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랏말싸미 조철현, 2019

by.변성찬(영화평론가) 2020-03-13조회 1550
나랏말싸미 스틸
한글이 주인공인 영화

<나랏말싸미>(조철현, 2019)는 좀 기이한 영화다. 한 번 보면 세종-송강호와 신미-박해일의 투 톱 영화처럼 보이지만, 한 번 더 들여다보면 소헌-전미선이 가세한 쓰리 톱 영화임을 드러내고, 또 한 번 들여다보면 정작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한글 그 자체였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 영화는 단지 한글 창제 과정을 배경이나 소재로 삼은 영화가 아니라, 한글을 주인공이자 주연으로 삼은 영화다. 적어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랏말싸미>는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생각하고 따라가는 것보다 한글을 주인공으로 생각하고 따라가는 것이 훨씬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더 깊은 맛을 내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는 한글 창제의 과정이 세종을 비롯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의 배경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물들이 한글이라는 주인공 이야기에 복무하고 있다. 이야기의 구조와 플롯은 한글이 자신의 탄생 과정에서 겪었을 우여곡절을 충실하게 따라가고 있으며, 배우들의 연기는 그 과정에 담긴 드라마의 조연이 되도록 (배우들에 의해) 절제되고 (감독에 의해) 조절되어 있다.

한글이 태어나기까지 겪었을 우여곡절에는 두 가지 다른 층위의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하나는 익히 알려져 있는 것처럼 세종의 애민의식과 신진 사대부의 특권의식의 갈등과 충돌이다. 다른 하나는 뜻글자와 소리글자 사이의 간격이다. 전자는 다양한 대중문화의 형식을 빌려 여러 번 이야기된 바 있어 이미 익숙한 상식이 되었지만, 후자는 (적어도) 대중영화의 틀 안에 담아내기에는 까다롭고 어려운 문제다. <나랏말싸미>는 이 어려운 과제에 도전한 영화이고, 대중영화의 틀 안에서 그 초심 또는 원칙을 끝까지 충실하게 지킨 영화다. 내가 말하는 초심이란 이 영화의 작가가 한글에 대해 품고 있는 애정이다. 이 영화가 그려내고 있는 한글 탄생 과정은 이미 한글에 익숙한 사람은 쉽게 상상하기 힘든 우여곡절의 연속이다. 
 

한글의 잃어버린 탄생의 과정을 그려내는 데는 그 과정을 역으로 되짚어 가보는 상상력과 그것을 뒷받침할 많은 조사 및 연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 지난한 과정을 감내하는 것은 어떤 근본적인 애정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애정은 때로는 한글의 미래를 예견하는 유쾌한 상상으로 드러나지만, 때로는 한글 자신이 품고 있는 어두운 비밀을 깊이 있게 드러내기도 한다. 어린 스님과 궁궐 나인이 ‘초성’으로 나누는 문자 대화는 디지털 시대를 맞아 꽃피운 한글의 빼어남을 경쾌하게 보여주지만, ‘아래 아’자의 생사여부를 둘러싸고 세종과 신미 사이의 긴장은 한글의 어두운 비밀을 놀라운 방식으로 드러낸다. 그 어두운 비밀이란, 세종의 한글 창제에는 그의 애민의식만큼이나 그의 수학적(또는 기하학적) 사고방식이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고, 글자가 경제성과 효율성을 추구할수록 그것은 생생한 말을 죽이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랏말싸미>는 또 다른 의미에서도 한글의 영화다. 감독의 말대로 이 영화는 “대사가 액션이고 사건이며 심리인 영화”다. 특히 세종(송강호)과 신미(박해일)이 주고받는 대사들 속에는 ‘우아한 랩 배틀’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깊이와 경쾌함이 공존한다.
 

<나랏말싸미>은 한글이 탄생 과정에서 겪었을 또 다른 우여곡절(세종과 사대부의 권력투쟁) 또한 정확한 분석과 풍부한 상상력과 간결한 표현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 중 가장 놀라운 통찰은 한글이 태어나기보다 태어난 후 살아남기가 더 힘들었을 수도 있는 글자였다는 통찰이다(적어도 나는 아직까지 이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는 것, 이것은 예술의 용어로 표현하면 ‘창작’일 것이고, 정치의 용어로 말하면 ‘개혁’일 것이다. 둘 모두 태어나기보다 살아남기가 더 힘들다는 공통의 운명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랏말싸미>는 한글 창제를 둘러싼 세종 당대의 정치적 상황의 갈등 구도와 오늘날 개혁을 둘러싼 대립을 겹쳐 놓고자 한 영화이기도 하고, 일정하게 그 시도가 성공한 영화이기도 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권력투쟁은 동일한 구조와 비슷한 과정을 겪게 된다는 것, 아마도 이것이 그 성공의 비결일 것이다. 모든 사극은 서로 다른 시공간의 조우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퓨전일 수밖에 없다. 퓨전사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극 자체가 퓨전의 정신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장르다. 문제는 그 퓨전 정신의 깊이와 그것을 형상화해낼 수 있는 감각일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나랏말싸미>는 한국영화사 안에서 새롭고 깊이 있는 성취를 이루어낸 작품으로 기억될 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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