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괴수, 1967의 '트위스트' 용가리 대괴수 용가리, 1967

by.이영재(영화연구가) 2021-12-02조회 5,002

<대괴수 용가리>(1967)는 한국영화에서 거의 처음으로 우주적 시점이라고 할만한 것을 보여준다(정확히 말하자면 <대괴수 용가리>가 등장하던 그해 동시도착한 <우주괴인 왕마귀>와 함께). 검은 화면에 반짝이는 별, 카메라의 긴 패닝, 이윽고 보이는 푸른 별 지구. 이곳은 우주이다. 곧이어 정체불명의 대규모 폭발을 조사하기 위해 신혼여행지에서 차출된 우주비행사 광남이 지구에 대한 조망 속에서 사건의 발생 장소(핵실험이 일어난 장소)를 정확히 찾아내고, 버섯구름과 그것이 불러일으킨 거대한 지면의 균열을 목격한다. 한편 이 균열에서 시작된 움직이는 지진, 괴지진의 발생지점과 이동경로는 서울에 차려진 괴지진대책본부의 대륙 지도에 투명하게 드러난다(이 지도는 한쪽 면을 가득 채운 유리에 그려져 있다). 중국 서북부(영화에 명시되기는 오비리아라는 가상의 대륙)에서 발생한 괴지진은 황해도를 지나 시시각각 남하해오고, 휴전선 부근에서 솟아나 판문점을 부순다. 괴지진의 정체가 밝혀진다. 용가리의 현현. 이윽고 용가리는 인왕산에 우뚝 솟아 전모를 드러내고 중앙청과 서울시민회관, 서울시청과 남산에 이르는 서울의 중심부를 초토화시키고 급기야 한강다리를 파괴한다.

<대괴수 용가리>의 이 지정학적 상상력은 이 영화를 한국전쟁과 그 결과 형성된 이 분단국가의 강렬한 냉전적 상상력의 우화로서 읽게 만들기에 충분해 보인다. “6.25 전쟁 때 북한군 침공의 육로 코스 그대로”1)를 밟고 있는 용가리는 이를테면 “괴수 김일성”과 유사해 보인다.2) 1967년의 시점에 중국 서북부에서(이 지역은 중국이 1964년과 67년에 원폭과 수폭실험을 행하고 있는 장소이다) 발생하여 거듭되는 남하를 거쳐 판문점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서울을 파괴하는 괴수라니! 그런데 이 괴수는 한국영화사 안에서 예외적 형상이지만, 피폭괴수물이라고 할 수 있을 일종의 ‘공통’ 장르의 소산이기도 하다. 만약 이 공통 장르라는 관점에서 이 영화를 본다면, 용가리라는 형상이 지닌 공통성과 특수성은 무엇이며 그것은 각각 어떤 것을 의미하는 걸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대괴수 용가리>는 동시기의 일본 괴수영화 <대괴수 가메라>(1965)로부터 포맷과 기술을 빌려왔다. <대괴수 가메라>는 당시 도호의 고지라 시리즈에 대항하여 다이에이가 시도했던 괴수영화였다. 고지라 시리즈의 1960년대적 전회에 발맞춰 보다 아동친화적인 성격을 띄고 있던 이 시리즈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1960년대 중후반 다이에이의 달러박스로 기능하였다. 오해하지 말 것. 나는 지금 <대괴수 용가리>가 일본 괴수영화의 일종의 아류작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영향관계가 보여주는 바는 피폭괴수물이라는 장르에 내재된 공통성에 다름 아니다. 참고로 말하자면 <대괴수 용가리>는 당시 일반적인 한국영화보다 훨씬 고가로 해외시장에 팔렸으며, 일본을 거쳐 이런 류의 B급 영화들을 만들어내고 배급한 대표적인 프로덕션 중 하나였던 AIP(American International Pictures) 배급으로 1969년이라는 빠른 시기에 미국의 지역 방송국 채널에서 방영되었다. Yongary, Monster from the Deep이라는 제목으로 공개된 이 영어 버전은 현재 남아있는 <대괴수 용가리>의 유일한 완전판이기도 하다.
 

과연, 1950, 60년대 미국과 일본의 흥행장에는 방사능 피폭괴수라고 할만한 것들이 범람하고 있었다. 이 영화들은 지독히도 닮은 패턴을 고집하는데 시작은 항상 동일하다. 지구 어디선가 핵실험이 있고 방사능에 피폭된 거대 생명체가 등장한다. 이를테면 거대한 개미떼(<뎀! Them!>(1954)), 거대한 독거미(<타란튤라 Tarantula>(1955)), 거대한 문어(<놈은 바닷속으로부터 왔다 It Came from beneath the Sea>), 거대한 메뚜기(<비기닝 오브 디 엔드 Beginning of the End>(1957)), 거대한 파충류 등등. 이 괴수들은 한결같이 도시로 향하고, 그들의 습격으로 도시는 초토화된다. 이런 식의 피폭 괴수영화의 시작은 1953년 레이 해리하우젠의 스톱모션으로 완성된 거대 공룡 리도사우르스가 등장하는 <심해로부터 온 괴물 The Beast From 20000 Fathoms>이었다. 이 영화의 성공은 곧 무수한 피폭 뮤턴트들을 양산해내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괴수들 중 가장 성공적이고 지속적이며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어낸 것은 일본의 <고지라 ゴジラ>(1954)였다. 2016년의 <신 고지라>에 이르기까지 28편의 시리즈를 낳은 이 영화는 모스라, 가메라, 라돈, 킹기도라 등의 수많은 일본산 괴수들이 출몰하게 될 특촬영화라는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냈다. <고지라>의 성공은 일본 내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 영화의 영어 편집 버전은 미국과 유럽에서 또한 흥행에 성공했으며, 그 여파는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고지라> 이후 일본 괴수영화는 미국과 유럽에서 가장 잘 팔리는 일본영화가 되었고, 고지라는 서구에서 성공한 일본산 서브컬처의 첫 번째 ‘캐릭터’가 되었다.

이 장르의 역사를 상기해보건데, <대괴수 용가리>라는 피폭괴수물은 약간의 지체를 두고 이곳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가 등장하던 당시 미국의 피폭괴수물은 이미 그 장르적 사이클을 소진했다. 일본의 경우 ‘고지라’ 시리즈는 1960년대 이후 극적인 성격전환을 거쳤다. 무시무시한 파괴의 괴수 고지라는 <킹콩 대 고지라 キングコング対ゴジラ>(1962)에서 외래의 것(킹콩)에 대항하는 내셔널한 것으로서 자리매김되었으며(고지라는 일본 국회의사당 꼭대기에서 미녀를 희롱하는 킹콩과 맞서 싸운다), <3대괴수 지구최대의 결전 三大怪獣 地球最大の決戦>(1964)에 이르러서는 우주 최강의 괴수 킹키도라에 맞서 지구를 구하는 정의의 사도, 아이들의 ‘친구’로 변모하였다.

이 피폭 괴수영화들이 1945년 이후 핵이 초래한 ‘불안의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이 영화들의 등장 이전까지 유일한 괴수영화였던 <킹콩>(1932)이 원시의 섬에서 온 거대 유인원이 뉴욕을 초토화시킴으로써 제국-문명-도시가 식민지-야만-원시에 대해 갖는 공포와 불안을 상징화하는 것이었다면, 1950년대산 피폭괴수 영화들은 핵의 공포를 시각화한다. 이들은 바다 혹은 강 위로, 사막에서, 산꼭대기에서 불현듯 나타나는데, 이 급작스러운 출현이야말로 핵의 위협의 편재성(omnipresence)에 관한 시각적 대응이라고 할 만하다.

동시에 이 괴수가 각각의 개별국가의 영토 내로 들어와서 구체적인 장소를 점유할 때 그 장소의 역사성과 현재성이 불현 활성화된다. 이를테면 제국, 식민지, 전쟁, 냉전의 현재. 종종 이 영화들에 관한 해석이 개별국가의 역사적 상흔과 관련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이를테면 <고지라>에 관한 비평들에서 고지라가 전전의 공습(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폭격까지를 포함하여)을 감행하는 미군이자 그곳에서 죽어간 수많은 ‘전쟁의 사자’들의 망령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은 장소의 역사성이 이 폐허의 풍경 위에 과거와 현재라는 두 개의 시간대를 겹쳐놓기 때문이다. 고지라와 용가리가 미국의 피폭괴수에 비해 훨씬 더 역사적 기억의 활성화와 관련되어 있는 것은 간단히 말해 도쿄와 서울이라는 장소가 전쟁의 장소였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를테면 <심해에서 온 괴물>의 리도사우르스가 뉴욕을 공격할 때, 그 풍경은 어디까지나 미래시제의 일에 불과하지만(미국 본토에서 전쟁은 없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폐허가 된 도쿄와 서울의 풍경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불러온다. 따라서 이 일본과 한국의 괴수들이 역사적 기억 자체가 가지고 있는 훨씬 더 다의적인 복잡성과 연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게다.

피폭괴수는 두 개의 테크놀로지컬한 계보를 가지고 있다. 미국의 괴수들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다면(리도사우르스로부터 시작되는 저 수많은 피폭괴수들의 위대한 창조자는 레이 해리하우젠이다. 그는 <킹콩>의 창조자 윌리스 오브라이언의 수제자였다) 일본의 경우, 모형을 만들고 이를 사람이 뒤집어씀으로써 해결하는 방식, 즉 수트형 괴수로 이를 구현하고자 했다. <고지라>의 제작자들이 대규모 자본의 노동집약적 산물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포기하고 수트형 괴수로 전환 가능했던 이유는 일본에, 특히 <고지라>를 만들어내고 있는 영화사 도호(東宝)에 축소된 공간 및 사물의 구현, 즉 미니어처와 이것들의 정교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조정 기술의 풍부한 집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1941년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 전쟁 프로파간다가 해군의 대규모 공중전 재현으로 넘어갔을 때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바로 미니어처와 조정 기술이었다. 1942년 진주만 공격 1주년을 기념해서 만들어진 <하와이 말레 해전 ハワイ・マレー沖海戦>은 이 기술의 놀라운 성과를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1500평방미터의 수영장에 6백분의 1의 미니어처를 통해 재현된 진주만 공습은 전전 일본 최대의 공중 스펙터클을 선사했으며, 대동아공영권 최대의 히트작이 되었다. 이 실제를 방불케하는 스펙터클을 창조해내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것은 이후 고지라의 창조자가 될 츠부라야 에이지(円谷英二)를 필두로 한 도호의 특수촬영 기술진들이었다. 전전 일본 해군 프로파간다 영화의 기술적 역량 속에서 만들어진 <고지라>는 미니어처에 기반한 ‘리얼’한 공간을 창출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괴수의 무시무시한 난동을 실감나게 그릴 수 있었다.
 

이 순간에 발명된 수트형 괴수와 미니어처 촬영은 일본 피폭괴수와 미국 피폭괴수를 결정적으로 차이지운 핵심 표상이라고 할만한 것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스톱모션의 움직임은 수트형 괴수, 인간의 동작이 배어나올 수밖에 없는 고지라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비해 간헐적이고 단속적이며 부자연스럽다. 유인원(킹콩)에서 파충류(리도사우르스)로의 이동이 낳은 지평, 그 형상이 보유하는 인간으로부터의 거리만큼 더 배타적인 타자성의 영역으로 이동해간 이 형상의 ‘낯섬’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인간적 움직임과의 거리에 의해 배가된다. 킹콩의 직접적인 후예로서 리도사우르스는 비록 단독의 거대괴수이지만 그 타자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여타의 군집 괴수들, 이를테면 개미, 거미, 메뚜기 등과 그리 다르지 않다. 또 일본 특촬 괴수들의 눈동자가 강조된 눈은 이들로부터 어떤 ‘감정적’인 것을 유추하도록 만든다. 종종 그들은 화를 내거나 두려워하거나 슬퍼하거나 당황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 인간적인 특징이야말로 고지라에게 그토록 다양한 의미가 부여되는 이유일 것이다. 그것은 미국영화의 괴수들처럼 명백한 타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관객인 우리는 그들이 결국 인간에 의해 제거되는 순간에, 그리하여 드디어 재난이 수습되고 안정이 찾아오는 순간에 안도하지만, 동시에 통쾌함보다는 마음이 상함을 느낀다. 고지라는 공포의 대상이지만, 또한 연민과 동정, 심지어 희망의 대상이다.(야마네 박사는 피폭을 ‘견뎌낸’ 고지라를 연구함으로써 ‘인류’의 미래에 공헌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짧은 희망을 피력한다).

고지라의 형상으로부터 유래된 이 양가성은 정확히 1950년대 핵을 둘러싼 강력한 프로파간다, 파괴와 절멸의 무기로서의 핵과 평화와 번영으로서의 핵이라는 저 가상적 분할선을 반영한다. 1950년대 중반 이후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언명 ‘평화를 위한 핵’이라는 가상은 아마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프로파간다일 것이다. 그것은 핵 유토피아라고 할만한 것을 만들어내면서 욕망에 어필하였다. 아마도 이 지점이야말로 1960년대 이후 원전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완성되는 것과 맞물려 미국의 파괴로서의 피폭괴수가 사라진 이후에도 일본 피폭괴수가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원전국가 일본으로의 이동 속에서 특촬 괴수들은 점점 더 인간적 형질이 배가되어갔다. 심지어 이들은 가족을 건사하고(미니라), 아이를 구하고(가메라), 지구를 지킨다(고지라).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1967년의 <대괴수 용가리>는 이 순간 도달한 한국에서의 핵의 관점을 그야말로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피폭괴수의 계보 속에서 무기로서의 핵의 파괴성을 일별하는 한편, 그럼에도 그것이 능히 조절가능하다는 믿음을 설파한다. 과학입국을 선언한 한국의 어린 남자아이는 빛이 나오는 기구로 용가리를 춤추게 한다. 트위스트풍으로 편곡된 아리랑에 맞춰. 그리고 이 믿음 위에서 알다시피 이제 곧 한국 역시 원전국가로 이동해갔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은 풍요와 번영의 핵 이미지를 그 어떤 의심도 없이 수용하였다. 조절가능한 핵, 춤추는 용가리에 대한 믿음은 이곳에서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비록 1979년 스리마일섬에서, 1986년 체르노빌에서, 2011년 후쿠시마에서 파괴와 죽음의 무기/풍요와 번영의 에너지로서의 핵 사이를 긋고 있는 이 분할선이 핵 그 자체 안에서 이미 분할불가능한 것임이 그토록 파괴적으로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1) 이영미, 『광장의 노래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 인물과사상사, 2018, 119쪽.
2) 김소영, 『근대성의 유령』, 씨앗을 뿌리는 사람, 2000, 27-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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