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유열의 음악앨범 정지우, 2019

by.강병진(영화저널리스트, 허프포스트코리아 에디터) 2019-12-24조회 2,033
유열의 음악앨범 스틸
멜로영화의 정수는 '키스'가 아니라 '달리기'

TV에서는 핑클이 캠핑을 다녔다. 유튜브에서는 1990년대의 <SBS 인기가요>가 24시간 스트리밍됐다. <핑클클럽>과 <SBS 인기가요> 모두 그때의 기억을 소환시켰다. 논산 연무대에서 출발해 부대로 향하는 기차 속에서 처음 들었던 핑클의 ‘영원한 사랑’이 떠올랐고, 과거 <SBS 인기가요>에서 노래를 소개하며 ‘네~!’를 유행어로 만든 장정진 성우도 기억났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고 역시 1990년대를 그린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에서도 같은 기대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1994년부터 2005년까지, IMF를 지나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다룬 이 영화가 소환한 건, 잊혀진 기억이 아니라 잠시 잊고 있던 감정이었다.  

언뜻 <유열의 음악앨범>(정지우, 2019)은 <건축학개론>(이용주, 2011)과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와 다를 게 없어보이는 영화다. 과거의 사랑방식을 재현하면서 그때의 대중음악으로 기억을 증폭시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건축학개론>이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을, <응답하라> 시리즈가 HOT와 서태지를 활용했던 것처럼 <유열의 음악앨범>도 그때의 유행가들을 곳곳에 배치한다. 모자이크의 <자유시대>, 핑클의 <영원한 사랑>, 윤상이 부르고 토이 앨범에 수록했던 <우리는 어쩌면 만약에>, 신승훈의 <오늘 같은 창밖이 좋아> 등등. 그때 이 음악을 들었던 관객들이라면, 반가워할 수밖에 없는 노래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열의 음악앨범>에는 그들과 달리 ‘그땐 그랬지’란 그리움의 시선이 없다. 예를 들어 PC통신을 통해 소통하는 장면은 <응답하라 1997>에 나왔고, <건축학개론>에는 하드 용량 1기가의 펜티엄 컴퓨터가 나온다. 이 작품들에서 그때의 컴퓨터와 PC통신은 어디까지나 그때를 재현하는 소품이다. 하지만 <유열의 음악앨범>에서 주인공 미수가 PC통신을 이용해 현우에게 메일을 쓰는 상황은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그리운 사람과 그렇게 소통할 수 밖에 없는 상황 그 자체다. 여러 장면에서 소환되는 음악들이 일으키는 효과도 현재형으로 쓰인다. 음악들은 인물들이 직접 좋아하는 노래들로 나타나지 않고, 인물들이 영화 속 현재에서 느끼는 감정을 실어내보내는 역할을 맡는다. 드디어 다시 소통하게 된 미수와 현우의 감정을 ‘영원한 사랑’으로 표현한 연출이 대표적이다. 설렘을 증폭시키기에는 아쉬움이 없었다. 

<유열의 음악앨범>에는 ‘그땐 그랬지’란 태도도 없지만, ‘그때가 좋았지’란 입장도 없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인생에서 20대를 보낸 그때는 가장 아프고 추웠던 시절이다. 현우는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에 죄책감을 갖고 있고, 그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괴로워 한다. 미수는 자신의 인생이 너무 초라해 보여서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이들이 위치해 있는 공간에도 애써 로맨틱하려는 의도가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낡고 허름한 빵집은 그 자체로 따뜻한 공기를 뿜지만 이후 현우와 미수가 사는 공간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현우는 컨테이너로 가득한 곳에서 무거운 짐들을 옮기며 살고, 미수는 제본공장 바로 옆에 붙은 사무실에서 소음을 견디며 일한다. 녹슨 철제 컨테이너와 기계, 소음으로 가득한 이 풍경들은 이 영화가 그 시대를 현재로 사는 인물들의 이야기라는 점을 강하게 드러낸다. 
 

과거를 아름답게 추억하지 않는 <유열의 음악앨범>이 그럼에도 1990년대의 시간을 필요로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영화가 필요로 한 건, 쉽게 소통할 수 없어서 우연에 기댈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더 절실해질 수 밖에 없는 시대다. 이야기는 두 남녀가 만났다가 멀어지고, 또 우연히 다시 만나고, 또 다시 멀어지는 걸 반복하지만 이런 흐름이 긴장감을 일으키는 이유도 시대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현우가 차를 타고 가버리는 미수를 향해 죽을 힘을 다해 뛰는 장면은 그 중에서도 감정의 밀도가 높다. 지금 놓치면 또 언제 진심을 전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 <유열의 음악앨범>은 이 달리기가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핸드폰도 없고, 당연히 스마트폰도 없고, 그래서 소셜미디어도 없는 시대의 남녀는 서로가 어디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헤매고 뛰어다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멜로영화의 정수는, 키스보다 달리기에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달릴 필요가 없는 시대. <유열의 음악앨범>의 감정적 울림이 클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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