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와 가해의 알레고리 소리도 없이, 2019

by.조혜영(영화평론가) 2021-08-13조회 8,461

무해한 풍경과 친절한 예의
한낮의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길가 한편의 나무 그늘 아래 귀가 잘 안 들리는 할머니가 농작물을 작은 소쿠리에 담아 팔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 길목에서 할머니는 맹목적일 정도로 성실하게 자리를 지킨다. 매일 늦은 오후 퇴근해 자전거를 타고 동생이 있는 집에 돌아가는 계란장수 청년은 말도 없이 비닐봉투에 계란 다섯 개를 담아 할머니에게 주고 떠난다. 눈이 부시도록 쨍한 연두 빛 논밭을 가르며 달려가는 자전거 위로 분홍과 연보라가 섞인 노을이 하늘에 스며든다.

홍의정 감독의 첫 장편영화 <소리도 없이>는 인스타그램의 여행 포스팅에 등장할 법한 무해하고 환상적인 풍경을 오프닝의 시체 처리 장면 바로 다음에 붙인다. 시골 장터의 평범한 계란 장수처럼 보였던 창복(유재명)과 태인(유아인)은 조직 폭력배들에게 고문과 살인을 위한 장소를 제공하고 깔끔하게 시체처리까지 해주는 사업장을 운영 중이다. 이들의 일은 공유오피스 대여사업처럼 일상적이고 체계화되어 있다. 꼼꼼하게 우비, 고무장갑, 위생모자를 착용하던 창복은 자신이 입은 노란색 우비가 태인이 어린 시절 입던 것이라며 회상에 젖기까지 한다. 때리는 사람의 신장에 맞춰 사람을 매달고, 피가 묻지 않게 겉옷을 보관해주고, 바닥에 넓게 비닐을 깔아주는 작업과정은 전문적이고 분업화되어있다. 이들은 서비스 정신이 투철한 업계의 프로다.
 

하지만 창복과 태인은 왜 그 사람이 납치되어 살해당하는지 절대 묻지도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잠시 그 사람의 처지를 동정하고 안타까워할 수는 있어도 거기까지이다. 곧 살해당할 그는 조립라인 위의 처리해야할 일거리에 불과하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은 그들의 몫이 아니다. 폭력과 살인의 끄트머리에서 포장과 폐기를 담당하는 창복과 태인은 스스로를 악인이라  생각지 않는다. 특히 창복은 죄를 사해줄 것이라 믿는 다종다양한 종교에 기대 죄책감을 가볍게 털어 버리고, 근면성실과 겸손을 강조하며 지루한 충고를 쏟아내고, 소소한 배려와 선행을 베풀며 자신을 일상을 살아가는 소시민이라 믿는다. 창복은 ‘다 너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이 모든 것은 기복신앙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한 행동이다. 태인은 불만이 있어 보이지만 창복의 명령을 거스르지 않는다. 태인은 과거 어느 한 시점에서 누구도 그의 의견을 원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는 마지막 ‘판단’을 내린 후 생각을 멈춰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는 더 이상 소통하기를 거부한다.

창복과 태인은 가능한 다른 이들의 삶에 얽히지 않으며 그들의 세계를 최대한 축소하고 경량화한다. 그들의 삶에 타인은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교류하고 돈 벌며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친절과 예의이다. 이 영화에서는 언뜻 악인과 선인의 경계가 모호해 보인다. 드러난 행위만 보면 모두가 성실하게 자기 일 잘 하고 예의 바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예의바른 태도가 도덕과 윤리를 대치한다. 그들은 꼬박꼬박 ‘선생님’ ‘실장님’ ‘부장님’이라 부르며 서로를 높이는 호칭을 붙이고 존대를 한다. 일이 끝나면 ‘수고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같은 말도 잊지 않는다. 조직 폭력배 실장은 태인이 말을 안(못) 한다고 하자 입을 크게 벌리고 천천히 말하며 입술을 읽게 하는 ‘배려’를 베푼다. 유괴 아동을 인계한 범죄자들은 아이들이 잠시라도 편하게 머물도록 알록달록한 가구와 장난감이 있는 놀이방을 갖춰둔다. 하지만 이 모든 친절과 예의범절, 상대방을 배려하는 ‘선한’ 행위에 실제로 타인의 의향과 행위의 맥락은 빠져있다. 그들이 공들여 제공하는 태도와 형식은 자기 목적과 이익을 위한 것이다.
 

<소리도 없이>는 오프닝에서 상세한 시체처리 과정과 목가적인 농촌풍경을 붙여, 형식과 내용의 뒤틀어짐, 순간적인 기분과 지속적인 정동의 불일치, 사건의 맥락과 단발적 행동의 모순이 팽배한 동시대성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창복의 ‘노란색 우비’ 대사는 둘이 오래 함께 일한 사이좋은 직장 선후배나 유사 부자관계인 것처럼 들리지만, 곱씹어보면 창복이 태인을 어릴 때부터 착취해왔다는 사실을 가늠해볼 수 있다. 혹은 창복이 태인을 납치한 걸 수도 있다. 창복과 태인의 관계에서 태인은 분명 피해자다.  

토끼의 기지와 별주부의 어리숙함
홍의정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 때 <별주부전>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바 있다. <별주부전>에서 별주부는 용왕의 병 치료에 쓸 약으로 토끼의 간을 구하기 위해 뭍으로 올라온다. 별주부는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겠다며 수궁으로 토끼를 유인하지만, 토끼는 육지에 간을 두고 왔다는 기지를 발휘해 목숨을 구한다. <소리도 없이>에서 태인은 별주부이고 유괴 아동 초희(문승아)가 토끼다. 납치된 초희는 토끼 가면까지 쓰고 있다. 창복과 태인은 유괴조차 자기들의 의지로 행하지 않는다. 영화는 ‘의도치 않게’, ‘엉겁결에’를 강조한다. 수동성의 강조는 가해자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현실에서 ‘어쩔 수 없었다, 의도하지 않았다, 피치 못했다’는 모두 가해자들의 반복되는 전형적인 대사가 아닌가? 처음에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진행되는 사건 속에서 선택의 계기는 늘 존재했다. 분명 피해가 발생했고 돈을 받아내기 위한 인질이 된 초희는 그 피해자이다. 그런데 가해자가 분명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질적인 세계의 초희가 태인의 삶의 반경에 들어오게 되면서 태인은 처음으로 스스로 생각하게 된다. 피해자인 초희가 역으로 자신과 동생을 도와주는 행동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초희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눈치를 보고 창복과 태인의 기분을 거스르려 하지 않는다. 난장판인 집안을 치우고 태인의 동생 문주를 씻기고 식사예절을 가르친다. 방치되어있던 문주는 교육을 잘 받은 중산층 가족의 초희를 만나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 태인조차도 이러한 초희에게 마음을 연다. 마음의 동요는 타인을 인지하게 하고 그것은 생각과 판단을 요청한다.

별주부 역시 창복과 태인처럼 자기 의지보다는 용왕에 대한 충심과 자기 관직의 수호를 위해 움직인다. 이 우화에서 토끼는 낯선 세계에서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상황을 판단한다. 뭍에서도 토끼는 약자이기 때문에 늘 포식자들의 눈치를 보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기위해선 머리가 좋아야 한다. 용왕이 간을 원할 때 발휘한 기지는 갑자기 생겨난 능력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들만 귀하게 여기는 집안에서 차별을 받으며 자랐을 초희는 부모의 맘에 들기 위해 늘 가면을 쓰고 자신의 속내를 숨기며 살아왔을 것이다. 태인의 집에서 초희가 한 행동은 토끼의 기지와 유사하다. 그렇다고 태인과 문주, 부모를 향한 초희의 마음이 완전히 가짜인 것은 아니다. 그들 사이의 감정의 교류는 순간적으로 진짜일 수 있다. 태인이 초희를 장기밀매업자에게 보냈지만 마음을 바꿔 구한 것, 초희가 무서울까봐 화장실 밖에서 손뼉을 쳐준 것, 유괴와 몸값 요구에 참여했지만 가족들에게 돌려보낸 것도 진짜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개별적 선행이 애초의 가해를 뒤집을 순 없다. 반복해 말하지만 태인은 유괴범이고 가해자이며, 초희는 유괴된 아동이며 피해자이다.
 

영화는 이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태인을 약자이자 피해자로 만드는 창복을 제거한다. 태인의 선택을 대리하는 창복이 사라지면서 태인은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게 된다. 그 순간에 태인은 조직폭력배 실장이 죽으면서 남기고 간 양복을 입는다. 양복은 좁디좁은 자신의 세계 밖의 다른 삶을 상징한다. 그러나 선악을 판단하고 도덕과 가치를 사유하는 주체적 삶은 그리 쉽지 않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태인은 자신의 선택으로 가장 선한 일을 했다고 판단한 바로 그 순간, 자신이 유괴범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홍의정 감독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피해 생존자이자 머리를 잘 쓰는 주체적인 토끼보다는 어리숙하고 용왕의 말에 복종하는 수동적인 별주부에 감정이입을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별주부는 용왕만큼은 아니지만 토끼를 납치한 가해자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초희는 가해자를 정확하게 지목하고 호명한다. 태인은 그 지명이 힘에 겨운 듯 도망치며 동경했던 ‘사유하는 주체’의 양복을 벗어 던진다. 

도덕이 사라진 시대의 알레고리
발터 벤야민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낭만주의 예술에서 상징에 비해 폄하 당하던 수사인 알레고리를 재개념화하고 조명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상징은 고대 그리스 조각처럼 순간적으로 총체성을 이루며 명징하고 스스로 완결성을 갖는 아름다운 기호이다. 반면 알레고리는 우연적이고 무정형적이며 여러 시간적 계기 속에서 다의적으로 해석되고 역사적 번역과 파편적 몽타주의 작동을 요구한다. 알레고리에서 의미는 은폐되어있음으로 해서 소통의 (불)가능성과 다의성이라는 의미작용 그 자체를 노출시킨다.
 

<소리도 없이>는 <별주부전>처럼 피해와 가해, 즉 도덕의 알레고리이다. 벤야민이 재개념화한 알레고리처럼 현대 사회에서 피해와 개해의 문제는 명징하지 않으며 복잡하다. 피해자성과 가해자성이라는 통일된 정형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위치도 다중적이고 뒤집어질 수 있다. 피해자는 주체적이고 똑똑할 수 있다. 가해자는 소소한 선행을 베풀고 예의바르거나 어리숙할 수 있다. 또한 한 사건에서 가해자인 이가 다른 사건에서는 피해자일 수 있다. 게다가 현대의 소비주의 사회에서 가치와 형식은 쉽게 뒤집어진다. 무해한 아름다운 풍경, 선행, 예의 이런 것들은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모두가 고객이고 모든 행위가 ‘손해 보지 않으려는’ 거래일뿐인 시대에 단순히 서비스의 형식일 뿐이다. ‘착한 가격’, ‘착한 소비’처럼 말이다. 역으로 사람은 손쉽게 상품이 된다. 유괴범과 장기밀매업자들의 대화에서 아이들은 고객 만족을 위해 품질을 유지해야 하는 거래 품목일 뿐이다.

도덕이 사라진 시대, 피해자와 가해자의 정형화된 모습도 부재하고 그 위치성도 복합적인 시대에, 알레고리의 서사는 그 불일치와 혼란을 드러낸다. 그러나 알레고리가 각 사건에 분명히 존재하는 피해와 가해 사실을 지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알레고리는 피해와 가해가 발생하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분명히 존재함에도, 피해자와 가해자의 양상이 기대한 바와 다르다며 혼란스러워하는 현실을 드러낸다. 고전 서사 <별주부전>이 토끼의 ‘간계’와 별주부의 ‘충심과 어리숙함’을 강조하며 순간적으로 감정이입을 뒤집지만 납치 사건에서 피해자는 토끼요 가해자는 별주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피해와 가해의 서사와 캐릭터는 복잡하고 기대를 벗어나 혼란스럽게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피해자와 가해자 혹은 피해와 가해 사실을 규정하고 밝혀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양복의 무게
태인은 양복을 입으면서 처음으로 생각하는 주체가 된다. 그의 삶에서 이 계기는 무엇을 만들 것인가. 그는 사유와 판단의 주체로서 가해자임을 받아들인 것인가, 아니면 사유 없는 행동을 수행하며 테이프에 녹음된 기도소리에 기대어 살아갈 것인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즉석 사진의 인화과정처럼 검은 무지 화면 이후 서서히 드러나는 ‘소리도 없이’라는 제목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영화는 태인처럼 뒤늦게 자신을 호명한다. 자신도 알지 못하게, 의도치 않게 ‘괴물’이 된 태인은 사유를 통해 대면한 자신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이 영화의 처음 제목은 ‘소리도 없이 괴물이 된다’였다). 타이틀씬 이후 영화는 창복, 태인, 초희, 문주가 따뜻한 햇살 아래 즉석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멜랑콜리한 이 사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초희가 부모에게 보낼 사진을 만들기 위해 억지로 슬퍼 보이는 표정을 지었던 사진과 비교해 무엇이 더 진실인가. 둘 다 진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다. 저 순간의 넷은 즐거웠지만 그렇다고 초희가 유괴된 아동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이미지는 상징처럼 순간적이다. 순간을 포착한 스냅 사진 이미지는 알레고리 속에서 총체화를 방해하는 역할을 할 때 비로소 의미작용이 가능해진다. 말하기를 멈췄던 태인은 그 스스로가 소통불가능성 시대 의미작용의 알레고리였다. 사유를 시작하고 가해자가 스스로 가해자임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소통의 시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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