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불러 닿는 시간 윤희에게, 2019

by.조혜영(영화평론가) 2022-01-14조회 3,119

<윤희에게>는 서간체 형식의 영화다. 오타루에 사는 수의사 쥰(나카무라 요코)의 고모 마사코(키노 하나)는 조카가 부치지 못하고 책상에 놓아둔 편지를 몰래 우체통에 넣어준다. 아마도 그 편지는 오래 그 책상 위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고모는 ‘Yun Hee’라는 수신자의 이름을 쥰을 대신해 불러준다. 그리고 그 편지는 윤희(김희애)의 딸 새봄(김소혜)이 제일 먼저 발견하게 된다. 쥰과 윤희의 호명과 응답은 각자의 자리에서 반복해 불리고 쓰였지만 오랫동안 상대방에게 가닿을 수 없는 환경에 있었다. 마사코와 새봄은 하염없이 눈이 내리는 오타루의 겨울에 20년 넘게 만나지 못하던 쥰과 윤희가 재회할 수 있는 세계의 조건을 만들어 간다.

<윤희에게>의 눈 내리는 하얀 오타루, 가닿지 못한 안부 묻기, 부치지 못하거나 잘못 도착한 편지, 필름사진, 상실의 감각, 오래 간직한 사랑은 어쩔 수 없이 <러브 레터>(이와이 슌지, 1999)의 노스텔지어를 떠올리게 한다. 상실한 것으로 회귀하려는 운동은 과거에의 고착과 언뜻 구분되지 않을 수 있다. <윤희에게>는 분명 오래 전에 떠나보내야 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다. 그러나 <윤희에게>는 비록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서로의 편지에 응답하면서 쥰과 윤희 모두가 과거에 머물지 않고 성장의 한 걸음을 내딛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보내고 받는 것에 시차가 발생하거나 어긋날 확률이 높은 편지, 촬영 속도가 늦고 인화의 과정이 필요한 오래된 필름 카메라, 오해가 발생하거나 이해가 늦을 수 있는 일본어와 한국어의 번역과정은 단순히 아날로그적인 노스텔지어의 감성을 부추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쥰과 윤희는 어린 시절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가족에 의해 강제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가족의 폭력은 사랑의 실패를 넘어서 자신의 욕망과 정체성을 부인당하는 삶을 살게 했다. 윤희는 가족에게 ‘쥰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한 이후 정신병원에 갇히고 이른 나이에 오빠 친구와 반강제로 결혼한다. 사진 찍기를 좋아했지만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대학도 가지 못한 윤희에게 엄마는 카메라를 선물한다. 새봄은 그러한 엄마의 서사를 모른 채 엄마의 오래된 필름 카메라로 풍경과 사물 사진을 찍는다. 카메라는 뒤늦게 새봄에게서 제 정체성을 찾는다. 이렇게 뒤늦은 시차의 발생이야말로 한국의 퀴어한 시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윤희는 자신의 욕망을 부인당한 후 자신을 고립시키면서 주변 사람들도 외롭게 만든다. 그는 소통의 가능성을 닫는다. 쥰은 윤희에게 쓴 편지를 매번 부치지 못하기 때문에 편지의 시작을 동일한 내용으로 반복할 수밖에 없다. 윤희는 자신의 세계 내에 누구도 들이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움을 온 몸으로 외치고, 쥰은 성적 정체성과 한국·일본 혼혈이라는 국적 정체성을 가능한 숨기며 안으로 파고든다. 둘의 시간은 제자리에서 맴돈다. 부인당한 욕망과 정체성은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다. 윤희의 아버지와 오빠는 윤희의 삶에 폭력적으로 개입하고 통제하려 들고 쥰의 아버지는 냉담함으로 일관한다.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선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 옛 말처럼 ‘두 사람이 만나려면 공동체의 지지와 포용적 환경이 필요하다.’ 로맨스는 개인적이거나 이자적인 것이 아니다. 윤희와 쥰은 가부장 남성들 때문에 헤어졌지만, 새봄과 마사코라는 또 다른 가족이 꾸며준 조건 속에서 재회한다. 윤희와 쥰은 가부장들과 결별을 선언하고 나서야 새로 시작할 기회를 얻는다. 폭력적 상황은 어긋나고 도달하지 못한 소통과 시차를 만든다. 하지만 마사코와 새봄이 만든 삐끗한 송수신과 시차가 또한 둘을 재회하게 만든다. 마사코는 쥰의 편지를 대신해 부치고 새봄은 그 편지를 받고 오타루로 엄마를 데리고 여행을 온다.
  
영화사적으로 보면 이 영화는 제작 및 개봉 기록이 남아있는 한국 최초의 레즈비언 영화라 알려진 <질투>(한형모, 1960)의 한참 늦은 응답 혹은 후일담처럼 여겨진다. 현재 <질투>는 필름 프린트는 소실되었고 시나리오만 확인 가능하다. <질투>에서 동성애자인 재순(문정숙)은 의붓 여동생 금이(전계현)를 좋아하고 둘은 실제로 연애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금이가 남자를 만난 후 재순의 욕망은 금이를 포함해 모두에게 부정 당한다. 재순의 욕망은 한국 전쟁 중 당한 성폭행으로 인한 남성혐오로 인한 부작용으로 취급되고 결국 정신병원에 갇혀 교정치료를 받는다. 당당하고 논리적으로 제 할 말 다하던 재순은 결말 장면에서 병원에서 나오며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꿈에서 깬 것 같다”고 말한다. 기이할 정도로 급작스럽고 밝게 묘사되는 이 장면에서 텅 빈 인형처럼 묘사되는 재순은 거의 공포영화의 주인공 같다. <윤희에게>에서 윤희는 재순처럼 정신병원에 가지만 살아남는다. 그리고 다른 가족들의 도움으로 쥰을 재회한다.

한편, 2000년대 <연애소설>(이한, 2002), <주홍글씨>(변혁, 2004). <끝과 시작>(민규동, 2009) 같은 영화들에서 여성 동성애 로맨스는 이성애 로맨스에 앞선, 10대의 원초적이고 순수했던 과거의 기억으로 고착화 된다. 그러나 결국 동성애 로맨스는 이성애 로맨스에 포획되고 봉합되며 과거의 것으로 영원히 남는다. <윤희에게>는 과거에서 맴도는 시간에서 벗어나 그 다음을 상상한다는 점에서 이전 영화들과 다르다.
 

이 영화 전체의 형식이기도 한 편지는 이름을 부르면서 시작한다. ‘윤희에게’ ‘쥰에게’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중요하다. 임대형 감독은 한 시상식에서 이 영화는 분명히 ‘퀴어영화’라고 호명하기도 했다. 하나의 단일하고 고정된 정체성을 가정하는 것도 문제지만, 이름 부르기를 두려워하고 뭉개는 것 또한 소수자들을 배제하는 방법이 될수 있다. 차별금지법의 제정조건으로 자꾸 ‘성소수자’라는 이름을 빼려는 시도들처럼 말이다. 늦었지만 이름을 부르고 그에 응답해야 한다. 새로운 퀴어 시간성을 만들어야 한다. 한국 영화사에서 퀴어영화라 불릴 수 있는 영화들은 많지 않다(물론 ‘퀴어영화’라는 범주는 여전히 많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한국영화에서 작품성과 대중성을 고루 갖춘 퀴어영화가 나오려면, 두 사람이 만나기 위해서 공동체가 노력하고 바뀌어야 했던 것처럼 수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차별금지법도 그러한 조건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 현실과 영화는 거리가 있지만 또한 서로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영화는 당장 가시적으로 현실에 보이는 것 이상을 표현할 수 있다. 영화는 잠재된 현실, 보이지 않고 가려진 현실, 환상성, 꿈을 그려낼 수 있다. 쥰과 윤희가 각자의 꿈에서 잊지 않고 만나왔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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