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 쿠퍼가 갇혀버린 마을 트윈 픽스

by.김용언(미스테리아 편집장) 2021-09-30조회 2,818

1993년 여름의 나를 사로잡은 질문은 그것이었다. 누가 로라 파머를 죽였는가? 
‘충격적인 컬트’라는 수식어와 함께 심야 시간대 KBS2에서 방영되었던 데이빗 린치의 <트윈 픽스> 1화 오프닝은, 그때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의 내가 돌이켜보건대, 지금까지 내 인생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의 정수를 담고 있었다. 이 드라마는 1화 첫 장면부터 ‘시체를 던진다’. 금발머리에 푸른 눈, 학교 축제에서 여왕으로 선정될 만큼 트윈픽스 마을의 최고 미인으로 꼽히던 고등학생 로라 파머가 강가에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차가운 강물 속에 몇 시간 동안 떠다녀서인지, 그의 피부는 잿빛으로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입술도 생기를 잃은 채 푸르죽죽했다. 젊음과 아름다움이 그대로 ‘박제’된 시체가 주는 불편한 매혹.

또래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부유한 가족의 외동딸로서 사랑을 듬뿍 받았으며 심지어 봉사 활동에도 열심이어서 누구에게나 칭찬을 듣던 밝고 화사한 소녀 로라 파머가 시체로 발견된 뒤, FBI 요원 데일 쿠퍼가 전담 수사관으로 트윈 픽스 마을에 도착한다. 그리고 비밀이 하나씩 드러난다. 한낮의 햇살 같던 로라에게 실은 암흑 같은 어두움이 스며들어 있었고, ‘공인된’ 남자 친구는 한명이었지만 다수의 남성들이 로라 주변에 존재했다. 심지어 마약과 매매춘, 새디스트의 고문이라는 엄청난 단어들이 FBI 요원의 입술에 오르내린다.

트윈 픽스는 어떤 곳인가. 침엽수림이 우거지고, 큰 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새들이 평화롭게 우짖으며, 미국 최고로 맛있는 체리 파이와 뜨거운 커피를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영업 중이고, 새롭게 유입된 사람은 거의 없이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끼리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지내는 그런 마을이다. 따스한 세피아 톤 화면 속에서, 서로 마주치면 미소와 덕담을 주고받은 마을 사람들의 과장되게 따뜻한 관계가 넘쳐나는 곳이기도 하다(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나오미 왓츠가 처음 할리우드에 도착하여 노부부와 주고받는 밝고 희망차고 부자연스러운 연기를 떠올려보라). 그러나 대화가 끝나고 뒤돌아서면 그 사람의 얼굴에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표정이 떠오른다. 웃음기가 가신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리거나, 음험하고 차갑고 비열한 표정은 시청자들만 볼 수 있는 일종의 ‘방백’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누가 로라 파머를 죽였냐고? 모두에게 혐의가 있고, 모두가 비밀을 숨기고 있으며, 모두가 떳떳하지 않다. 심지어 가장 선하고 정의로운 인물로 제시되는 데일 쿠퍼마저도 극이 진행됨에 따라 모종의 변화를 겪는다. 종국엔 가장 무시무시한 표정이 그의 얼굴 위에 얼어붙는다.
 

애거사 크리스티로 대표되는 고전 미스터리의 익숙한 전제이지만, 드라마로 이런 이야기를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누군가 살해당했고, 모두가 수상하고, 모두가 그 죽음에 책임이 있다. 겉으로는 그토록 아름답고 아늑해 보이는 마을이지만, 그 안에는 죽음과 부패와 심지어 악마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다. 린치의 <블루 벨벳>의 유명한 오프닝 신처럼, 장미꽃 아래 떨어져 있던 사람의 잘린 귀 같은 그런 세계.

그리고 <트윈 픽스>의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육체관계로 얽혀 있는데, 문제는 이 모두가 치정 혹은 제도적으로 용인받지 못할 관계라는 것이다. 배우자 몰래 저지르는 불륜이라든가, 죽은 친구의 연인과 사랑에 빠진다든가, 재산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맺은 관계라든가.... 그들은 우울한 현실과 복잡한 삶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연애를 선택했고, 그 말로는 당연히 모두 처참하다. 배신과 기만, 거짓된 정체성의 폭로. 이별과 살인과 자살. 이 복잡한 치정 관계들은 로라 파머 사건과 직간접적인  관계가 있지만, 중요한 단서로 작동하면서 정교한 추리를 완성하는 수단으로 제시되진 않는다(시리즈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데일 쿠퍼는 추리하지 않는다. 그는 ‘계시’를 받는다). 로라 파머의 죽음 이후 연루된 이들의 사소한 비밀이 수사 과정에서 밝혀지거나, 당사자가 그 폭로를 막기 위해 어떤 행동에 나서면서 연쇄적으로 다른 사건들이 터지는 식이다. 즉 확실한 인과관계 없이 충동적인 생존본능에 의해 저질러지는 이러저러한 사건들이 주요 플롯을 이룬다. 그런 면에서 <트윈 픽스>는 일일드라마적 전통(내지는 미국의 소프 오페라, <가이딩 라이트>라든가 <제너럴 호스피털> 같은 드라마의 전통을 다시 쓰기 한 작품)1)에 가깝지 않은가 하는 해석도 가능해진다. 물론 회가 거듭할수록 악령과 명상, 신비로운 체험이 줄줄이 등장하면서 이야기의 장르는 오컬트 스릴러의 색깔이 상당히 진해지지만 말이다.
 

작년부터 왓챠를 통해 <트윈 픽스> 시즌 1, 2를 다시 본 다음 가장 최근작인 (25년 만에 돌아온) 시즌 3의 초반까지 챙겨보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데이빗 린치가 이끄는 대로 넋을 놓고 따라가며 그 낯선 세계의 토끼 굴을 탐험했다면, 이후의 무수한 자칭 타칭 ‘포스트 <트윈 픽스>’들까지 충분히 경험했던 2021년의 관람자로서 새롭게 느낀 점은 <트윈 픽스>가 얼마나 느슨한 이야기였나 하는 점이다. 이를테면 마크 프로스트가 로라 파머 살인 사건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은 실제 사건이 있다. 스무 살의 헤이즐 드루(Hazel Drew)는 1908년 강변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수사 기법이라는 게 전혀 확립되지 않은 20세기 초의 그 살인 사건은, 남자들과 쉽게 어울렸고 낯선 사람도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던 예쁜 아가씨의 죽음을 둘러싼 수상쩍은 호기심과 무성한 소문과 함께, 이 남자 혹은 저 남자 모두가 의심스러운 정황에 대한 모호한 가능성만 여럿 남긴 채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마크 프로스트가 헤이즐 드루 사건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꼬마 시절 할머니가 잠자리에서 들려준 일종의 유령 이야기를 통해서였다고 한다. 할머니는 꼬마들이 밤에 집 밖으로 나가 놀면 안 된다는 교훈을 심어주기 위해 미제로 끝났던 헤이즐 사건을 다소 무시무시하게 각색하며 초자연적인 무언가와 섞어서 마크 프로스트에게 들려주었다고 했다. 프로스트에게는 그 비극적인 사건의 주인공 헤이즐에 대한 상상이 뇌리 어딘가에서 계속 맴돌고 있었고, 결국 수십 년 뒤 헤이즐은 로라 파머로 재탄생했다.2)

그리고 그 수수께끼 같은 죽음의 이야기가 재탄생한 1990년 전후의 시기는 어떨까. 인터넷 등의 각종 통신 수단이 발달하기 직전이었던, 말하자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대’ 이전의 시기다. 비밀은 얼마든지 감출 수 있었고 이중생활이 얼마든지 가능했으며 심지어 악마가 인간 세계에 끼어드는 것도 가능했던 시기다. 그래서 프로스트와 린치는 그 모호한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여, 정확한 전개라든가 캐릭터의 일관성 같은 요소들은 거의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유연상 작용처럼 드라마를 만들었는데, 그런 헐거운 흐름과 자유로운 리듬이 전형적인 드라마투르기에 익숙했던 당시 시청자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을 것 같다. 작가가 완전히 장악하여 정확하게 짜놓은 세계 속에서 편안하게 누워 감상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구전 설화를 듣는 것처럼, 화자가 말하던 도중에 갑자기 잊어버리고 다른 주제로 휙 건너가는 것처럼 다소 맥락 없고 뒤죽박죽된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쩌면 눈으로 본다기보다 귀로 듣는 옛 이야기의 부활을 목격한 것 같은 착각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드라마 내내 과잉처럼 쓰이는 바달라멘티의 음악 역시 그 효과를 강화시킨다).
 

조금만 뒤로 물러서서 다시 큰 그림을 보자. 데이빗 린치는 드라마 <트윈 픽스> 이후 영화 <트윈 픽스(Twin Peaks: Fire Walk With Me)>(1992년)를 재차 만들었다(웨이브와 구글 플레이 무비즈에서 대여 혹은 구매로 볼 수 있다). 이는 시즌 1의 프리퀄로서, 드라마에서는 늘 누군가의 회상 신이나 대사를 통해서만 언급되던 로라 파머가 처음으로 주인공으로 극 전체를 장악하며 살아 움직인다. 드라마에선 ‘냉혹한 미녀’처럼 그려지던 로라 파머가 영화에선 좀더 순진하고 따뜻하고 가련한 인물로 재해석되었음을 목도하게 된다. 그리고 데이빗 린치의 딸이자 영화감독 겸 작가인 제니퍼 린치는 소설 <로라 파머의 비밀 일기(The Secret Diary of Laura Palmer)>를 썼다. 이것은 로라 파머가 생전에 썼던 비밀일기장의 내용을 상상하여 완성한 책이다. 1990년의 드라마 시즌 1과 시즌 2사이에 출간된 스핀오프다. 당시 22살이던 제니퍼 린치는 데이빗 린치와 마크 프로스트로부터 로라 파머에 대해 처음 듣고 자신이 그 인물과 대단히 가깝다고 느꼈으며, 마치 ‘자동기술’을 하듯이 즉각적으로 이 소설을 써내려갔다고 밝혔다.3)
 
헐거운 ‘트윈 픽스’ 세계관에서 작가와 감독이 미처 신경쓰지 못했던(혹은 않았던) 빈 공간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을 때, 시청자들이 의외로 그 여백에 열렬히 반응하며 새로운 디테일을 적극적으로 요구했을 때, 감독은 별개의 영화와 그리고 25년만의 새로운 시리즈로 그에 응답했다. 감독의 딸이자 또다른 크리에이터는 거기서 파생된 로라의 일기라는 새로운 픽션을 완성했다. <트윈 픽스> 시즌 1이 시작될 무렵에는 미처 계획하지 않았던 디테일과 주석이 지속적으로 덧붙여지면서, 트윈 픽스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도 그만큼 확장된 것이다. 드라마 시즌 1~3, 독자적인 장편 영화와 장편 소설까지, 이것이 지금의 우리에게는 상당히 널리 알려진 팬픽션 혹은 유니버스와 그렇게 많이 다를까? 어쩌면 유니버스라는 개념이 지금처럼 확고하게 대중적인 무언가로 정착되기 이전의 초창기 버전의 형태였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어쩌면, <트윈 픽스> 제작진마저 데일 쿠퍼처럼 트윈 픽스의 세계에 갇혀 버린 건 아닐까?
<트윈 픽스> 시즌 3의 2화에서, 외팔이 남자는 데일 쿠퍼에게 묻는다. “이건 미래인가요? 아니면 과거인가요?” 과거에서 상상한 미래라고 해야 할까. 


***
1) 아래 아티클에 따르면, 각본가 마크 프로스트는 극중극 형태로 등장하는 <사랑의 초대(Invitation to Love)>를 소프 오페라의 노골적인 패러디로 작심하고 썼다고 한다.
https://www.dazeddigital.com/film-tv/article/40177/1/invitation-to-love-soap-within-twin-peaks-david-lynch
2)https://www.dailymail.co.uk/news/article-4336146/The-real-life-murder-Sand-Lake-NY-inspired-Twin-Peaks.html
3)https://en.wikipedia.org/wiki/The_Secret_Diary_of_Laura_Palmer

연관영화 : 트윈 픽스(TV 시리즈) (그래메 클리포드다이앤 키튼데이비드 린치듀웨인 던햄레슬리 린카 글래터마크 프로스트셀렙 데스챠넬스테판 길렌홀올리 에델제임스 폴리조나단 세인저토드 홀란드티나 래스본팀 헌터 , 1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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