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테일 단상

by.남동철(부산국제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 2020-02-27조회 3882
봉준호

‘봉테일’이 화제다. 봉준호 영화의 매력을 설명하는 단어인데 아카데미 4관왕 이후 초등학생도 아는 말이 된 것 같다. 봉테일은 그가 촬영현장에서 보여준 모습 때문에 붙여졌다. 미리 완벽한 스토리보드를 만들어서 촬영에 임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봉준호는 준비된 감독이다. 머리 속에 찍고 싶은 영화의 그림이 이미 완벽하게 들어 있으니 꼼꼼하고 치밀하게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살인의 추억>(2003)에서 형사가 갖고 다니는 수첩에 농협 마크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거나 <기생충>(2019)에서 부잣집과 가난한 집이 완벽한 대조를 이룬다는 점 등이 사례로 거론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영화에서 디테일을 이렇게만 이해하면 곤란하다. 영화에서 디테일이란 성격이 세심하다거나 준비를 철저히 한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다. 디테일은 영화라는 매체의 가장 흥미로운 속성 중 하나다.
 
살인의 추억 스틸

<기생충> 1막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일명 ‘믿음의 벨트’ 시퀀스가 있다. 기택 가족이 박사장 집의 가정부 문광을 내쫓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대목. 문광에게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택이 병원 진료를 기다리는 문광의 모습을 촬영하고 마침내 문광이 기침을 하는 사이 휴지통에서 핫소스 묻은 휴지를 끄집어내는 장면까지 5분여의 장면이다. 물 흐르듯 우아하게 편집된 장면들은 관객을 현란한 사기극의 현장에 초대한다. 기택 가족의 계획은 착착 맞아 떨어져서 그것이 악행이라 하더라도 마음 졸이며 응원하는 심정이 된다. 마침내 휴지통에서 핫소스 묻은 휴지를 집어들 때 저절로 웃음과 박수가 터져 나온다. 여기서 봉테일은 소품이나 세트의 문제가 아니라 한 장면 한 장면이 어떻게 설계되고 이어지는가에 있다. 피자 가게에서 기택 가족이 피자를 먹으며 핫소스를 뿌리는 장면은 휴지통의 핫소스와 연결되고, 감정이 고조된 기택의 대사는 기우가 연기 연습을 시키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리는 장면들이 마치 복잡한 퍼즐을 맞추는 듯한 쾌감으로 상승된다. 영화사에선 몇몇 범죄영화에서 이런 류의 디테일에 특별한 장을 할애하고 있다. 줄스 다신의 <리피피>나 장 피에르 멜빌의 <형사>같은 영화다. 범죄의 모의와 실행을 정밀하게 묘사한 영화들로 디테일이 어떻게 영화적 감흥을 만들어내는지 잘 보여준다. 
 

장면들이 빈 틈 없이 연결되어 만들어지는 이런 극적 흥분은 잘 만든 액션영화에서도 두드러진다. <본 얼티메이텀>의 워털루 역 장면 같은 경우다. 제이슨 본이 비밀정보를 가진 기자와 만나는 장면에서 영화는 워털루 역에 한번도 못 가본 관객도 그곳을 알 수 있게끔 정확하게 촬영됐다. 카메라가 있어야 할 곳에서 꼭 필요한 시각적 정보를 주기 때문에 관객 또한 인물의 동선을 정확히 그릴 수 있다. 덕분에 영화는 현장에 있는 듯한 긴장감을 전달한다. 아마도 우리는 반대의 사례를 더 많이 알 것이다. 장소와 동선과 연기가 제대로 조율되지 않은 영화들은 배우들이 그냥 영화를 흉내 내는 느낌을 준다. 값 싼 전쟁영화 속 총격 장면에서 총소리만 나면 아무 데로나 나뒹굴며 죽어가는 군인들의 모습을 연상해보면 알 수 있다. 디테일이 없으면 영화는 아이들의 병정 놀이가 되고 만다. 

디테일이 특정한 장르영화에서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나루세 미키오의 <흐트러지다>에서 등장인물이 처한 경제적 상황을 묘사하는 장면을 보자. 새로 생긴 슈퍼마켓의 식료품 가격이 얼마나 싼 지를 수치까지 들어 정확히 알려주는 대목에서 나루세 감독 특유의 디테일이 두드러진다. 영화는 당대 사회의 현실을 날카롭게 투영한 경제적 디테일을 더하며 비범해진다. 이처럼 영화에서 주인공의 가난 혹은 경제적 조건을 설명하는 장면은 흔하지만 그런 만큼 예리한 묘사가 필요하다. <기생충>에서 무선 인터넷을 잡기 위해 애쓰는 장면이 그렇듯 단순한 디테일로 많은 것이 설명될 수 있다. 켈리 레이차트의 <웬디와 루시>에선 주인공이 수첩에 돈의 수입, 지출을 기록하는 장면으로 한눈에 그런 디테일을 전달한다.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이 장면 하나만으로 주인공이 처한 난관이 실감나게 전해지는 것이다. 
 

영화제 프로그래머를 하면 어쩔 수 없이 영화에 대한 평가를 하게 된다. 작품 선정 여부를 판별하는 기준에도 당연히 디테일이 들어간다. 다른 영화나 TV 드라마, 뮤직비디오에서 너무 반복해서 지겹게 느껴지는 장면 묘사, 앞뒤가 연결되지 않는 디테일 같은 것을 보면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다. 디테일이 좋은 영화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감독이 완벽주의자여야 한다거나 자잘한 세부가 전체보다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다. 영화가 원래 디테일의 예술, 이라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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