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연극

by.이효원(한성대 교수) 2021-10-21조회 5,353

알모도바르의 1997년 작 <라이브 플래쉬>에서 빅토르(리베르토 라발 扮)와 엘레나(프란체스카 네리 扮)가 싸울 때 텔레비전 화면에는 루이스 브뉘엘 감독의 <범죄의 리허설>이 나온다. 그런데 영화 <라이브 플래쉬>의 내러티브와 영화 속 영화 <범죄의 리허설>의 장면이 묘하게 중첩된다. 엘레나가 떨어뜨린 총이 발사되자 <범죄의 리허설>의 여자가 총에 맞아 쓰러진다. <범죄의 리허설>에는 다리가 떨어져 나간 마네킹이 나오는데 <라이브 플래쉬>에서는 다비드가 하반신 마비로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다. <범죄의 리허설>에서 마네킹이 불타는데 <라이브 플래쉬>에서는 클라라(안젤라 몰리나 扮)가 빅토르로부터 결별을 통보받는 순간 불길에 갇힌다. 감독은 ‘범죄의 리허설’이 그 장면의 제목이기도 하다고 밝힌 바 있다.

알모도바르는 <라이프 플래쉬>처럼 영화 속에 다른 영화를 삽입하여 내러티브를 중첩시키고 강조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이야기를 예견하게 하는 방식을 즐겨 쓴다. 이는 미장아빔(mise en abyme) 기법을 활용한 것이다.

미장아빔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의미하는 문학 기법으로 잘 알려져 있다. 프랑스의 소설가 앙드레 지드가 그의 1893년의 일기에서 가문의 문장(紋章, blason) 가운데에 문장의 축소판 혹은 비슷한 아빔(en abyme)을 새겨넣는 것과 같은 작법을 선호한다고 밝힌 것에서 착안, 60여년 뒤 비평가 매그니가 이 용어를 창안했다. 그리고 누보로망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가들의 논의를 거쳐 오늘날 예술 전반에 사용하게 되었다. 오늘날 미장아빔 기법은 작품 속에 다른 작품을 삽입하여 심연에 빠지는 효과를 주거나 상호텍스트성 혹은 자기반영성을 통해 작품의 형식을 확장할 때 주로 사용한다.

알모도바르는 <라이브 플레쉬>처럼, 영화 속에 텔레비전 화면을 비추는 미장아빔을 선호한다. 이는 프레임 속에 프레임이 생성되어 영화적 심연으로 빠지는 듯한 느낌을 주므로 다른 감독들도 종종 사용하는 낯설지 않은 기법이다. 그러나 알모도바르 영화가 다른 영화보다 더 개성적인 이유는 연극을 삽입하여 미장아빔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영화 안에 이질적이고 낯선 연극 장르를 삽입하면 관객 사고를 영화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며 독특하고 예술적인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다.

알모도바르는 고등학교 졸업 후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 전까지 극단에서 단원으로 활동했다. 때문에 그의 영화에서는 연극 혹은 연극적 요소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의 테네시 윌리암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그녀에게>의 티나 바우쉬의 탄츠테아터, <페인 앤 글로리>의 《중독》은 영화 속에 연극 장면이 직접적으로 삽입된 예다. 또한, <욕망의 법칙>,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은 연극적 세트에서 연극적 대사를 기반으로 제작되었고, <휴먼 보이스>는 장콕도의 《휴먼 보이스》를 각색한 작품이다. 감독의 정체성에 연극이라는 프레임이 자리하고 있는 바, 그의 작품은 영화와 연극이라는 이질적 타 장르가 혼재하며 그만의 개성으로 확립된다.

<그녀에게>의 오프닝과 앤딩 장면에는 독일의 저명한 무용가 (故)피나 바우쉬의 탄츠테아터(춤연극)가 미장아빔으로 삽입되었다. 오프닝에 배치된 《카페 밀러》에서는 눈을 감고 있는 여인이 검정색 의자와 원탁, 회색 벽으로 가로막힌 무대에서 고통으로 가득 찬 춤을 춘다. 같은 공간에 있는 한 남자는 여인이 달릴 때마다 필사적으로 의자와 원탁을 치우며 여인이 부딪치지 않게 보호하려고 애쓴다. 《카페 밀러》 공연장면의 롱테이크에 이어, 나란히 관람하고 있는 베니그노와 마르코의 미디움 쇼트가 연결된다. 눈을 감은 여인과 그녀를 보호하는 남성의 탄츠테아터는 코마상태에 빠진 알리시아(레오노르 와틀링 扮)와 리디아(로사리오 플로레스 扮)를 돌보는 베니그노(하비에르 카마라 扮)와 마르코(다리오 그란디네티 扮)의 모티프적 형상인 셈이다. 그리고 앤딩의 배경은 남겨진 알리시아와 마르코가 관람하러 간 바우쉬의 《마주르카 포고》의 공연장이다. 무대 위의 초록색 풀과 그 사이로 낙하하는 물방울 그리고 무용수들의 꽃무늬 의상은 생명력 넘치는 태초의 에덴동산을 연상시킨다. 남녀 커플로 구성된 무용수들의 춤은 오프닝과는 정반대의 경쾌한 분위기다.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는 듯한 두 남녀 무용수의 모습에서 관객은 알리시아와 마르코가 연인으로 발전할 것을 짐작하게 된다. 이처럼 <그녀에게>의 오프닝과 앤딩의 탄츠테아터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압축적으로 암시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카페밀러》 -눈감은 무용수의 길을 터주는 남성                          《마주르카 포고》 -커플들의 경쾌한 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영화의 관통선을 갖는 중요한 연극으로 삽입되었다. 주인공 마뉴엘라(세실라 로스 扮)가 젊은 시절 이 연극을 하며 남편을 만났고, 남편이 떠나고 홀로 키워 장성한 아들과 함께 연극을 본 후 교통사고로 아들이 죽는다. 그리고 마뉴엘라는 연극의 스텔라를 다시 연기하며 조금씩 긍정적으로 변화한다. 영화에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마뉴엘라에게 만남과 이별을 주는 애증의 매개이다. 그리고 동시에 고통에서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알모도바르는 연극을 활용한 미장아빔 외에도, 연극적 형식을 차용하여 영화의 분위기를 반전시키기도 한다. 비극적 전개 속에서 발리우드식 뮤지컬이 난데없이 난입하는 <나쁜 버릇>이나 <하이힐>을 보면 당혹스럽기도 하다. 알모도바르 초기 영화가 키치의 영역에 있다고 평가받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면이 없다면 알모도바르 영화가 아니다. 비일상적인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가지게 되는 묘한 흥분과 긴장감은 알모도바르 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색이기 때문이다.
 
<하이힐> 여성 수감소에서의 뮤지컬 댄스


또한, 감독은 공연이란 형식으로써 구현되는 배우와 관객, 다시 말해 보여주는 자와 보는자로의 이분법을 연출에 활용한 것이다. <나쁜 버릇>에서 센터에 있는 키큰 금발 수감자를 뮤지컬 댄스를 통해 주목받게 하고 구경꾼들에게 그녀에 대한 뒷담화를 나누게 함으로써 갑자기 내러티브에 끼어들 수 있도록 장치했다. 또한 <귀향>에서 라이문다(페넬로페 크루즈 扮)가 부르는 《귀향》은 라이문다의 상처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응축한 노래이지만, 동시에 차에 숨어 입을 틀어막고 울면서 딸의 노래를 듣는 어머니의 모습이 강조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녀에게>에서 카에타노 벨로조가 부르는 《쿠쿠루쿠쿠 팔로마》 역시 영화 전반을 반영하는 슬픈 사랑 노래이면서 동시에 노래를 듣고 눈물 흘리는 마르코를 위한 장면이기도 하다. 이처럼 알모도바르는 보여주는 자와 보는 자를 모두 강조하기 위해 공연 장면을 종종 활용한다.

나아가, 감독은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 집단의 전경을 비추며 마치 공연장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페인 앤 글로리>의 극중극인 《중독》 공연장면에서 객석의 전경을 비추는가 하면, <그녀에게>의 《마주르카 포고》 공연장면에서 관람 중인 객석을 비춘다. 그밖에도 감독은 크고 작은 이벤트를 관람하는 집단의 모습을 영화에 삽입하곤 한다.
 
  
<페인 앤 글로리>- 《중독》의 관객                                                 <그녀에게>- 야외공연의 관객 
  

감독은 관객 집단 쇼트에서 오히려 공연하고 있는 퍼포머를 측면에 위치시키고 관객의 모습을 전면에 배치한다. 영화를 관람하던 나는 관객들의 모습을 나와 동일시하며 별안간 공연장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 쇼트의 주인공은 퍼포머가 아니라 관객 그리고 나다. 감독의 시선만을 쫓아야 하는 고독한 개인이었던 영화의 관객은 공연장의 관객 집단 쇼트로 인해 역동성과 시점의 자유를 제공받게 된다. 퍼포머에게 맞추어져 있던 포커스가 아웃 되고 확장된 시선을 따라 다른 관객들을 자유롭게 관찰하다 보면 어느새 매체적 제약은 파괴된다. 보여주는 자와 보는자가 결코 실제로 만날 수 없는 영화라는 매체에서 이들이 만나는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연극적 현장성을 고조시키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장르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연극을 잘 알고 쓰는 알모도바르의 연출력이라 할 수 있다.

영화라는 단일 장르만 사용하지 않고 연극과 연극적 형식을 활용하여 종합예술로서의 영화를 선보이는 알모도바르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진다. 혹여 그의 신작에 낯선 연극이 삽입되었다면 지나치지 말고 어떻게 미장아빔으로 활용했는지 그 연극을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 영화와 연극의 레이어를 통해 스스로 의미의 퍼즐을 맞추며 영화를 200%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연극적 형식이 나타나 나를 당황하게 한다면 그저 이질적인 느낌 그대로를 새기는 것이 어떨까? 이것이 알모도바르 유니버스를 즐겁게 탐험하는 방법일테니 말이다. 
다음 편은 "알모도바르 유니버스"의 마지막 편 「알모도바르의 영화와 현실의 순환」이 연재된다. 많은 관심 바란다. 


(관련글)
1. 알모도바르 영화의 연결된 세계 - 2021.10.20.
2.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연극 - 2021.10.21.
3. 알모도바르 영화와 현실의 순환 - 2021.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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