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청년들이 모여서 영화를 만든다. 아니, 이들은 영화를 만들기 전에 실은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막한 상황에서 일단 카메라부터 꺼내 들어 제작과정부터 찍기 시작한다. 이들이 찍은 모든 푸티지가 모여서 한 편의 영화가 되었다. 2017년 제2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최고상인 코리안 판타스틱 작품상을 수상한
심찬양 감독의 <
어둔 밤>(2017)은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 어느 대학의 동아리 ‘리그 오브 쉐도우’의 멤버들이 모여서 <다크나이트 리턴즈>라는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다룬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다. 영화에 등장하는 동아리 멤버 캐릭터는 모두 실은 심찬양 감독의 실제 지인들이다. 쉽게 말해 <어둔 밤>은 영화에 대한 꿈을 이어갈 수 있을지 앞날이 불투명했던 한 젊은 감독이 주변 지인들을 꼬드겨 만든 영화다. 영화 속 인물들이 처한 현실과 감독이 거의 흡사한 문제를 공유하는, 그리고 그것이 영화에 그대로 반영된 일종의 다이어리 같은 영화라고나 할까. 감독이 처음 완성했던 단편영화 <
회상, 어둔 밤>(2015)의 결말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나중에 추가로 촬영을 이어나가 이른바 확장판에 해당하는 장편 <어둔 밤>을 완성했다는 점 역시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제작과정은 차차 뒤에서 설명하도록 하자.
우리는 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영화 만들기에 관한 영화’를 몇 편 알고 있다. 배우나 감독, 촬영장을 소재로 할리우드와 미국 사회와의 속성을 꼬집는 로버트 알트먼의 <
플레이어>(1992)나 현실과 영화 안팎의 경계를 뒤흔들며 마법 같은 순간을 포착하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
클로즈업>(1990), 팀 버튼의 영화세계를 관통하는 캐릭터의 힘을 보여주는 <
에드우드>(1994) 같은 영화들. 물론 여기에 더해 감독들이 사랑해 마지 않던 또다른 영화들에 바치는 오마주의 영역까지 확장해 생각해보면 영화에 관한 사랑을 영화 자체를 도구삼아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영화적인, 그러니까 낭만적인 일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이런 류의 영화를 볼 때의 재미란, 의도적으로 관객 스스로 제4의 벽을 깨고 영화 안팎을 오고 간다는 점이다. 어디까지가 진짜 영화인지, 진짜 감독의 의도인지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비로소 관객은 영화적인 순간을 목도하게 된다.
다시 <어둔 밤> 이야기로 돌아가보자면, 이 영화는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완결된 영화는 4부에 해당하는 전체 제작과정으로도 이어진다. 영화를 보고 제작과정까지 접해야 비로소 완성된 영화를 전부 봤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우선 1부의 제목은 <회상, 어둔 밤>. 영화가 시작하면 가상의 영화 동아리 ‘리그 오브 쉐도우’의 멤버들인 안감독(송의성), 심피디(심정용) 등이 자취방에 모여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처럼 “진정성 있는 영화를 만들어보자”며 의기투합한다. “할리우드에 갈 수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확신한 그들은 아직 시나리오도 쓰지 않은 자신들의 영화 <어둔 밤>을 훗날 리미티드 에디션 DVD로 발매하겠다며 거기에 수록할 메이킹 필름부터 찍기 시작한다. 이들의 영화는 본편까지 촬영을 마쳤지만 영화 속 캐릭터에 해당하는 헤드 스태프들의 잇단 군 입대로 결국은 빛을 보지 못한다. 선배들의 미완성 작업을 이어받은 동아리 후배 상미넴(김상훈)이 선배들의 기치를 이어받아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원칙주의적으로” 오디션을 봐서 배우를 선발해 촬영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어둔 밤>의 2부에 해당한다. 3부는 상미넴과 친구들이 완성한 영화 속 영화 <어둔 밤 리턴즈> 그 자체가 해당된다.
앞서 <어둔 밤>의 전체 제작과정이 4부에 속한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심찬양 감독은 실제로 1부에 해당하는 단편 영화 <회상, 어둔 밤>을 만든 후에 극중 인물들이 결국 영화를 찍지 못하고 결말을 맞이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마음 속에 지니고 있다가 이들이 만드는 영화를 완성시켜주자는 의미를 담아 2부와 3부를 추가로 기획하게 됐다. 또한 그는 연기 경험이 없고 본인 스스로를 드러내듯 연기하는 친구들의 날 것 같은 모습을 포착하고 싶었다. 거기에는 비전문 배우들이기에 롱테이크는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라는 현실적인 판단도 뒤섞여 있었던 셈이다. 또한, 1부를 촬영했던 심찬양 감독의 절친인 조병훈 촬영감독이 돌연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영화연구소(AFI)에 입학했는데 그가 2부 촬영 도중 갑자기 한국을 방문하는 바람에 <어둔 밤>의 3부 촬영을 맡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어둔 밤>이란 영화 전체를 휘감고 도는 ‘덕질’이란 정념이다. <어둔 밤>이 완성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힘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을 좋아하는 감독 이하 친구들이 모여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다는 점, 그리고 그 마음이 그대로 영화의 시놉시스에 반영되었다는 점, 영화 속 인물들이 모여 최종적으로 완성한 3부 <어둔 밤 리턴즈>라는 영화 역시 <
다크나이트>(2008)에 오마주를 바쳤다는 점 모두 ‘덕질’이란 정념의 산물이다. 심찬양 감독과 <어둔 밤>의 등장을 ‘할리우드 키드’ 다음 세대의 출현, 이를테면 ‘놀란 키드’ 혹은 ‘슈퍼히어로 키드’의 출현이라 부르고 싶은 이유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말버릇처럼 되뇌던 “진정성 있는 영화” 만들기라는 것은 우리 영화를 누구 누구의 영화처럼 만들고 싶다는 간절한 애정 즉 ‘덕질’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어둔 밤>이 잘 보여줬다. <어둔 밤>은 시작부터 끝까지 낯선 풍경과 낯선 표정과 낯선 앵글로 가득하다. 그것을 어설프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이들이 완성된 영화와 제작과정에서 보여준 진정성은 이들의 다음 작품을 절로 응원하게 만든다. 그것이 <어둔 밤>이 가진 에너지다. 이 영화가 개봉한지 딱 일년이 지났다. 그 사이 심찬양 감독은 두 번째 장편 영화 촬영을 마쳤고 영화에 등장했던 친구들은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커리어를 쌓아 나가고 있다. <어둔 밤>을 소개하면서 단 한 번도 ‘루저’라는 단어를 쓰지 않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