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88/18 이태웅, 2018

by.김성훈(씨네21 기자) 2019-04-17조회 3,186
88/18 스틸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 1983년 가수 정수라가 부른 노래 <아! 대한민국>의 가사와 달리 1980년대 서울은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롭진 않았다. 전두환 군부 독재 정권이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단행했고, 하루 뒤인 5월 18일 광주 시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서울의 봄은 오래 가지 못했다. 5공화국은 ‘새 봄이 왔네, 새 시대 왔네’라는 캐치 프레이즈를 내걸고 눈 가리고 아웅하기 바빴지만, 새 봄도 새 시대도 오지 않았다. 그들은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킬 구실이 필요했다. 그렇게 꺼내든 카드가 88 서울 올림픽 유치이다. 
 
이태웅 KBS 스포츠국 PD가 연출한 <88/18>(2018)은 지난해 서울 올림픽 3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다큐멘터리다. 공영 방송이 만든 다큐멘터리라고 해서 서울 올핌픽의 치적을 칭송하는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드라마, 개그 프로그램, 뉴스, 인터뷰 등 당시 방영된 여러 영상 클립들을 재구성해 올림픽이 부여한 시대적 과제인 변화를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는 푸티지 다큐멘터리다. 당시 한국 사회는 올림픽을 앞두고 외국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도심 가시권을 정비했다. 공중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바꾼 뒤 ‘외국인 전용 화장실’이라고 구역을 따로 정한 결정이며, 방송 기자가 뉴스에 출연해 “카메라가 오니까 (쓰레기를) 치우느라 바쁘신 것 같은데 좀 (깨끗하게) 치워주세요”라고 시민에게 말하는 장면은 ‘웃프’다. 올림픽을 미국과 소련의 대립에서 기인한 냉전 이데올로기 각축장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었다. 
 

또, “정권 유착은 하나의 필요조건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충분조건은 절대로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1980년대 인기 코미디 프로그램인 <유머1번지>에서 선보인 코너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에서 회장(김형곤)이 강조한 말대로 올림픽은 정치와 재벌의 유착이 얼마나 끈끈하게 이루어졌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이벤트이기도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당시 대한수영연맹 회장을,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은 대한 레슬링협회장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복싱협회 회장을 맡았다. 5공화국 실세 중 하나인 허화평 당시 대통령 정무수석이 “그거 (재벌이 스포츠를) 안 하면 세금조사 안 하겠습니까. 농담입니다. 하하하”하고 말하는 장면은 올림픽이 정권과 재벌의 연결고리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다양한 매체에서 선별된 영상들이 서울올림픽을 앞둔 당시 한국사회를 다양한 시각으로 풍자한다는 점에서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한국 씨름 현대사를 2부작으로 구성한 다큐멘터리 <천하장사 만만세>, 홍명보 감독이 이끈 런던 올림픽 축구 대표팀의 일거수 일투족을 생생하게 담아낸 <공간과 압박>과 <선택> 등 이태웅 PD가 만든 많은 스포츠 다큐멘터리가 그렇듯이 <88/18> 또한 내래이션이 없고, 김기조 디자이너가 작업한 단순한 폰트의 자막이 꼭 필요할 때만 쓰인다. 그것이 내레이션과 자막이 홍수처럼 범람하는 요즘의 방송 다큐멘터리와 사뭇 다르다. 또, DJ 소울 스케이프의 음악은 각기 다른 매체에서 골라낸 영상들을 하나로 연결해 주는 접착제 같은 역할을 한다. <88/18>은 극장용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공영방송이 가지고 있는 아카이브를 적재적소에 활용해 서울 올림픽의 이면을 때로는 날카롭게, 또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들추어낸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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