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미국 극장이 문을 닫았을 때

by.홍수경(영화 저널리스트) 2020-04-14조회 3,889
<바쿠라우> 온라인 스트리밍 페이지
 
할리우드 박스 오피스 뉴스 업데이트가 중단되었다. 미국 내외 박스오피스 정보를 공유하는 웹사이트 ‘박스오피스 모조’의 기록은 3월 19일이 마지막이다. 3월 17일부터 미국내 프랜차이즈 극장들이 미국질병본부 지시에 따라 일제히 문을 닫았다. 뉴욕의 예술영화 극장들도 대부분 뉴욕주의 지침에 따라 운영을 중단했다. 영사기는 멈췄고 스크린은 꺼졌다. 신작들의 개봉 연기 소식들만 앞다투어 이메일 함에 쌓인다. 자가 격리 기간 동안 넷플릭스에서 봐야할 영화 추천 리스트가 주요 영화 기사로 업데이트 된다. 영미권 매체에선 영화의 과거를 되짚는 기사들도 즐비하다. 몇 십 년 전 영화사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오늘이 영화사에 있어 무슨 기념일인지 등 영화 정보를 전달하는 기사들이 대부분이다. 현재의 영화는 존재감을 잃어가고 추억의 영화들이 이 힘든 시기를 달래주기 위해 소환된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미국을 위협하기 직전까지, 미국 언론은 <기생충>의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과 미국내 비영어권 영화 흥행순위 4위 입성을 축하하며[1], <기생충>이 미국 독립 영화계에 미칠 긍정적 전망을 기대하던 중이었다. <기생충>으로 개봉작 역대 최고 수익을 올리는 독립영화 극장도 등장하는 등 지역 극장에 미친 영향도 상당했다. 게다가 2월과 3월은 미국 독립영화계에 중요한 시즌이다. 선댄스 영화제에서 코리언 아메리칸 이민자 이야기를 다룬 <미나리>가 대상을 수상한 후, 이어지는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XSW), 뉴욕 트라이베카 영화제, 모마 뉴디렉터스/뉴 필름즈 영화제를 통해 상반기 독립영화들이 대거 쏟아질 예정이었다. <기생충> 미국 배급을 맡았던 네온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공개하며 배급 명가의 저력을 이어가던 중이었고, 오랜만에 신작 <퍼스트 카우>로 돌아온 켈리 리처트 감독은 개봉을 맞이해 관객과의 대화 일정으로 바빴다. ‘포스트 <기생충>’ 시대가 어떻게 펼쳐질지 설레며 맞이했던  3월의 생동감은 갑작스런 극장 폐쇄와 함께 어느덧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뉴욕 IFC 필름 센터의 영업 중단 메시지 (출처: IFC 필름 센터 페이스북)
 
극장을 잃은 개봉 영화들은 새로운 플랫폼을 찾아 나섰다. 유니버설의 애니메이션 <트롤: 월드 투어>가 극장 개봉을 포기하고 $20달러 프리미엄 대여 옵션으로 직행했을 때, 업계에선 ‘극장 창구의 신성함이 깨졌다’는 우려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온워드> <인비저블 맨> <엠마> <더 헌트> 등의 신작들이 뒤를 이어 아마존 프라임에서 공개되었다. 몇 번의 클릭으로 집에서 편하게 개봉작을 즐길 수 있게 되자, 극장 문화가 이대로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위기감이 SNS 상을 떠돌기 시작했다. 미국 극장은 전쟁 시기에도, 대공황 때도, 9/11 사태 때도 문을 닫은 적이 없었다. 국가적, 세계적 고비가 생길 때마다 극장은 관객의 불안을 달래주는 피난처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2020년 영화 관람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큰 극장들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문을 닫는다며 비장하게 물러섰지만 관객들은 극장이 없어도 영화를 즐기는 데 큰 불편이 없어 보이는 듯했다.
 
텍사스 블루 스타라이트 자동차 극장 (출처: Blue Starlight drive-in 페이스북)
 
극장에 대한 열망은 기대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문을 닫은 실내 극장과 달리 사회적 거리 두기가 보장되는 자동차 극장에 갑자기 관객들이 몰리기 시작한 것이다. 번화가에서 벗어나 있어 접근이 쉽진 않은 데도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 급하게 취소되었던 페스티벌 SXSW는 텍사스 자동차 극장을 미처 상영되지 못한 단편 초청작들을 선보이는 플랫폼으로 활용한다. 페스티벌과 극장을 모두 그리워하는 관객들을 위한 소규모 이벤트인 셈이다.  

인터넷 상영으로 관객을 유치하되 극장 수익은 지키는 색다른 실험도 시도된다. 해외영화제 수상작을 선보여왔던 배급사 키노 러버는 미국 독립 극장들과 제휴하여 인터넷 극장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각 극장 링크에서 티켓을 구매한 경우에만 접근할 수 있으며, 배급사는 극장과 그 티켓 수익을 나눈다. 첫 영화는 3월에 개봉한 <바쿠라우>다. 비록 오프라인 극장 시스템을 이용하진 않지만 협력을 통해 위기를 돌파하려는 대안적 배급이라 할 수 있다. 집에서 영화를 보더라도 중간 매개자로 극장이 존재한다는 걸 각인시키기 위해 디자인에도 공을 들였다. 

하지만 판데믹이 끝난 후 예전의 극장 관람 문화로 돌아갈 수 있을지에 관해선 누구도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극장이 재개장을 해도 2미터의 사회적 거리두기 제한은 한동안 지속될 테고, 인구 밀도 높은 공공장소를 경계하는 인식이 생길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극장 관람이 관객들에게 주는 유대감과 연결감, 가상의 소속감은 포기하기 힘든 긍정적 정서적 기능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며칠 전 월스트리트 저널에 극장 재개장을 촉구하는 기고문을 실었다. 그는 극장이 “사회 생활의 중요한 일부”이며 “이번 위기가 지나면 함께 사랑하고, 웃고, 우는 인간의 집단적 참여 행위의 필요성이 더 강해질 것”이라 호소한다. 놀란 감독 외에도 극장이 문을 닫으면서 극장의 부재를 안타까워 하는 영화계 인사들의 글을 종종 접하게 된다. 우리의 극장 문화는 앞으로 어떻게 변하게 될 것인가. 적어도 추억으로 남지 않기만을 빌어볼 뿐이다.  

[1] 인플레이션을 반영하지 않은 절대 수입액만 놓고 봤을 때 <기생충>은 <와호장룡> <인생은 아름다워> <영웅>에 이어 역대 비영어권영화 개봉 흥행 4위를 기록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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