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벌새 김보라, 2018

by.정지혜(영화평론가) 2019-04-09조회 8,235
벌새 스틸

이상한 시작이다. 은희(박지후)가 아파트 초인종을 여러 차례 누른다. 아무런 대답이 없다. 엄마를 부르며 문을 열어달라고, 내가 왔다고 성을 내며 소리쳐보지만 문은 도무지 열리지 않는다. 그제야 은희는 문의 호수를 확인한다. 902호. 다음 장면. 은희가 한 층을 올라간다. 다른 문의 초인종을 누른다. 이번엔 과연 문이 열릴까. 잠깐의 긴장. 이내 엄마(이승연)가 문을 연다. 심부름 다녀온 은희를 덤덤히 맞는 엄마와 얼얼한 표정의 은희. 1002호의 문이 열렸다. 그렇다. 은희의 착오였다. 그런데 이 착오는 어딘지 이상하다. 문이 열리지 않았을 때 은희가 보인 반응과 말 때문이다. 마치 이런 일이 전에도 몇 차례 있었다는 듯,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은희는 화를 내고 악을 쓴다. ‘나, 여기, 있다’는 강렬한 외침처럼. 안타깝지만 은희의 외침을 듣는 이는 당연히 없다. 애초부터 잘못된 문을 두드렸으니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은희의 성과 화가 지난 유사한 경험 속에서 차곡차곡 쌓인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무리 수신인을 바로 써도 응답을 받을 수 없었다면? 그렇다면 은희의 성은 은희의 잘못이나 착오가 아니라 오랫동안 대답 없는 무응답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말해보자. 김보라의 <벌새>(2018)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무덤덤함에 질식할 것 같은 열다섯 은희의 어느 한 해의 이야기라고.
 

1994년 서울. 방앗간 집 삼 남매 중 막내인 은희. 부모는 사는 게 바쁘고 아들 대훈(손상연)에게 거는 기대 같은 걸 두 딸 수희(박수연)와 은희에겐 두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서로에게 무관심하거나 균형을 잃은 관심을 보이거나 때때로 폭력을 쓴다. 툭하면 은희를 때리는 대훈, 자신의 세계조차 감당이 되지 않아 은희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수희. 은희에게는 부모와 남매가 있다지만 그들 모두 은희를 알지는 못한다. <벌새>는 1994년 서울의 대치동에 사는 5인 가족의 미시사를 하나씩 풀어나간다. 곳곳에 위태로움이 웅숭그리고 있다. 가족과 더불어 중학교 2학년 은희의 또래 세계는 <벌새>의 또 하나의 작은 세계다. 단짝 친구 지숙(박서윤)의 당혹스러운 배신, 은희가 좋아했던 지완(정윤서)과 은희를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유리(설혜인)와의 이해할 수 없는 단절. 허탈과 실망, 당혹과 화, 슬픔과 먹먹함이 은희를 덮친다. <벌새>는 은희가 부모와 남매, 사랑과 우정 저마다의 관계에서 품었던 기대와 그 기대가 자꾸만 미끄러지고 좌절돼가는 걸 섬세하게 그린다. 시대의 묘사는 기본이고 감정의 세공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큰 강점이다. 그 세밀함은 때론 잔인할 정도로 예리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은희의 부모는 수희를 혼내다 부부 싸움을 하게 된다. 엄마는 유리 전등으로 아빠를 치고 마는데 그 바람에 아빠는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린다. 경악스러운 일이지만 이내 부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후 영화가 한참 진행되고 모두가 이 에피소드를 까마득히 잊었을 때쯤 불쑥 그날의 흔적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 우연히도 은희는 거실 소파 밑에서 그때 깨진 유리 파편을 발견한다. 이때의 은희는 더없이 큰 상실감에 빠져 있었다. 가족의 삶에 매복해 있던 균열의 흔적이 부지불식간에 드러나고 은희의 슬픔을 배가시켜 버린다. 섬세하고 또 치밀하게도 <벌새>는 폭력과 상실의 슬픔을 단박에 꿰어낸다.

그리고 <벌새>는 강박적이라고 말하고 싶어질 정도로 반복적이고 끈질기게 은희에게 상실감을 안긴다. 앞서 말한 관계에서뿐 아니라 은희는 외삼촌의 부고를 접하게 되고, 느닷없이 침샘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는다. 세상에는 살던 집을 잃어야 하는 철거민도 있다는 걸 은희는 처음 알게 된다. 그런데 은희가 겪는 상실, 상실과 관련된 상황은 이상하리만치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아픈 얼굴을 하고 온다. 죽기 전 은희의 엄마를 찾아왔던 외삼촌은 어딘가 정신이 반쯤 나간 듯 얼이 빠져 보였고 은희가 아무리 불러도 듣지 못한 체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걸어가던 은희 엄마도 그렇다. 말을 잃은 듯한 수희의 얼굴도 기억난다. 그리고 영지(김새벽)에게서도 그런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은희의 한문 학원 선생인 영지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은희의 외침에 응답한 사람이다. 무책임하고 무덤덤하며 무반응의 세계였던 곳에서 숨이 막혀오던 은희에게 영지는 숨 쉴 틈이 돼준다. 마음을 아는 게 진짜 아는 사이라면 은희가 정말 아는 사람은 영지뿐이다. 하지만 <벌새>는 은희에게 찾아온 이 귀한 응답의 시간을 오래 두지 않는다. 그리고 끝내 <벌새>는 또 한 번의 상실, 1994년 한국 사회의 비극적인 사건 앞으로 은희를 데려간다. 그런데 <벌새>를 생각할 때면 자꾸만 이 영화적 선택이 고민스러워지는 것이다. 은희가 내내 감당한 지속된 상실이 거대한 비극과 만나고 이 비극은 은희에게서 가장 아름다운 한때와의 작별을 고하게 한다. 이때 은희와 은희를 바라보는 관객의 감정적 고조는 자연스러울지 몰라도 은희의 계속돼온 상실과 사회적 비극을 마주치게끔 한 선택은 석연치 않다. 더욱이 은희는 사고 현장을 찾아가고 눈앞에 드러난 참혹한 사고의 실체를 바라본다. 상실을 온전히 떠안게 된 은희에게 그것은 가능한 응시의 방식이었을까. 그런 질문을 자꾸 곱씹게 된다. 

‘어떻게 사는 게 맞을까.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고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영지가 은희에게 쓴 편지의 말처럼 세상의 신기와 아름다움을 말할 수 있다면. 세상의 신기와 아름다움을 긍정할 수 있다면. 하지만 이제 또다시 혼자가 된 은희를 보면서 아직 그 바람의 응답은 도착하지 않았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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