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웹소설 원작 애니메이션의 유행, 그리고 ‘노력없이 강한 주인공’

by.선정우(출판기획사 코믹팝 대표, 『웹소설의 충격』『감정화하는 사회』 번역자) 2020-01-10조회 4,705
웹소설 원작 애니메이션의 유행

근래에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유행하는 장르라고 하면,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소위 ‘이세계(異世界)물’을 들 수 있다. 그것도 그냥 이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고전적인 이세계물(현재의 지구 및 우리가 사는 우주와는 다른 세계, 말하자면 판타지 세계[ex. <반지의 제왕>]이거나 다른 우주나 엄청난 먼 미래를 그린 SF 세계[ex. <스타 워즈>]를 다룬)이 아니라(주1), 주인공이 ‘현실 세계’에 있다가 이세계로 가는 형태의 작품이 유행하고 있다.

현실 속에서 이세계로 간다는 내용은, 원래부터 소위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라 불리우는 스토리텔링의 기본 구조에서는 아주 일반적인 형태다.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란 주인공이 자신이 사는 세계(집, 나라 등)를 떠나 다른 세계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구조를 가진 스토리를 뜻한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은 ‘성장’하기 때문에, 일종의 성장소설이란 측면도 갖고 있다.
 

이런 작품이라면 가까이는 <나니아 연대기>(앤드류 아담슨, 2005)도 있을 것이고, 더 거슬러올라가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있겠으며, 실은 단테의 <신곡>도 바로 현실 세계에서 이세계로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인 것이지 않은가. 또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나 구약성경의 요나 이야기, 메소포타미아의 설화 <길가메시 서사시> 등도 전부 이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의 구조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지금 유행하고 있는 이세계물은 이세계에 갈 뿐 현실 세계로 돌아오지 않는다고도 볼 수 있다. 다만 아직 완결이 나지 않아서 못 돌아온 것일 수도 있고, 또 현실로 돌아오는 작품도 있기는 하다.)

라이트노벨 원작 애니메이션이 유행했던 1990~2000년대까지는, 예를 들어 <슬레이어즈>(애니메이션은 1995년부터)라든지 <마술사 오펜>(애니메이션은 1998년부터)을 비롯한 ‘판타지 세계’를 그린 작품이거나 <부기팝은 웃지 않는다> 시리즈(애니메이션은 2000년),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애니메이션은 2006년부터), <듀라라라!>(애니메이션은 2010년부터),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애니메이션은 2010년부터)에 이르기까지 현대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 많았다. 이세계로 가는 작품이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지만(앞서 언급했던 정도까지 서양의 고전이 아니더라도, 일본에도 1971년 <전국 자위대>를 비롯하여 이세계나 과거의 시간대로 ‘가는’ 작품은 많이 있었다) 2010년대 웹소설의 유행 이후로는 이세계물이 워낙 많아졌기 때문에 훨씬 더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소설을 발표한다는 것이 주류화된지가 워낙 오래 된(1990년대 초반 PC통신 시절로까지 거슬러올라간다) 한국에서는 소위 ‘이고깽’(이세계로 간 고등학생이 깽판을 치는 내용)이라 하여 현대인이 이세계에 가서 활약한다는 내용은 일본 웹소설의 유행보다 훨씬 앞섰다. 일본에서도 학생이 이세계로 가는 것은 애니메이션 <성전사 단바인>(1983년)이나 소설 <황금박차 - 이차원 기사 카즈마>(1988년) 등 많이 있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인터넷에서 발표되는 작품에 이세계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한국이든 일본이든 오래 전부터 반복되는 유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 ‘이세계물’이라면 게임 속의 세계로 가는 <소드 아트 온라인>과 <로그 호라이즌>, 게임형의 판타지 세계로 가는 <Re: 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생활>이나 <오버 로드>, 밀리터리 취향의 세계(?)로 가는 <유녀전기>, 판타지 세계로 가는 <무직전생>이나 <전생했더니 슬라임이었던 건에 대하여>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이 중에는 이세계로 가는 과정에서 주인공이 엄청난 능력을 얻게 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고 그냥 이세계로 가기만 할 뿐 어느 정도 수련과 노력을 해서 주인공이 성장하여 적절한 능력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다. 전자는 일본에서 ‘난 강해――!(오레 츠에에에)’물이라고 부르는데, 한국에서도 전통적으로 대본소용 판타지소설 중 일부를 가리키는 소위 ‘양판소’(양산형 판타지 소설의 약칭)물에서도 ‘먼치킨’이라 불리운다.

노력없이 강한 주인공

비단 웹소설 원작이 아니더라도 이런 먼치킨형 주인공, 즉 ‘노력없이 강한 주인공’은 21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 특징적으로 많이 등장하고 있다. (물론 이 역시도 21세기 이전에 그런 주인공이 없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만화잡지 「소년 점프」의 인기 만화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는 2014년부터 연재를 시작했고 2016년부터 애니메이션이 방영되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미도리야 이즈쿠. 특수한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지만 어떤 기회를 통해 무척 강한 능력을 손에 넣은, 어떻게 보면 무협소설에서 ‘기연’을 얻는 주인공만큼이나 주역스러운 설정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미도리야 이외의 주요 인물 중에, 정형적이라 할만큼 ‘고전적 주인공’의 특징을 가진 캐릭터가 두 명이나 나온다. 소꿉친구였던 라이벌 바쿠고와, 새롭게 만난 라이벌 토도로키다. 오만한 성격에 다혈질처럼 보이는 바쿠고, 냉정한 성격이면서도 부모님 때문에 비틀린 의지와 고민을 갖고 있는 토도로키. 미도리야는 토도로키의 사정을 듣고서는 그에게 “만화였다면 주인공이다”라는 ‘메타 발언’(정작 주인공은 미도리야니까)을 하는 장면도 나온다. 만약 과거였다면 주인공은 바쿠고이거나 토도로키였을 텐데, 2010년대의 소년만화 독자들은 더 이상 단순한 고전적인 형태의 ‘주인공 캐릭터’에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한국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미 2010년대의 젊은이들은 대개 ‘보릿고개’나 ‘전쟁’, ‘공해병’이나 ‘진폐증’을 겪을 일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오히려 그들에겐 ‘자살’이나 ‘왕따’가 더 가깝게 느껴질 것이고 괴로운 병이라면 ‘아토피’라든지 ‘공황장애’, ‘백신 거부주의로 인한 홍역’ 같은 것일 수 있겠다. 게다가 이런 상황이 된 것이 21세기 이후의 일인 것만도 아니라는 말이다. 지역적 차이는 있겠으나 사실 이미 1990년대에도 픽션 속에서 ‘열혈 주인공’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한국에서도 <열혈강호>나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은 1990년대 초반에 등장해 있었고, 순정만화에서도 비슷한 변화를 볼 수 있었다. 일본만화에서도 1980~90년대의 주인공들, 예를 들어 손오공·사쿠라기 하나미치·미츠하시 타카시·우에스기 타츠야(앞에서부터 <드래곤볼><슬램덩크><오늘부터 우리는><터치>)는 그 이전 1960~70년대 ‘근성물’에 대한 안티테제로 등장했던 주인공 인물형이다. 또 같은 시대의 켄시로·사에바 료(<북두의 권><시티 헌터>) 등은 ‘난 강해――!’물에 그대로 해당될만큼 ‘처음부터 강한 주인공’이다.
 

물론 이런 작품과 캐릭터를 무조건 ‘노력없이 강한 주인공’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맨처음 언급한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만 하더라도 2010년대 작품 중에서는 오히려 드물게도 나름대로 ‘노력을 하는’ 주인공이었다. 하다못해 <시티 헌터>의 사에바 료도 끊임없이 사격 연습을 하는 장면이 작중에 나오고, <드래곤볼>에서 손오공은 여러 스승들에게 수업을 받거나 강한 중력 하에서 수련을 하는 등 충분한 노력을 보인다. <슬램 덩크>에서도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전형적인 ‘노력없이 강한’ 척을 해야 하는 불량 학생 출신이었음에도 나중에는 농구라는 스포츠를 인정하면서 ‘풋내기 슛’을 연습하여 이기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모습들은 작품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 정도일 뿐, 아무리 그렇더라도 후대에 거의 희화화될만큼 말도 안되는 ‘노력(?)’을 하는 1960년대 스포츠근성물이나 슈퍼로봇물인데도 작품 전반 거의 4분의 1 가까이까지 주역 로봇이 제대로 등장하지 않거나 싸우지 않고 오직 주인공이 파일럿으로서의 연습과 스파르타 훈련만을 받는다는 독특한 로봇애니메이션 <혹성로보 단가드A>(국내 방송 제목은 <날아라 스타에이스>) 같은 경우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 1980년대 중후반 이후의 작품들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력없이 강한 주인공’이라 함은 진짜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고전 작품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덜 노력하거나 노력을 하더라도 그 노력하는 장면을 거의 그리지 않는 식으로 처리되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길가메시 서사시>

이런 ‘노력없이 강한 주인공’의 유행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면서 “요즘 젊은이는…” 운운하는 비평도 자주 보지만, 물론 ‘요즘 젊은이들’ 때문에 그런 주인공이 유행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그런 분석의 태반이 너무 상황을 단순화시킨다는 생각은 든다. ‘노력없이 강한 주인공’은 비단 요즘 유행일 뿐만이 아니라 앞서 언급했듯 무협지에선 과거에도 자주 볼 수 있던 유형이다. 하물며 ‘이야기의 주인공’은 신화 시대로 거슬러올라가 보더라도 다들 ‘노력없이 강한’ 것 아닌가? 과거엔 그것을 혈통이나 타고난 능력(신의 아들이라느니 천손이니)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그리스로마신화나 <삼국유사>를 보아도 그런 인물은 등장하고, 앞에서 말한 <길가메시 서사시>도 그렇지 않은가. (그런 길가메시가 등장인물로 나오는 작품이 <Fate/stay night>를 비롯한 <페이트> 시리즈이다.)

따라서 이런 주인공의 유행이 비단 21세기 이후 서브컬처의 특징이란 식으로 말하기는 어렵고, 앞에서 살펴보았듯 이세계물의 유행 역시 마찬가지이다. 애시당초 어떤 한두 가지 사안을 특정 시기의 ‘특수성’으로 설명하는 담론은 대개 거기에 어긋나는 사례로 인해 금새 반박되기 때문에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렇지만 ‘과거와 달리 21세기에만 이런 특징이 드러난다는 것은 아니’라는 전제를 단다면, 분명히 현 세대 서브컬처의 큰 유행으로서 이세계 전이와 노력없이 강한 주인공이란 흐름을 짚을 필요는 있다고 보기에 이 글을 썼다. 여기까지 판타지와 SF의 관계, 이세계물과 노력없이 강한 주인공의 유행, 라이트노벨과 웹소설에서의 이세계물이 갖는 차이, 시대에 따른 주인공상의 변화 등 간략하게나마 몇 가지 사인에 대해 다루어보았다. 이 이상의 내용은 다른 기회로 돌리겠으나, 이런 변화를 바탕에 두지 않고서는 2010년대의 만화/애니메이션 계열 서브컬처를 이해하기는 어려울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웹소설의 이세계물도 지겹다는 반응이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적지 않기 때문에, 이 장르의 유행이 당장 없어지진 않겠으나 2020년대에는 또 다른 변화가 시작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주1) SF의 경우, 설정에 따라서는 현재의 인류가 먼 우주로 나아가 외계인을 접하거나 혹은 워낙 먼 미래가 되거나 갑작스러운 기술 발전으로 우주 전체를 누빌 수 있게 된다는 내용 등 다양한 배리에이션이 있는데, 어쨌거나 그 어느 쪽이든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계’와는 다른 ‘이세계(異世界)’를 그린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는 판타지와 다를 바가 없다. 작품의 방향성이 마법과 연금술이나 과학이냐 하는 차이점일 뿐. 또한 이때 ‘과학’이라고 하더라도 어차피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과학, 즉 빛보다 빨리 달릴 경우의 물리 법칙을 상상해서 만들어낸다거나 비(非)탄소계열 생명체를 상상해서 만들어내는 등 범위를 너무 벗어나는 내용을 그릴 경우를 생각해보라. 그런 SF가 마법이나 연금술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판타지라고 해도 그 세계관 내에서는 합리성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작품도 많고, 그렇기에 완전히 동떨어진 상상만의 판타지 작품은 판타지라는 장르 안에서도 여러 단계로 구분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서구권을 대표하는 SF잡지의 제목이 <The Magazine of Fantasy & Science Fiction>였던 것 아니겠나. (그나마도 1949년 창간 당시의 잡지 이름은 <The Magazine of Fantasy>였다. 2호 때부터 ‘Science Fiction’이 추가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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