보편적인 일상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마흔살, 찬실이(강말금)는 영화 프로듀서다. 맞다, 아무리 자세히 설명을 해줘도 극중의 주인집 할머니(윤여정)가 그렇듯, “그래서 그게 뭐하는 일인데?”라며 무한반복 같은 질문이 되돌아오는, 그 정체성 제로의 직업말이다. 특히 감독이 갑자기 죽고 나선 더 그러하다. 더 이상 할 일도, 불러주는 사람도 없이 수입이 끊긴 찬실이를 친한 배우 동생, ‘소피’(윤승아)는 가사도우미로 고용한다. 아침마다 소피의 술병을 치우는 일에도 보람이 느껴질 무렵, 찬실이는 단편영화 감독이자 소피의 불어 선생, ‘영’(배유람)에게 빠져들게 된다. 영을 짝사랑 하면서부터 그녀의 삶은 새로운 활기가 넘친다. 데면데면하던 주인집 할머니와 우정도 나누고, 수호천사인 장국영(김영민)이 필요할 때 마다 나타나 고민도 들어준다. 이 가운데 찬실이는 정말 복도 많아 보인다. 
 

그러나 영에게 거절을 당하면서 그녀는 좀 전의 지지리도 ‘없는 삶,’ 즉 갈데도, 만날 사람도, 할 일도 없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복 많은 찬실이는 서서히 이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한다. 그것은 이 ‘없는 것들’ 사이를 뺴곡히 채우고 있는, 수 많은 ‘있는 것들’이다. 삶에 찌들어 미처 들여다 보지 못했던 일상엔 딸이 “꽃 처럼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이웃의 아픔이 있고, 발연기로 욕만 얻어먹는 후배의 웃픈 푸념도 있으며, 찬실이의 재기만을 기다리는 동료들의 응원이 있다. 마침내 이 풍성한 찬실이의 일상은 스크린 속 누군가의 그것으로 영화적 환생을 맞는다. 

이쯤 되면 정말로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난제에 대해 바쟁조차도 만족스러워할 답을 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란 우리에게 없는 것들, 즉 결핍들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비추고 의미를 메기는 일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찬실이의 시나리오 노트가 그녀의 ‘없는 삶’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의 재발견은 영화적 발견임과 동시에 영화의 소임이기도 하다. 같은 맥락에서 영화는 꽤 영리한 방법으로 삶과 영화를 도치시킨다. 이를테면 삶을 영화의 언어로, 영화을 삶의 언어로 말이다. 쥐뿔도 없지만 잘난 척 좀 하고 싶을때는 ‘오즈 야스지로’가, 초라한 서가를 메울 만한 서적으로는 ‘키노’가, 푸념상대가 필요할 땐 난닝구 바람의 ‘장국영’ 만한 것이 세상에 어디있겠는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세상 밖이 바이러스와의 싸움으로 불안과 혼란의 최절정을 지나는 한가운데에 개봉했다. 그럼에도 3월 중순 기준 관객수 만 칠천명을 넘어서며 썰렁한 극장들로 관객들을 끌어모으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예사롭지 않은 치유의 힘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주체할수 없을 만큼 웃어보고, 혼잣말을 해 봤으며,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오즈 야스지로도, 키노도, 장국영도 분명 그것을 가능케한, 반가운 아이콘이었지만 이 작품에서 가장 영화적인 아이콘은 역시 찬실이를 연기한 강말금 배우다. 그녀의 얼굴에는 우리 모두의 결핍과 바램 그리고 환희가 있다. ‘말금’이라는 이름처럼 그녀의 얼굴은 마치 일상에 담궜다 빼낸 리트머스 종이같이 분명하고, 즉각적이다. 동시에 간간히 드러나는 그녀의 ‘시네마틱한’ 표정은 이야기의 에너지를 환기하는 유일무이한 통로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모든 것, 즉 영화적이고 세속적인것을 발견하고 조합해낸 김초희 감독의 공이 크다. 2020년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은 봄 가운데, 그녀의 영화가, 그리고 찬실이가 이 난세를 구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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