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저 사람이 우리 엄마일 리 없어 굿나잇 마미, 2014

by.김용언(미스테리아 편집장) 2021-10-08조회 2,507

오스트리아의 외딴 마을, 거기서도 다른 이웃들과 뚝 떨어져 홀로 서 있는 고급 주택. 아홉 살짜리 쌍둥이 형제 엘리아스와 루카스는 성형수술을 받으러 떠난 엄마를 기다리며 집을 지키고 있다. 그들은 빈에 살다가 이곳으로 이사 왔는데, 학교도 다니지 않고 타인과의 일체의 교류 없이 오로지 둘만의 세계에 살아가는 것 같다. 그리고 엄마가 돌아왔다. 반갑게 이층으로 뛰어오르며 엄마를 부르던 소년들은 우뚝 멈춰 선다. 얼굴에 온통 붕대를 감은 채 돌아온 엄마는 아주 낯설다. 손님도 받지 말고 외출도 하지 말고 집안에서는 절대 정숙하라며 온갖 새로운 규칙들을 열거하는 엄마는, 병원에서 전화를 걸어 노래를 불러주던 그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이 사람은 싸늘하고 신경질적이며 아이들을 미워하는 것 같다. 엘리아스와 루카스는 조금씩, 이 사람이 엄마인 척하는 타인일 것이라는 의심을 시작한다.

베로니카 프란츠와 스베린 피알라가 공동으로 연출한 2014년 영화 <굿나잇 마미>의 첫 장면은 볼프강 리벤라이너의 1956년 작 <트랩 가족(Die Trapp-Familie)>의 클립이다. 1965년 할리우드에서 다시 만들어진 <사운드 오브 뮤직>의 원안이 되는 이 영화에서, 오스트리아 민속의상을 입은 젊은 여성과 일곱 명의 아이들이 브람스의 <자장가>를 합창하고 있다. 일곱 아이들의 새엄마가 된 견습 수녀 출신 마리아와 아이들 간의 따스한 교감과 호흡을 강조하며 마리아의 ‘엄마다움’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프란츠와 피알라는 왜 하필 이 영화의 이 장면을 선택했을까? 연구자 리에스 란크만이 지적한 대로, <트랩 가족>이 배경으로 하는 시간대는 의미심장하다. 마리아가 이 가족에 합류한 것은 1927년이었고, 폰트랩 가족은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할 무렵 미국으로 떠났다. 그 시기 오스트리아 여성들은 네 명 이상의 아이를 낳은 순수한 혈통의 어머니들에게 부여되는 ‘다산모 십자훈장’을 받는 ‘영광’을 얻도록 노력해야 했다. 본인도 소녀티를 갓 벗었으면서 기꺼이 외로운 일곱 아이의 새엄마가 되기로 결정한 마리아는 사실 ‘다산모 십자훈장’의 명예 회원으로 추대받았어도 크게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1) 그러므로 <트랩 가족> 속 (그리고 현실 속) 마리아 폰트랩이 <굿나잇 마미>의 오프닝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영화 속 모성성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제기를 위한 카운터파트로서다.
 

가족이 갑자기 낯설고 두려운 존재로 다가오는 이야기의 다수는, 요정이 요람 속 인간 아기를 훔쳐가고 대신 요정 아기를 남겨두는 ‘체인즐링’ 설화에 기대고 있다. 하지만 <굿나잇 마미>에서는 그 설정이 역으로 제시된다. 무엇 때문인지 불분명한 이유로 성형수술을 받은 엄마가 돌아왔을 때, 아이들은 달라진 외양이 달라진 내면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붕대를 감은 엄마는 예전 엄마처럼 다정하고 따뜻하지 않다. 동생 루카스에게 식사도 차려주지 않을 때가 부지기수이며 형 엘리아스에게는 손찌검까지 가한다. 가족 앨범에서 아빠의 사진이 사라진 것처럼(‘우리의 결혼식’이라고 태그가 달린 페이지는 텅 비었다), 별거 이후 아빠의 존재가 ‘우리 가족’으로부터 빠르게 삭제당하고 부정당한 것처럼, 엄마도 혹시 누군가에게 납치당한 건 아닐까? 어떤 ‘신체강탈자’가 엄마의 영혼을 바꿔치기한 건 아닐까? 아이들은 가족 앨범에서 발견한 낯선 여자의 사진을 주목한다. 엄마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선글라스를 낀 채 엄마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이 여자는 누굴까? 혹시 엄마에게 숨겨진 쌍둥이 형제가 있었던가?

엄마라면, 자신의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모를 리 없다. 엄마라면, 자신이 ‘엄마’라는 사실을 언제나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엄마라면, 냉동 피자로 냉장고를 가득 채우면 안 된다. 엄마라면, 아이의 눈물 어린 호소에 24시간 귀를 기울여야 한다.... <트랩 가족>(더 쉽게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처럼, 상처받은 아이들의 행위 이면에 발화되지 않은 진실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진정 원하는 바를 마음으로 앞질러 선험적으로 깨달아야 한다. 아이들과 화음을 맞춰 함께 노래 부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이 낯선 여자는 너무나 자주 신경질을 부리거나 아이들을 윽박지르고, 아이들을 돌보는 대신 화상캠으로 다른 남자와의 만남을 시도하고, 방송 진행자로서의 커리어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아이들은 수술 전의 엄마(혹은 수술 전에 그랬다고 아이들이 믿는 엄마)를 돌려놓기 위해 행동에 나선다.
 

마을과 너무나 멀리 동떨어져 있고 내부에 각종 모퉁이와 모서리가 많은 이 집은 그 자체로 미로처럼 작동한다. 마치 엄마처럼, 이 집도 불현듯 아이들에게 불친절하고 적대적으로 다가온다. 아이들에게 가족 혹은 집은 모두 공포의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아이들은 집안에서 큰 소리를 낼 수 없고 지저분하게 물건을 늘어놓을 수 없으며 햇빛을 차단해야 한다. 아이들은 엄마를 만나려면 단단히 닫혀 있는 문 앞에서 정중하게 노크를 해야만 한다. 지하실 구석에는 그들이 몰래 키우던 고양이의 시체가 박혀 있다. 아이들이 엄마를 피해 집안 어딘가로 달아났을 때 엄마는 그들을 쉽게 찾아내지 못한다. 집안에서의 숨바꼭질, 쫓고 쫓기는 추격전, ‘진짜’ 엄마를 찾는 모험, 그리고 결국엔 텅 빈 앨범 페이지의 거대한 공포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부재하는 존재, 보이지 않는 행위.

<굿나잇 마미>에서는 아주 유명한 호러 스릴러 영화(제목만 언급해도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차마 적을 수 없다)의 또다시 이걸 쓸 수 있을까 싶었던 전제가 영리하게 변주된다. 이를테면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을 다시 쓰기한 작품을 쉽사리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은 그런 케이스다.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이 소설에서만 가능한 ‘생략’을 이용한 서술 트릭을 사용했던 것처럼, <굿나잇 마미>는 원제 ‘Ich seh, Ich she’처럼 ‘본다’라는 행위의 맹점을 활용한 트릭으로 관객을 속여넘긴다. 왓챠에서 볼 수 있는 이 영화를 부디 놓치지 마시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사항. 이 영화의 프로듀서는 울리히 사이들이다. <개 같은 나날><지하실에서><파라다이스 러브> 등을 통해 ‘뉴 오스트리아 필름’의 대표주자로 불리던 그 감독은, <굿나잇 마미>의 공동 감독 중 한 명인 베로니카 프란츠의 남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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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Lies Lanckman, 「‘I see, I see . . .’ Goodnight Mommy (2014) as Austrian Gothic」, 『Gothic Heroines on Screen : Representation, Interpretation, and Feminist Enquiry』, Edited by Tamar Jeffers McDonald & Frances A. Kamm, Routledge, 2019.
(https://uhra.herts.ac.uk/bitstream/handle/2299/22115/Goodnight_Mommy_Lanckman_1.pdf?sequence=1&isAllow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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