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모도바르 영화의 연결된 세계

by.이효원(한성대 교수) 2021-10-20조회 2,433

스페인의 대표적인 영화감독을 꼽으라고 질문한다면 가장 먼저 대답할 이름은 페드로 알모도바르일 것이다. 첫 영화 개봉 이후 올해로 데뷔 41년을 맞은 그는 평균적으로 2년에 한 번씩 신작을 내놓으며 필모그래피를 꾸준히 확장하고 있다. 감독의 영화적 유니버스는 더욱 거대하고 견고해졌으며 이제는 많은 일반 관객을 그의 세계로 견인하고 있다. 알모도바르의 악동 기질이 드러나는 초창기 키치 영화는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약과 동성애 등 자극적인 소재와 묘사 또한 이에 한몫했다. 그러나 근래 작품들은 내러티브나 표현방식이 순화되고 세련되어졌다. 감독의 연륜과 함께 그의 영화도 성숙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일관된 관심이 여성에 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감독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상정한 영화에서 남성을 부재하거나 있어도 무능한 안타고니스트로 묘사한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하이힐>, <귀향>의 남편들은 폭력적이고 외도를 일삼아 아내와 딸에게 죽임을 당한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유일한 여주인공의 희망인 아들은 교통사고로 죽고, 남편과 친구는 성전환을 해서 가슴을 달고 나타난다. 심지어 수녀 로사의 아버지는 치매 환자다. 반면 여성은 외연의 유약함에도 불구하고 내면이 강인하고 억척스러운 캐릭터로 묘사된다. 여성들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남성으로부터 물리적, 정신적으로 독립해낸다. 오늘날 독립적 여성 캐릭터는 이미 정체성을 완고히 하고 있지만 80년대 알모도바르 영화의 여주인공들의 설정은 파격적이었다.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에서 자신을 임신시키고 떠난 남자의 목숨을 구한 뒤 당당히 이별을 고하는 여주인공의 모습에서는 짜릿함 마저 느껴진다.

알모도바르는 여성이 자식과 어머니에게 갖는 애정을 최상위의 감정으로 생각함이 틀림없다. <하이힐>, <귀향>, <줄리에타>는 십여년 동안 떨어져 지낸 모녀의 관계를 기반하고 있다.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엄마에게 바라는 사랑과 그것의 결핍으로 인한 그리움, 비뚤어진 질투까지, 모녀가 느낄 수 있는 회환을 다각도로 그려낸다.  

“마약 중독자가 한번 약에 다시 손을 대면 몇 년을 끊고 살았더라도 다시 빠져들고 말지. 오랫동안 네 생각을 참으며 지냈지만 널 찾을 희망에 다시 빠져버렸어. 그 바보 같은 희망이 힘들게 쌓은 새 인생을 산산이 조각내버렸지. 내겐 남은 게 없어. 너만 존재할 뿐. 네가 없다는 공허함이 내 삶을 파괴하고 있어.”
<줄리에타> 줄리에타의 일기 중.

“난 평생 엄마를 따라하며 살았어요. 엄마가 떠난 이후로 모든 면에서 엄마랑 경쟁하려 했다고요. 하지만 단 한 번 내가 이겼었죠. 마누엘! 난 그와 결혼했죠. 엄마가 할 줄 알았는데! (…) 어렸을 때 난 귀찮게 하는 것 밖에 못했어요. 하지만 그때조차도 늘 엄마를 돕고 싶었다고요. 엄마를 너무 좋아했으니까.”
<하이힐> 레베카 대사 중.

겉으로는 멀쩡해 보일지 몰라도 가슴 한쪽에 켜켜이 눌려있는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 남편에 대한 결핍은 영화의 주인공뿐 아니라 모든 여성들의 근원적 아픔일 것이다. 알모도바르 영화 속 여성들은 이 아픔을 다시금 여성간의 연대를 통해 극복한다. 동질감, 모성애로 응축된 그들의 의리는 남성들이 외치는 의리보다 더욱 소리 없이 끈끈하고 질기다. 여성들이 소파에서 모여 수다를 하는 장면들은 알모도바르 영화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알모도바르는 미장센에 무척 공을 들이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80년대의 작품을 근래에 다시 보더라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주인공들의 의상과 세트, 그리고 갤러리에 와있는 듯한 회화의 향연은 내러티브에 종속되어 있는 영화를 거부라도 하는 듯 시각적으로 환기를 준다. 게다가 빨강, 파랑, 초록 등, 원색에 대한 그의 태도는 애정을 넘어 집착으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쉬어가는 퀴즈, 알모도바르 영화의 여주인공이 타는 자동차의 색깔은?
눈치챘겠지만 정답은 빨강이다. <하이힐>의 저명한 아나운서 레베카(빅토리아 아브릴 扮)가 타는 차, <귀향> 라이문다(페넬로페 크루즈 扮)의 어머니가 트렁크에 숨어있던 차, <브로큰 임브레이스>에서 레나(페넬로페 크루즈 扮)가 죽음을 맞이하는 차, <줄리에타>의 줄리에타(엠마 수아레스 扮)가 떠난 딸을 찾으러 갈 때 타는 차 등. 인물의 상황에 따라 기종은 달라지지만 여주인공의 승용차가 빨간색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감독은 종종 버드 아이즈 뷰로 도로를 지나는 여주인공의 자동차의 모습을 담는다. 특히 초록이 우거진 숲길을 종과 횡으로 지나는 빨간 자동차 장면은 보색의 대비로 더욱 잔상이 각인된다. 빨간 자동차는 알모도바르 영화의 시대와 장르를 그야말로 종과 횡으로 관통하는 하나의 관념이 아닐까? 빨간 자동차와 함께 알모도바르의 영화와 영화를 연결하는 유니버스로 시야를 확장해보자.
 
 
알모도바르는 자신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반복적으로 다시 출연시키며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감독들은 새로운 배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관객으로 하여금 특정한 배역을 더욱 진짜처럼 믿게 하고 싶어서 혹은 뉴 페이스를 통해 새로운 분위기로의 전환을 꾀하기 위해서 알려지지 않은 배우를 발굴한다. 그러나 알모도바르는 일루전의 고조나 분위기의 전환보다는 자신만의 색을 더욱 강조하는 편에 관심이 있는 듯하다. 그의 영화에서는 주연부터 단역에 이르기까지 전작에서 봐온 익숙한 배우가 늘 다시 등장한다. 안토니오 반데라스, 세실리아 로스, 페넬로페 크루즈, 카르멘 마우라, 마리사 파레데스는 대표적인 감독의 페르소나다. 페넬로페 크루즈는 <라이브 플레쉬>에서 버스에서 아기를 낳는 창녀,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임신한 연약하고 순수한 수녀, <귀향>에서 억척스럽고 강한 엄마, <브로큰 임브레이스>에서 매력적인 여배우를 연기했다. 변화무쌍한 역할이 무색할 정도로 수려한 연기를 보여준 그녀는 모두가 손꼽는 대표적인 알모도바르의 페르소나이다. 초기작 <나쁜 버릇>에서부터 꾸준히 등장했던 고(故) 커스 람프리브는 엄마, 할머니, 이웃 등 단역으로 출연하며 웃음을 주는 씬스틸러이기도 했다. 마블의 팬들은 마블 유니버스가 총 망라되어있는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히어로들이 한 명씩 등장할 때마다 반가움의 환호성을 질러봤을 것이다. 알모도바르의 팬들 역시 그의 영화에서 새로운 캐릭터로 분하는 친근한 배우를 보며 가슴이 쿵쾅거리는 경험을 해 보았을 것이다. 배우를 통해 감독의 전 작품들을 상기하다보면 어느새 알모도바르 유니버스에서 유영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페르소나 컨벤션 외에도, 감독은 독특한 방식들을 통해 자신의 전작들을 연결한다. <브로큰 임브레이스>에서 레나(페넬로페 크루즈 扮)와 마테오 블랑코(루이스 호마르 扮)가 찍은 코미디 <여인과 가방>은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을 오마주한 작품이다. 영화의 말미에 <여인과 가방>의 편집본을 다시 보는 장면에서 비로소 관객들은 알모도바르의 그로부터 20년 전의 개봉작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의 장면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며 무릎을 탁 친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종국에 친구가 된 마뉴엘라(세실리아 로스 扮)와 위마 로조(마리사 파레데스  扮)는 3년 뒤 <그녀에게>에서 야외공연 관람석에 앉아있는 모습을 통해 깜짝 등장하기도 한다. 마치 관객에게 그녀들은 여전히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며 근황을 전해주는 것 같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의 아들 방에 걸려있던 피나 바우쉬의 포스터는 <그녀에게>의 베니그노(하비에 카마라 扮)의 손에 들려 다시 한번 영화는 연결된다. <욕망의 법칙>에서는 영화 감독인 파블로(유세비오 폰셀라 扮)를 통해 장 콕도의 희곡 <휴먼 보이스>에 대한 애정을 단편적으로 대리하게 하지만 13년 뒤 <휴먼 보이스>를 내놓으며 애정에 방점을 찍는다.

이처럼 감독은 자신의 영화, 인물, 오브제, 그리고 소재 등을 자신의 작품에 재투영하며 전작과 연결고리를 채운다. 악동과 성자, 고집불통과 재기발랄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것 같은 알모도바르의 유니버스는 다음편에서도 계속된다. 3부작으로 구성된 "알모도바르 유니버스"의 1편 「알모도바르 영화의 연결된 세계」는 여기까지다. 앞으로 2편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연극」, 3편 「알모도바르의 영화와 현실의 순환」가 연재된다. 

나가며...

“돌아온 과거와의 우연한 만남이 두려웠지. 내 삶이 흔들릴까봐. 추억으로 가득한 그 밤이 두려웠지. 내 꿈이 뒤 엉킬까봐. 하지만 도망치던 나그네는 곧 발길을 멈추리라. 모든 걸 앗아간 망각이 내 오랜 망상들을 죽였다 해도 내 마음속엔 아직도 실낱 같은 희망이 남아있지. 귀향. 주름진 이마 세월의 눈이 쌓인 백발이 되어 귀향을 하네. 인생은 한 순간. 뜨거운 눈빛은 널 찾아 그림자 속을 헤메고 생각하면 눈물만 흐르는 달콤한 추억에 의지해 내 영혼은 힘을 얻네 ” 
<귀향> 라이문다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 《귀향》의 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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