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 초록색 전구불빛이 가만히 당신을 응시할 때 남매의 여름밤, 2019

by.조혜영(영화평론가) 2021-06-18조회 7,018

<남매의 여름밤>(윤단비, 2019)은 이젠 거의 멸종위기라고 전해지는 ‘시네필’의 영화다. 시네필은 영화에서 자신만의 특별한 순간, 장소, 인물, 움직임, 빛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에 빠질 만한 영화적 이미지와 조우하면 흘러가는 그것을 소유하고자 절박한 몸짓으로 반복적으로 관람하는 물신주의자다. 실제로 영화를 재생해볼 뿐만 아니라 기억에 각인된 강렬한 이미지를 꺼내 가상적으로 돌려보기도 한다. 시네필의 반복강박을 야기하는 영화적 이미지들은 파편적이고 비인과적이며 그래서 자주 서사와는 상관없이 떠오른다. 영화학자 로라 멀비는 그의 저서 『1초에/24번의 죽음』에서 이러한 시네필을 ‘소유적 관객(possessive spectator)’이라 칭한다. 필름 시대를 지나 디지털 환경에서도 시네필은 돌려보고, 뜯어보고, 반복해 보는 매체의 특징을 맘껏 누리며 “텍스트 본래의 응집력을 공격하면서 예상치 못한 감정으로 열리는 즐거운 회상을”(35) 가져오고 그 과정에서 사색의 여지를 마련한다.
 
남매의 여름밤, 재롱부리는 박승준을 바라보는 나머지 가족

<남매의 여름밤> 역시 인과적이고 극적인 서사보다는 여름밤의 빛과 공기, 냄새와 소리를 감각하게 하는 것에 집중한다.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은 아빠(양흥주)는 살던 집을 빼고 옥주(최정운), 동주(박승준) 남매와 함께 할아버지의 오래된 이층 양옥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곧이어 부부 갈등 때문에 집을 나온 고모가 이들에 합류한다. 옥주와 동주, 아빠와 고모,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는 그렇게 여름 한 계절을 함께 보내게 된다. <남매의 여름밤>은 캐릭터에 대한 서사적 정보를 거의 주지 않는다. 아빠와 고모가 겪고 있는 경제적 곤란과 부부 갈등이 무엇인지, 왜 옥주는 엄마를 미워하는지, 할아버지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옥주는 남자친구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의 사연은 극도로 절제된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공감각적이고 중첩적인 감각과 단편적 기억의 환기를 통한 다중적 시간성이다. 관객들은 여러 겹으로 이뤄진 감각과 시간의 미장아빔(mise en abym)에 포획된다. 그러면서 감각과 시간은 공간화 되고 관객은 남매와 함께 ‘영화-집’에 머물게 된다.

<남매의 여름밤>에서 빛은 소리가 되고, 소리는 빛이 된다. 한낮의 뜨거운 빛은 끈적이는 장판에서 맨발이 떨어지는 소리가 되고, 서서히 열기가 식어가는 밤공기는 오래된 이층 양옥집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냄새가 되며, 환하게 열어젖힌 창으로 흘러나오는 저녁밥 냄새는 안팎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와 섞이고, 마당의 풀벌레 소리는 어두운 밤 잠 못 드는 할아버지가 켜놓은 낡은 전축 스위치의 초록색 전구불빛이 되고,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옛날 노래 소리는 할아버지의 삶과 그 삶이 가꾸고 거주해온 집이 된다.
 
남매의 여름밤, 자는 박승준을 바라보는 양흥주

그리고 커다란 마루 창문 덕택에 안이 훤히 다 보이는 집, 시시각각 다르게 빛이 들어오며 변신하는 집은 그 자체로 네모난 프레임의 영화가 된다. 그 ‘영화-집’에서 옥주와 동주 남매가 보낸 여름방학은 아빠와 고모의 지난 추억과 중첩되고, 그 시간이 옥주와 동주 남매가 성장해서 기억하게 될 특별한 순간이 될 것이라는 암시로 이어진다. 심지어 아빠는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 장난(방학인데도 학교 갈 시간이라고 깨우기)을 동주에게 반복하고,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를 모실 요양원을 알아보고 오는 길에 옥주 남매가 자신이 병이 들면 동일하게 처리할까봐 걱정한다. 엄마가 보고 싶어 꾸었다던 고모의 꿈은 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엄마를 만난 옥주의 꿈으로 반복되며 옥주의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 연극처럼 상연된다. 시간의 반복 속에서 차이를 각인하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처럼 <남매의 여름밤>은 삶의 시간을 담담히 관조한다.

하지만 시간의 반복을 통달하고 희미한 회한만 남은 노년의 남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오즈의 영화와 달리, <남매의 여름밤>에는 그 시간의 초입에서 허우적대는 생경함과 혼란스러움이 공존한다. 그 시간을 경험하고 바라보는 주체가 사춘기 소녀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흔한 짝패인 장난기 많고 철없는 어린 남자 아이가 아닌, 사춘기 소녀의 시선으로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지켜보게 한다. 이제 막 인생을 진지하게 성찰하기 시작한 옥주와 인생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들어선 할아버지는 삶의 주기에서 가장 사색적인 시기를 살고 있는 이들이다. 옥주는 자신의 정체성뿐 아니라 자신과 타인의 관계, 그리고 그들이 거주하는 시공간에 대해 고민한다. 독립적이고 자존심이 센 옥주는 자기 영역이 중요하다. 그래서 모기장으로 자기 영역을 확실히 주장하는 만큼, 할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사는 것을 허락받았는지 아빠한테 반복해 확인하고 할아버지의 집을 아빠와 고모가 자신들의 편의대로 처리해버리려는 것에 반발한다. 옥주는 할아버지에게 호기심이 있고 도움을 주고 싶지만 독립된 개체로서의 그의 삶에 무례하게 침입하기를 원치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옥주 자신에게도 그렇게 대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옥주는 할아버지의 시간이 깃들여 있는 공간을 존중하고 그의 존엄을 지켜주고 싶다. 그 집을 포함해 맨들맨들해진 재봉틀, 오래된 사진첩과 담금주, 사용하기 편하게 나무에 묶어둔 정원용 가위와 물뿌리개, 방울토마토와 포도나무, 낡은 액자와 전축은 그와 함께 나이 들어 온 것이다.
 
남매의 여름밤, 고추를 따는 김상동을 바라보는 박승준

아빠와 고모는 나이가 많고 병든 할아버지의 시간을 앞서 계산한다. 할아버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계산하는 순간, 그의 현재는 덤이 된다. 하지만 옥주는 다르다. 현재 자기의 시간과 공간이 소중하듯이, 할아버지도 그렇다. 할아버지가 어색하고 낯설지만 잘 해드리고 싶은 옥주는 가족 중 유일하게 생일선물을 준비한다. 옥주는 할아버지가 생일선물인 모자를 쓸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계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옥주의 태도는 할아버지가 한밤중에 나와 홀로 낡은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미련>을 듣고 있는 장면에서 특별한 순간을 만든다. 노래 소리를 듣고 이층에서 내려온 옥주는 거의 말이 없고 가족에게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할아버지가 순수한 즐거움 속에서 자기만의 시간여행을 하며 노래를 감상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그러나 옥주는 더 다가가지 않고 조심스럽게 할아버지에게 보이지 않을 이층 계단으로 올라와 앉는다. 옥주는 그 노래를 함께 듣지만 그의 시간과 공간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삶에 대한 존중이다. 할아버지가 소파에서 맥주 한 병을 탁자에 놓고 음악을 즐기는 방식은 그야말로 시네필적인 태도다. 앞뒤의 시간(서사적 맥락)을 계산하지 않고 그 순간을 즐기고 몰입하기, 타자가 들어올 여지를 주면서도 자기만의 이미지를 소유하기,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나 지나가버린 과거에 대한 회한 없는 시간을 만들기. 그것들은 설명이 필요 없는 순간이다. 이 장면은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재생해 보는 순간이기도 하다. 내게 <미련>의 노래 소리는 전축에 켜진 작은 초록색 전구불빛과 전기 연장선 스위치의 주홍색 불빛으로 각인되어 있다. 나도 그 장면을 보지만, 그 불빛들도 나를 가만히 응시하며 여름밤의 공기를 전한다.
 
남매의 여름밤, 온가족이 함께하는 저녁의 집

옥주가 자기 공간을 고집하면서도 필요한 순간에는 고모와 동주에게 공유했던 것처럼 그리고 할아버지의 노래를 같이 들으면서도 그를 방해하지 않았던 것처럼, <남매의 여름밤>은 여름의 개방성과 투명성을 통해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소유적이면서도 공유적인 체험을 사색하게 한다. 낯선 거리를 두고 타인을 존중하면서도 그의 내밀하고 사적인 시공간을 경험하게 해주는 영화 그리고 영화관이 새삼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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