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메리앤은 진정 썅년인가? 더 파티, 2017

by.이승연(작가) 2021-10-07조회 3,132

딩동.
문이 열리자마자 자넷(크리스틴 스콧 토마스 분)은 다짜고짜 총을 겨눈다. 헝클어진 머리,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복잡한 얼굴로 총을 든 그녀의 손이 덜덜덜 떨린다. 그녀는 왜, 누구를 향해 총을 겨눈 것일까.

그 날은 파티가 열리는 날이었다. 자넷의 보건복지부 장관 임명을 자축하기 위해 자넷 부부는 친구들을 초대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자넷의 절친인 에이프릴(패트리시아 클락슨 분)과 그녀의 남자친구 고프리드(브루노 강쯔 분). 뒤이어 차례로 들어오는 마사(체리 존스 분) 그리고 지니(에밀리 모티머 분). 마지막 손님은 톰(킬리언 머피 분)이다. 톰의 부인인 메리앤은 늦는다는 전언, 이로써 메리앤을 제외하고 올 손님은 다 왔다.

파티는 시작도 전에 불길했다. 손님 맞을 생각은 않고 시종일관 우울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듣고 있는 자넷의 남편 빌(티모시 스폴 분)을 필두로 에이프릴과 고프리드는 티격태격 작은 말다툼을 멈추지 않고, 톰은 들어오자마자 화장실로 직행해 콧속에 마약을 잔뜩 넣더니 권총을 품에 쑤셔 넣는다. 에이프릴이 축배사를 시작하려는 찰나 레즈비언 커플인 마사와 지니가 자신들의 세쌍둥이 임신소식을 먼저 발표하며 초를 치고, 에이프릴이 이 불길함에 화룡점정을 찍으니, 샴페인이 터지는 순간 날아간 뚜껑에 거실유리창이 와장창 박살난 것!

이 요란스런 시작은 그 날의 파티가 결코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을 것을 현현한 것이었다. 출발테이프를 끊은 건 빌이었다.   
“내 상태가 안 좋다는군. 진단을 받았는데 결과가 별로야. 시한부라네.”
다들 놀라 할 말을 잃은 가운데 정적을 깨는 사람은 톰.
“망할 놈!”
위로는커녕 그 와중에 빌에게 욕을 하는 시츄에이션이라니!  
하지만 빌이 욕을 얻어먹을 만했다. 그의 자백에 의하면 지난 2년간 그는 톰의 부인인 메리앤과 불륜관계였단다. 갈수록 태산인 건, 그 둘의 밀회를 도운 건 다름 아닌 빌의 친구인 마사이고, 대학시절 빌과 마사는 또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고. 일이 이 지경이라 톰이 연신 외쳐대는 ‘씨발’이 매우 적절한 리액션으로 느껴질 정도다.
 
 
감독인 샐리 포터는 이 영화를 ‘비극을 둘러싼 희극’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유머와 위트를 통해 인간이 받는 고통의 모순을 말하고 싶었다고 덧붙인 걸 보면 결국 방점은 희극에 있지 않고 비극에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인생은 멀리서보면 희극이나 가까이서 보면 모두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을 대입한다면, 이 영화를 우리는 가까이에서 보아야 한다는 말일 게다. 거실과 부엌, 화장실과 앞마당이 전부인 좁고 한정된 공간은 그래서 매우 적절하다. 갇힌 공간은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때문. 공간의 협소함으로 촉발되는 지루함은 71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으로 한 방에 해결했고, 모든 컬러가 배제된 흑백화면은 인물에 대한 편견을 제거시킴으로써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를 성공적으로 구현했다. 이 완벽한 삼합으로 우리는 감독의 완벽한 인질이 된다. 
  
인간의 삶은 세 가지로 나뉜다. 공적인 삶, 사적인 삶, 그리고 비밀의 삶. 이 영화는 비밀의 삶이 어떻게 공적이고 사적인 삶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통쾌하게 까발리며 진실과 진리(眞)은 항상 선(善)이 되는지, 선(善)은 늘 아름다울(美) 수 있는지를 대놓고 묻는다. 
“난 진실과 화해를 믿어. 난 전 세계를 향해 연설했어! 우리나라를 부당착취의 도살장에서 건져 내느라 헌신했다고!”
라고 사자후를 토해낸다고 해서 진(眞)에 가까운 자넷의 공적인 삶이 마냥 사적인 삶과 일치했던 건 아니다. 개인의 삶의 모습과 사회적 정의감은 별개의 층위를 갖는다. “가끔 이기기 위해선 확신에 가득한 ‘척’도 해야 한다”는 자넷 본인의 말마따나 그녀의 진(眞)은 선(善)이 아니라 위선(僞善)에 가까웠다. 아니, 딱 위선이었다. 사적인 삶에서는 외조를 하느라 자신을 희생했던 남편 빌에게 무심한 아내였고, 심지어 계속 울려대는 문자메시지 알림음은 그녀에게 비밀의 삶까지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니 말 다했다. 진이 위선으로 연결되는 순간 이미 미는 존재할 수 없다. 미(美)가 실종된 자리엔 추(醜)가 남는다.

다른 사람들의 사정은 나을까. 그럴 리가! 지식인의 대명사인 대학교수 빌과 마사는 입으로는 온갖 격률을 다 쏟아내며 번지르르한 레토릭을 자랑하지만, 실상은 본심을 호도하느라 바쁘다. 정당정치, 합리주의, 페미니즘, 의료정책 등 각종 정치·사회 이슈들을 꺼내며 자신들이 정의의 수호자인 것처럼 굴지만, 그것들이 메리앤을 둘러싼 불륜과 적절히 조합되는 순간 그들 역시 위선자의 모습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함을 증명한다. 왜 너의 신념이 바뀌었냐고 추궁당하면 이 한 마디로 자신을 변명하는 그들. 
“모든 건 변해. 늘 변한다고!”     
상황이 이쯤 되니 성공한 금융맨으로 비싼 양복이나 처입는 속물 중의 속물 톰이 가장 순수해 보일 지경이다. 등장부터 고프리드와 옥신각신하던 에이프릴이 이 하극상의 끝에서 “우리사이가 여기서 젤 낫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미(美)가 아름다움인 것은 미가 바로 각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름다움’은 곧 ‘앎’이므로. 비극이 미가 된다는 것은 비극이야말로 우리를 통절하게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신영복 선생님은 ‘비극의 미’를 이렇게 정의했다. 내가 앞서 진선미를 끌어들인 이유이자, 포터 감독이 희극을 가장한 ‘비극’을 연출한 이유일 것이다. ‘앎’을 전하기 위해서. 대체 어떤 앎이기에?
답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비밀의 속성에 대해 짚어야 한다. 외부에 당당히 드러낼 수 없는 욕망을 행위했을 때 그것은 곧 비밀이 된다. 또한 비밀은 대개 선의 반대를 품는다. 위선 혹은 악. 그래서 위선 혹은 악은 욕망의 다른 이름이 된다. 

원래 이 모임의 목적은 ‘파티’였다. 우리가 쓰는 가장 화려한 가면의 향연인 파티. 욕망의 실체를 감춰주는 게 가면의 역할일 텐데, 그 거창하고도 눈부신 가면을 벗기면서 느끼는 쾌감이 감독이 지향한 길티 플레져였다. 그러나 남의 비밀을 아는 것은 비극이 아니다. 진짜 비극은 내 가면이 벗겨져 보이기 싫었던 완연한 민낯이 드러나는 것. 나의 위선, 나의 악, 나의 욕망이 만천하에 공개되어 저들을 비웃기 위해 가리켰던 손가락을 내 자신에게로 돌리는 것.

“아리따운 메리앤! 그녀는 태풍의 눈이지. 늘 태풍의 눈이야.”
영화 초반 에이프릴은 메리앤을 두고 이렇게 말했었다. 태풍은 주변을 초토화시키지만 사실상 태풍의 중심 즉, 태풍의 눈에서는 하늘이 맑고 바람이 없는 고요한 상태가 유지된다. 이것이 태풍이 가진 모순이다. 파티의 모든 사람들은 메리앤으로 인해 갈기갈기 찢기고 부서졌다. 그러나 정작 메리앤 본인은 영화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마지막 ‘딩동’ 소리에 현관문이 열리면서 그녀가 등장하도록 되어 있지만 역시 그녀의 모습은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다. 대체 그녀는 실재하는가 아닌가. 그녀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왜 ‘메리앤 없는, 그러나 메리앤이 중심이 된’ 스토리가 탄생했는가. 영화 내내 썅년 소리를 들어야 했던 그녀는 과연 누구이기에.
 

자넷의 손에는 여전히 총이 있고, 그녀는 정면으로 총구를 겨눈다. 
자, 이제 다시 대답해보자. 
그 총구는 누구를 향해 겨눈 것일까? 
여전히 메리앤을 향해서인가? 
만약 아니라면? 
그럼 그 사람은, 
총을 맞을 그 사람은, 
총구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사람, 

바로 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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