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두 몸이 마주칠 때, 두 세계가 충돌할 때 더티댄싱, 1987

by.김용언(미스테리아 편집장) 2021-09-23조회 7,361

1989년, 나는 그때 중학교 1학년이었다. 동급생 누군가가 요즘 제일 잘 나가는 비디오테이프를 공수해왔다면서 방과 후에 또 다른 누군가의 집으로 모이라고 했다. 그 영화는 에밀 아돌리노의 1987년 작 <더티 댄싱>이었다.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르고 그냥 보기 시작했다. 어둑어둑하던 좁은 방 안에서 영화를 본 그 100분의 시간이 굉장히 많은 것을 바꿔놓았던 것 같다. 열네 살의 나는 <더티 댄싱> 속 열일곱 살 프랜시스(‘베이비’라고 더 자주 불리는)와 다를 바 없었다. 그때까지 내가 TV ‘주말의 명화’에서, 혹은 부모님이 가끔 극장에서 보여주었던 ‘감동 대작’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격렬한 에너지와 성적 흥분을 처음으로, 지직거리는 화질의 비디오테이프로부터 느꼈던 것 같다. 그 감정이 너무 낯설고 격렬해서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댄스 영화에서 그때에 비견할 충격을 느낀 건 이후 고등학교 때 피카디리 극장에서 봤던 바즈 루어만의 <댄싱 히어로>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

1963년 여름, 베이비는 가족들과 함께 호화로운 산장에서 여름휴가를 보낸다. 나이 많은 어른들 위주의 레크리에이션 프로그램에 억지로 참여하다가, 우연히 밤중에 외딴 별채에서 펼쳐지는 댄스파티를 목격하고 그에 매료된다. 산장에서 일하는 청춘남녀가 모여든 이 파티장의 주인공은, 리조트의 춤 선생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댄서 자니와 페니 듀오다. 베이비는  페니가 여름 방학 동안 산장에서 일하던 예일대 학생 로비와의 관계 때문에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고, 낙태 수술 비용 때문에 난감해한다는 것까지 알게 된다. 베이비는 의사인 아빠에게 선의의 거짓말을 하며 돈을 빌려 페니에게 건네고, 그가 수술을 무사히 마칠 때까지 자니의 댄스 파트너 역을 대신 하기로 한다. 춤을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던 순진한 소녀 베이비가 자니와 함께 하루 종일 춤 연습을 하면서 사랑에 빠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성인이 되어서, <더티 댄싱>을 몇 번 더 봤다(가장 최근의 시청 경험은 영화가 왓챠에 올라왔을 때다). 어린 시절에는 순전히 ‘나쁜 소년’과의 로맨스를 꿈꾸는 하이틴 로맨스 영화처럼 받았들였지만, 좀더 성장하고 시대적 배경에 대한 지식이 쌓였을 때 다시 본 <더티 댄싱>은 또 달랐다.

일단 산장 주인은 아르바이트생을 두 종류로 나눠서 고용했다. 예일대 및 하버드대 학생들은 접객 웨이터로 일하고, 여름에 이곳을 찾는 부유한 가족들에게 ‘미래의 예비 사위’처럼 선보이면서 그 가족의 ‘딸들’을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임무가 제시된다. 반대로 나머지 오락 담당 직원들(자니는 이쪽에 속했다)은 그 ‘딸들’에게 절대로 손가락 하나도 터치하면 안 된다고 금지당한다. 넘보지 못할 나무라는 것이다. 섹스에도, 심지어 휴가 기분을 내기 위한 가벼운 수작질에도 계급의 공고한 벽은 일상적으로 작동한다. 과연 이곳에 놀러온 사람들과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 사이의 교류가 가능할까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라인딩이라든가 더티 댄싱은 하층 계급이 지하실에서 추고, 위층의 부유층은 가족들과 폭스트롯을 추지요.”(<무비: 우리가 사랑한 영화들> 중 ‘더티 댄싱’ 편) 그런데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화학 작용이 일어난다. 얌전한 ‘아빠딸’ 베이비가 직원들 중 최고의 인기남인 자니에게 매혹되면서 그 교류가 시작된 것이다. 자니의 육체의 압도적 매력 때문에, 베이비는 지금껏 이런 게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욕망의 세계로 곧장 이끌려 들어가버린 것이다. 책으로도, 그리고 가족들이 속한 안온한 세계 인근에서도 접한 적 없던 색정적인 에너지.

물론 그 에너지가 가슴 아픈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더티 댄싱>이 1987년 미국에서 개봉했을 당시 ‘낙태’라는 주요 설정 때문에 광고주였던 여드름 연고 회사 측에서 난색을 표했던 것처럼, 원치 않는 임신을 수술로 중단하려 한다는 설정이 비교적 가까운 과거인 1980년대에조차 ‘대중’ 영화에서 등장하긴 쉽지 않았다(하물며 <더티 댄싱>의 배경은 1963년1)이다). 하지만 각본가 엘리노어 버그스틴은 그 설정을 삭제하거나 돌려 말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중적인 영화일수록 도덕에 관련된 문제를 겁내지 않고 다뤄야 한다고 봐요. 그 영화가 관객의 생각을 바꿀 수 있으니까요.”(<무비: 우리가 사랑한 영화들> 중 ‘더티 댄싱’ 편)
 

<더티 댄싱>은 춤을 못 추던 소녀가 사랑의 힘으로 춤을 매우 잘 추게 되는 이야기, 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이상주의자였던 소녀가 현실에서 어떤 한계선들을 맞닥뜨리고 자기 방식대로 그것에 맞서며 넘어서는 이야기기도 하다. 극 중에서 가장 슬픈 대사 중의 하나는 베이비가 “아빠를 실망시켜서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아빠도 저를 실망시켰어요”라고 울면서 선언하는 장면이다. 이는 페니의 임신과 낙태에 관여하게 된 베이비가 그로 인해 다정한 가부장이었던 아버지의 편견과 맞닥뜨렸고, 가부장의 세계에 머물 것인지 자니의 세계를 변호할 것인지의 갈림길에서 가부장의 규범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공개적인 선택을 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에서 언급되는 또 다른 한계선은 베이비 자신의 편견에서 비롯된다. 베이비의 언니 리사는 외모 치장에 신경을 많이 쓰고 부모님이 정해주는 결혼에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다. 아빠가 산장 주인에게 베이비를 두고 “세상을 바꿀 아이”라고 소개하는 초반 장면에서, 베이비는 정치에 관심 많은 책벌레인 자신에 대해, 언니 같은 또래 여자들과는 다른 자신에 대해 살짝 자부심을 갖고 있음을 숨기지 못한다(아빠의 소개말을 들은 산장 주인이 리사를 향해 “아가씨는 뭘 할 거지?”라고 묻자 베이비는 “언니는 세상을 장식할 거예요”라고 대꾸하고 그 순간 리사의 얼굴은 살짝 굳는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자니의 세계에 들어서고, 지금까지 접한 적 없던 이들과 교류하고, 가끔은 거짓말과 불법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몸에 대한, 삶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면서 베이비의 시각은 크게 달라진다. 언니 리사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진다. 은연중에 자신보다 어리석다고 생각하던 리사의 성정을 다정한 공감과 따뜻한 연민으로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언니가 건네는 위로를 거절하지 않고 그 어깨에 기대는 변화를 보인다.

넷플릭스에서 <무비: 우리가 사랑한 영화들> 시즌 1이 공개됐을 때 주저없이 ‘더티댄싱’ 편부터 시청했다. 두 명의 여성, 각본가와 프로듀서가 의기투합하여 (멱살 잡고) 완성시킨 이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잔뼈 굵은 거물로부터 “돈 낭비 하지 말고 필름 태워버리쇼”라는 평을 받았지만, 일반 관객 1000명을 대상으로 연 시사회에서 “모두가 발을 구르며 환호를 질러대는 격렬한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개봉 직후부터 무려 “19주 동안 박스오피스를 지배했고, 그때까지 나왔던 미국 독립영화 중 최대의 흥행 수익을 만든 영화”가 되었다. 제작 과정에서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춤과 음악과 사랑과 성장에 대한 “백만불짜리 제목”의 이 영화에 대한 애정과 믿음만으로, 초저예산의 한계를 뚫고 완성해낸 제작진 모두  그 유명한 주제가처럼 ‘내 인생의 최고의 순간’((I've Had) The Time Of My Life)을 만끽했음을 알려준다. <더티 댄싱>을 본 이들이라면, 이 50분가량의 다큐멘터리도 꼭 관람하시길 간곡하게 권한다. 대중영화가 성취하는 멋진 지점,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것은 아닐지라도 대중들이 원하는 어떤 간지러운 지점과 딱 맞아떨어졌을 때 폭발하는 시대정신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다.


***
1) 여기서 아니 에르노의 짧은 책 <사건>(윤석헌 옮김, 민음사 펴냄)이 떠오른다. 1963년 여름 미국에서 베이비가 산장에 도착하고 페니가 원치 않는 임신 때문에 괴로워할 때, 불과 몇 달 뒤인 10월 프랑스에선 대학생 아니 에르노가 불법인 임신 중절 수술을 받기 위해 울음을 참으면서 여기저기 수소문하는 굴욕적인 기억이 세세하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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