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 정윤석, 2017

by.박수민(영화감독) 2019-08-23조회 5,387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 스틸

한국사회의 오랜 병(病)은 어떤 담론과 쟁점마다 반드시 붙는 이분법의 논리다. 우파가 아니면 좌파, 보수가 아니면 진보, 갑이 아니면 을이라는 식이다. 각자의 진영과 입장을 나누는 것까진 괜찮다. 문제는 이게 피아식별로서 선과 악, 옳고 그름으로까지 갈라버린다는 점이다. 단순하고 무식한, 야만적인 흑백논리가 되고 마는 것이다. 나와 의견이 다르면 너는 적이고 중간은 없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중간에 서려는 사람들은 회색분자로 불린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첨예한 정치적 대립에서 중립을 지켰던 자들에게 준비되어있다는 저주가 덤으로 붙는다. 회색분자는 그렇게 매도당하는 만큼은 기회주의자이며 비겁한 게 사실이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자기 자신도 모를 애매한 예술을 하는 예술가들이 회색의 경계에서 서성인다. 그런데 어떤 회색인들은 매도당하느니 먼저 위악적으로 양쪽을 다 냉소하고 조롱한다.

‘밤섬해적단’은 베이스와 보컬 장성건과 드럼 권용만으로 이루어졌다가 해체한 인디 밴드의 이름이고 ‘서울불바다’는 그들이 2010년에 냈던 앨범의 제목이다. 나는 예전에 이 앨범을 인터넷에서 다운받았다. 이 사실을 떳떳이 밝힐 수 있는 건 밴드의 리더 권용만이 ‘We Are Internet Friends’라는 이름의 블로그에 자신들의 앨범을 직접, 공식적으로, 무료로 올렸기 때문이다. 52분 러닝타임동안 총 42트랙이 존재하는 이 앨범에 대하여 음악적으로 논할 수 있는 능력은 내게 없다. 고전에 오를 명반인가? 분명히 아닐 것이다. 혹시 역사에 남을까? 의외로 그럴지 모른다. 어떤 해프닝과 함께 의도치 않은 가치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앨범을 정치적으로 논할 의욕 역시 내게는 없다. 상식과 교양을 지닌 멀쩡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서울불바다’를 접하고 낄낄 웃을 것이다. 이 앨범의 구호에 적극 동조하거나 혹은 분노한다면 그는 제정신이 아니다. 밤섬해적단과 서울불바다는 21세기 초반의 한국을 사는 20대 청년들의 시니컬한 유희(遊戲)에 지나지 않았다. 이 놀이를 끝내 정치적 사건으로 만든 것은 국가였다.
 

2012년, 이들의 레이블 ‘비싼트로피’의 대표 박정근이 북한 매체의 글을 리트윗하여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자, 밴드의 음악까지 덩달아 도마에 오른다. 전작 <논픽션 다이어리>(2013)에서 지존파 사건이 일어난 90년대가 예견한 자본주의 한국 사회의 윤리적 균열과 사법 집행 과정을 통해 국가 권력의 모순점을 다루었던 정윤석은 이 다큐멘터리에서 2000년대 청년들의 ‘병맛’ 유희에조차 드리우는 권력의 그림자를 직시한다. 의도적인 키치 스타일로 넣은 자막대로 ‘이 영화는 대한민국 국가보안법 제7조(찬양 및 고무)를 윤리적으로 소비한다’. 그로울링과 샤우팅으로 일관하여 잘 들리지 않는 가사를 정윤석은 친절히 자막으로 띄워 관객이 그것을 읽게 만든다. 이 ‘위험한’ 가사들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일까? 권용만의 직설적이지만 지극히 일차원적인 수준의 반어법으로 점철된 문장들은 고도의 문학적, 수사학적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걸 당연히 풍자와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쪽이 오히려 이상한 게 아닐까? 그러나 권력은 아이러니와 레토릭 따위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 없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섭게 물었던 것이다. 너희는 정말로 북한을 찬양하는 거 아니야? 정치권력이 규정한 경계를 널뛰며 놀다 소위 ‘시범 케이스’로 걸린 회색인들이 이제 와서 정치적 의도는 없었노라고 변명하기 어려워진 상황이 펼쳐지자 피식거리며 다큐를 보던 관객의 마음은 어느새 무거워진다. 정치적 스탠스가 어디냐고 묻는 질문에 웅얼거리는 권용만의 모습은 한국사회 어디서나 보는 20대 청년 너드에 지나지 않는데, 종북 좌파는 아니니? 멀쩡한 부모님 아래 좋은 학교 다니면서 왜? 네 정체가 무엇인지 밝히길 요구하는 질문이 계속 이어진다.  
 

잊히지 않는 두 가지 장면이 있다. 하나는 권용만의 노래 가사와 시에 문학적인 가치가 있는지를 논하는 장면에서 인터뷰이의 뒤편 책장에 꽂혀있던 ‘김수영 육필원고 시집’이었다. 김수영 시인이 썼던 시 ‘김일성 만세’(1960)가 떠올랐다. 표현의 자유를 대하는 국가와 사회의 수준은 시인이 살았던 시절에서 과연 얼마나 발전했을까? 다른 하나는 5차 공판에 권용만이 증인으로 출석하여 ‘김정일 만세’ 등 자신들이 만든 노래의 의미, 작사한 문장이 비판하고 풍자하는 것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한 이후에 박정근이 보였던 눈물이다. 그의 변호를 위해 예술가가 자기 예술에 대해 일일이 해명하고, 권력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이렇다고 낱낱이 밝히게 된 것에 그는 슬퍼한다. 왜 이러고 놀았는지를 설명하고 나자, 유희는 더 이상 유희가 아니게 되어버렸다. 레이블 대표가 소속 아티스트에게 미안하여 우는, 어쩐지 짠한 장면이었다.
 

박정근은 결국 2014년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 받았고, 밤섬해적단은 2016년 밴드를 공식적으로 해체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 어째 아주 옛날 일처럼 느껴진다. 국가 권력이 반어법을 모르는 척 하던 시대를 지나, 표현의 자유는 이상한 방향으로 향했다. 2019년, 지금은 대중부터가 어떤 표현의 맥락이나 뉘앙스를 전혀 고심하지 않는다. 비판과 풍자의 유희는 끊임없이 미워할 대상을 찾는 혐오로 변질되었다. 유튜브에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만인의 만인을 향한 헛소리를 내질러 ‘좋아요’를 받고 구독자를 모아 광고를 걸고 돈을 번다. 나는 밤섬해적단이 왜 돌아오지 않는지 알 것 같다. 그들 밴드는 이 시대에서 재결성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노래하기에 이 세상은 진짜 터무니없이 웃겨졌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다. 이 다큐멘터리는 좋은 음악영화로서의 요소도 충분히 가졌다. 어설픈 밴드나 아티스트가 공연을 이어가다 예술적 성취나 상업적 성공이나 이도저도 아닌 사건 어느 쪽으로든 그의 음악이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이상한 정점과 한계에 도달하는 과정이 담겼다면 훌륭한 음악영화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곡 하나면 완성이다. <스쿨 오브 락>(리차드 링클래이터, 2003)의 아마추어리즘과 <커미트먼트>(알란 파커, 1991)의 흥망성쇠와 견줄만한 밴드의 사연과 정신이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에는 기록되어 있다. 웃기고 슬프지만, 분명히 한 때의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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