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아이 바이 유 바이 에브리바디 김남석/최승윤, 2019

by.채희숙(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2020-04-24조회 2,893
아이 바이 유 바이 에브리바디 스틸
무용 작품은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에만 존재하며, 그 작품의 지속은 오롯이 기억의 몫이다. <아이 바이 유 바이 에브리바디>(김남석/최승윤, 2019)는 이처럼 한순간 일어났다 영원히 사라지는 무용의 시간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영화의 시간이 카메라 앞에 일어나는 현재를 포착하고 그것을 반복적으로 재생하는 기계에 기반을 두고 나타난다면, 무용의 시간은 매번 다른 현재를 만드는 신체의 움직임 속에서 산다. 영화와 무용은 서로 완전히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에 기록된 무용이란 무용 작품과는 또 다른 것으로, <아이 바이 유 바이 에브리바디>는 공연을 기록하는 영상이 되지 않으려 한다. 다시 말하면 이 영화는 무용이 아닌 것으로 무용을 남기려는 시도다. 영화가 공연일 수 없다면 영화는 어떻게 무용을 기록하고 간직할 수 있을까? 무용이라는 것은 어떻게 간직될 수 있을까?

영화는 공연이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하는 이면의 시간을 기록한다. 총 5명의 무용가가 자신만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다. 이들은 무용학원 강사로 일을 하고, 요가 스트레칭으로 몸을 단련하고, 승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미래를 모색하고, 진정한 욕망을 들여다보기 위한 여행을 준비하고, 안무 연습을 한다. 무용가이자 영화를 기획 중인 감독 최승윤은 이 무용가들을 각각 만나서 그들과 돈, 열정, 꿈 등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 그들 삶에는 불안정한 미래를 나아가야 하는 불안이 존재하는 한편 그들에게 무용은 좋고 충만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용가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자기 삶을 조직해가고 있다. 이들이 함께 한 공연은 영화에서 단지 포스터로만 소개되고, 공연을 함께 만들어낸 5인이 이야기를 나눈다. 무용이란 무용가들의 몸을 통해 실현되고 작품은 무용가들의 몸에 흔적을 남기는데 그것은 단지 안무를 기억하는 일이 아니다. 무용의 시간은 공연하는 순간 속에 존재하지만, 그 순간은 이미 다양한 열정들이 마주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도달하게 되는 감정, 깨달음, 성취감, 유대감 등을 품고 있는 시간의 발현이고, 이러한 시간은 그것을 몸에 새긴 무용가들의 삶을 운영하는 영감이나 동력으로도 지속한다.
 

그런데 작품 전후 시간을 담아가는 형식 속에서 영화와 무용은 서로 더 복합적인 협업을 이룬다. 영화는 인물들이 인터뷰하면 카메라가 뒤에서 취재한 결과물의 편집이 아니라, 미리 공들여 계산된 장면들과 연출된 대화들을 통해 진행된다. 동료들과 만나고 있는 최승윤에게는 한 영화감독과의 만남도 끼어드는데, 그 대화에서는 영화와 무용 간의 공통점 및 차이점에 관한 생각이 오간다. 이 대화를 주고받는 영화감독은 영화의 장면 역시 한 번만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촬영 때마다 매번 온갖 사물들이 빚어내는 상황이 다르다. 예를 들면 같은 앵글에 놓고 찍더라도 어떤 때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지만 어떤 때는 미동도 없다. 그러므로 한 장면을 반복해서 찍는 작업은 똑같은 것의 반복이 아니다. 이 영화는 이런 영화 작품 이전의 반복과 변주를 영화 장면 자체로 실행한다. 장면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인물들의 동선은 같은 구성을 반복하는데, 그 반복은 조금씩 다른 앵글이나 시선 그리고 속도를 갖는다. 영화는 반복하지만, 그 반복 속에는 변화가 담겨 있다.

<아이 바이 유 바리 에브리바디>는 마치 리허설 필름 같기도 하다. 영화 촬영이란 반복해서 찍으면서 좋은 것을 찾아내는 일종의 연습 시간인데, 이 영화에서는 반복 자체가 작품의 리듬을 형성하고, 그 반복의 시간 자체가 주제다. 영화는 작품이 리허설을 품기보다는 역으로 리허설이 작품을 품게 되는 모양을 그려나간다. 여기에서 리허설은 더 이상 작품 안에 완전히 포함될 수 없으며, 심지어 작품이라는 결과를 향한 목적론에 복무하지도 않는다. 영화의 시간과 무용의 시간 모두 작품이라는 목적보다 더 크거나 혹은 그러한 목적을 잘 모르는 리허설들로 채워져 있다.
 

작품 전후 활동 과정을 작품보다 부각하는 영화의 방향이 단지 자족적인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방향이 예술 작품이 무엇인지에 대한 잘 조직된 질문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우선 무용과 영화 각각이 가진 고유한 특성을 표현한다. 그리고 작품을 만드는 시간을 성찰하고 작품에 구현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흘러가지 않는 시간의 순환을 작품 내에 만든다. 영화는 최승윤 감독이 영화를 만들고자 결심하고 김남석 감독에게 조언을 구하면서 서로 편지를 나누는 보이스오버를 포함하고 있다. 그 편지는 최승윤 감독이 촬영을 막 완료하고 김남석 감독에게 소회를 밝히는 때까지 이어지는데, 우리는 이미 두 감독의 협업으로 완성된 영화를 보고 있다. 영화의 끝은 영화의 시작으로 이어지고, 이 영화는 협업으로 나아가는 만남의 과정이자 협업의 결과이기도 하다. 메이킹 필름과 동시에 완성된 이야기인 것이다. 과정과 결과는 선형적인 관계나 위계를 벗어나고, 결과는 늘 과정 중인 시간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아이 바이 유 바이 에브리바디>는 무용과 영화가 각각 작품으로서 무엇을 남기는지, 또 작품을 도출하는 작품 바깥의 시간이 가지고 있는 지위는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남산타워가 창 너머로 잘려 보이기도 하고, 바깥에서 비스듬히 보이기도 하며, 또 밤하늘에 빛을 내며 오롯이 드러나는 위치에 놓이기도 하는 것처럼 영화의 반복은 새롭게 보면서 더 나은 것을 향하는 방법이 되고, 무용은 새롭게 움직이면서 더 나은 것을 찾는 경험으로써 몸에 기억으로 남아 일상을 이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하는 반복의 시간은, 무용이 지속하는 시간의 성격을 성찰하게 하는 한편, 영화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결정적인 시간이란 소위 사건의 클라이맥스보다도 오히려 그 사건을 도출해내는 전후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닐지 질문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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