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보희와 녹양 안주영, 2018

by.박아녜스(영화칼럼니스트) 2019-07-25조회 5,186
보희와 녹양 스틸
허리께까지 물에 잠긴 남자의 뒷모습. 그는 곧 물속으로 가라앉고 그 자리엔 파문만 일렁인다. 

<보희와 녹양>(안주영, 2018)은 이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는 곧 소년 보희(안지호)와 소녀 녹양(김주아)이 극장에서 보고 있는 영화의 한 장면인 것으로 드러난다. 객석에 불이 들어오고 그때야 잠에서 깬 녹양이 묻는다. “그래서 영화 끝에 어떻게 되는데?” 보희는 어디까지 봤느냐고 되묻는다. “주인공 남자애가 갑자기 죽잖아.” 위의 장면은 아마 이 순간인 듯하다. 강물 속으로 사라진 소년의 풍경. 

<보희와 녹양>은 죽은 줄 알았던 아빠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보희가 단짝 녹양과 함께 아빠를 찾아가는 길을 담은 로드무비다. 아빠의 행방을 쫓는 둘의 걸음은 서울 구석구석으로 이어지고, 행적을 수소문하는 중에 둘은 다양한 사람과 마주한다. <보희와 녹양>을 ‘아빠를 찾아 나선 여정을 통해 성장하는 소년의 이야기’라 정리한다면, 이 영화는 언뜻 보통의 성장영화 혹은 흔히 봐온 드라마와 다름없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보희와 녹양>은 오히려 조용하게 통념을 뒤집는 영화에 가깝다. 
 
우선 <보희와 녹양>은 캐릭터 성별에서 스테레오타입을 벗어난다. 이름 때문에 ‘이보지’란 별명을 갖게 된 보희는 영화를 보고 눈물을 곧잘 흘리는 감수성 예민한 소년이다. 반면 일상의 순간들을 영상으로 담아내는 게 취미인 녹양은 어떤 순간이건 스스럼없이 카메라를 들이미는 씩씩하고 담대한 소녀다. 둘은 모두 한부모를 두고 있는데(녹양은 아빠, 할머니와 살고 있다. 엄마는 녹양을 낳다 세상을 떠났다), 여타 드라마가 재현하는 한부모 가정의 아이들처럼 불행에 휩싸여 있지 않다. 또 일찍 세상의 강퍅함에 눈뜬 아이 특유의 애어른 같은 면모도 없다. 그저 열네 살만큼의 활기를 품고 있고, 또 그만큼의 사춘기 혼란을 겪는다. 둘을 둘러싼 인물들도 전형성에서 조금씩 벗어나 있다. 특히 보희의 엄마(신동미)나 녹양의 할머니(이재희)는 ‘돌봄과 보호’의 역할을 하는 여성 캐릭터에만 머물지 않는다. 둘 다 자기 주장이 강한 여성으로 묘사된다. 
 
<보희와 녹양>은 여느 로드무비처럼 극적인 경험에 방점을 두지도 않는다. 영화는 아빠를 찾는 과정에서 만나는 인물에 더 큰 관심을 갖는데, 이들은 대체로 친절하고 다감하다. 특히 보희가 배다른 누나라고 착각한 사촌 남희(김소라)의 남자친구인 성욱(서현우)은 보희에게 형 혹은 친구 같은 존재가 된다. 영화는 보희와 녹양의 시간만큼 보희와 성욱의 시간에 집중하지만 성욱을 굳이 아빠의 빈자리를 대체하는 이로 적극 묘사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는 영화가 ‘아빠의 부재’를 비정상적인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기에 가능한 선택 같아 보인다. 보희에게 아빠의 부재는 꼭 채워 넣어야만 할 공백이 아니다. 대신 그가 얻고 싶은 답은 ‘부재의 이유’고, 영화 말미에 보희는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재미있는 건 그다음이다. 아빠가 살아 있음을 눈으로 확인하고, 그럼에도 자신을 떠난 이유를 짐작하게 된 보희는 다음 순간 한강을 내려다보고 서 있다. 그리고 조용히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장면이 영화 시작에 나온 풍경과 똑같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영화 초반 녹양의 대사처럼 주인공 남자애(보희)는 죽게 될까? 아빠가 자신과 엄마를 떠난 이유를 알게 된 후 자살을 결심한 걸까? 궁금증은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화면이 바뀌는 순간 우리는 보희가 한강 가운데로 헤엄쳐 들어가 강물에 몸을 맡긴 채 평온하게 쉬고 있는 걸 보게 된다. 

엄마와 둘이 나란히 찍힌 사진의 접힌 뒷면에 아빠의 모습이 숨어 있었던 것처럼, 어떤 사실은 이렇게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가’를 정하는 것에 따라 뜻이 달라진다. 혹은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따라 맥락이 달라진다. 녹양은 생일을 맞은 보희에게 그간 찍은 영상을 선물로 건네는데, 영상 속 대사를 모아 보면 다음과 같다. “안녕, 이보희. 내가 돈이 없어서 뭐 줄 건 없고, 재밌게 봐라. 생일 축하해.” “안녕, 보희야. 네 이름 들었을 때 내가 너무 웃겨가지고.” “보희? 보희가 누구야?” “야, 이보지.” “여자 이름도 아니고.” “생긴 건 좀 그래, 그런데.” “요리를 잘해.” “그날, 밥 먹으면서 엄마가 했던 말.” “엄마가 뻥치신 거야?” “그런 가봐.” “아니, 할머니. 내 친구 있잖아.” “내가 어릴 때 너 되게 많이 괴롭혔는데.” “많이 미안한 거 같아.” “아빠 찾는다고.” “찾아와 줘서 되게 고마웠고.” “너무 상처 안 받았으면 좋겠어.” “보희.” “우리 보희 없으면 안 되는 거.” “독특한 새끼.” “쓸데없는 짓거리 하지 말고 공부나 해.” “어쩌면 진짜 어쩌면.” “뭔데.” “아빠가 살아 있을 수도 있을 거 같아.” “안녕하세요. 저는 이보희입니다.” “야, 똑바로 좀 해봐.” “됐어. 치워. 이런 거 안 할래. 가자.” 이 말들은 녹양과 보희, 녹양 할머니와 보희 엄마, 남희와 성욱의 말을 뒤섞은 후 짜깁기한 것인데, 교묘하게 앞뒤의 말들이 연결되며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보희와 녹양은 ‘잃어버린 아빠 찾기’의 여행이 마무리된 후 세상의 많은 일들도 이렇게 작동함을 알게 된다. 어디까지 볼 것인지, 어떻게 볼 것인지, 어떤 말을 새길 것인지, 어떤 마음으로 바라볼 것인지에 따라 많은 관계와 많은 일들이 달리 보인다는 것을 말이다. <보희와 녹양>은 수많은 한국영화 속 청소년이 경험하듯, 혹독한 시련을 온몸으로 통과해야만 제대로 된 성장담이 쓰여지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따뜻하고 친절한, 호기심 가득하고 웃음 풍성한 성장담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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