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PC가 돈이 된다

by.주성철(영화평론가) 2019-09-19조회 8,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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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사영화 <알라딘>(가이리치, 2019)이 최근 1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오래전 2D 애니메이션 <알라딘>(데이빗 드웨이츠, 1992)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목소리 연기를 맡았던 지니를 실사화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을 갖고 봤지만 그런 우려를 떨쳐낼 만큼 윌 스미스의 매력도 충분했다. 물론 흑인 배우가 지니를 연기한다는 것에 대한 일부 팬들의 지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알라딘>이 뮤지컬로 만들어질 때 흑인 배우 제임스 먼로 아이글하트가 이미 멋지게 지니 역을 소화한 바 있고, 그를 통해 토니상 남우조연상까지 받았다. 인종 문제 얘기를 하자면, 최근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역시 <인어공주> 실사영화 프로젝트를 발표하면서 흑인 배우 할리 베일리가 인어공주 역으로 낙점된 일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알라딘>은 <아라비안 나이트>와 아랍 지역을 배경으로 삼고 있을 뿐 램프의 요정의 어떤 인종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알라딘>이 아랍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로 알고 있지만, 원전에서는 배경이 중국이며 알라딘도 중국인이다. <인어공주> 역시 원작자가 덴마크인이고 북유럽을 배경으로 하고 있을 뿐, 인어공주는 인간과 다른 종족이기에 피부색이 어떨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전세계 영화의 중요한 경향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PC(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한 고려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의 PC란 인종, 종교, 성별 묘사 등에 있어 그 어떤 편견과 차별도 없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로서의 ‘정치적 올바름’이다. 특히 할리우드에서 유색 인종 캐릭터를 백인 배우가 무분별하게 연기하는 인종차별적 ‘화이트워싱’(whitewashing) 현상에 대한 반발이 가장 크다. 지난 2017년에는 한국계 미국 배우 존 조를 <마션>(리들리 스콧, 2015) 등 여러 영화의 포스터에 합성해 화이트워싱에 반발했던 캠페인 ‘존 조 주연시키기(Starring John Cho)’가 SNS를 뜨겁게 달궜다. 할리우드 상업영화에서 주연을 맡기 힘든 아시아계 배우들의 현실을 꼬집은 것이다. 이런 가운데 등장한 <서치>(아니쉬 차간티, 2017)는 그동안 백인 배우들의 전유물이었던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아버지 역할을 존 조에게 맡김으로써 미국영화 속 아시아계 배우의 활동 범위를 한층 더 확장했다. 감독 또한 인도계 미국인인 아니시 차간티이며, 자신이 성장해온 미국의 아시안 커뮤니티를 영화의 배경으로 삼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했다고 한다. 같은 해 개봉하여 제작비 대비 7배라는 엄청난 흥행성적을 보여주며 북미 박스오피스를 강타한, 제작진부터 배역까지 아시아계로 꽉 채워진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존 추, 2018)의 사례도 주목할 만하다. 앞으로는 내년 개봉 예정인 <뮬란>에 화이트워싱 없이 유역비가 주연을 맡고, 마블 최초의 아시안 히어로 영화 <샹치>가 제작 준비 중이다. 마블 최초 여성 히어로 솔로 무비 <캡틴 마블>(안나 보덴, 라이언 플렉, 2019)을 통해 안나 보덴이 마블 최초의 여성감독이 된 이후, <샹치>보다 앞서 2020년 11월 6일을 개봉일로 잡은 <이터널스>는 마동석 배우의 출연만큼이나 중국계 미국인 클로이 자오가 마블 최초의 비백인 여성감독으로 메가폰을 잡아 눈길을 끈다. 세상은 그렇게 변해가고 있다. 
다시 <알라딘>으로 돌아와, 과거 애니메이션과 비교하면 실사영화의 자스민 공주가 궁의 생활을 별로 답답해하지 않는 것 같아 의아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답답한 궁에서 살고 싶지 않아!”라는 과거 자스민의 ‘선언’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등장한 수많은 공주들 중에서 처음으로 ‘NO!’라고 말한 획기적인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실사영화의 자스민은 궁을 떠나려는 게 아니라 그냥 훌륭한 술탄(왕)이 되려고 한다. 과거에는 아버지 술탄이 왕자가 아니어도 공주와 결혼할 수 있게끔 법을 개정했지만, 이제는 “네가 아그라바의 미래다. 술탄의 지위를 너에게 넘기겠다”라며 딸이 직접 술탄이 되고 법을 개정하여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게끔 한 것이다.
 
 
이런 변화에 더해 최근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흑인 배우 할리 베일리의 <인어공주> 캐스팅에 이르기까지, 디즈니의 오랜 팬들 중에는 디즈니의 ‘과도한 PC 강박’에 대한 불편함을 토로하는 이들도 꽤 많다. 하지만 그들이 집중적으로 불편함을 토로해온 지난 10년의 시간이, 월트 디즈니 컴퍼니가 가장 고도의 성장을 보여준 시기이기도 하다. 이제 마블과 픽사와 루카스필름까지 계열사로 거느리고 있는 디즈니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컨텐츠 제국이 됐다. 오래전 월트 디즈니는 무려 23개의 아카데미 트로피를 들어 올렸지만 “난 이 트로피보다 돈이 더 좋다”고 말해온 사람이었다. 그렇게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남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먼저 시도하고 돌파하며, 언제나 새로운 시장에 뛰어드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지금의 디즈니 입장에서 말 그대로 PC는 돈이 되는 주문인 것이다. 절대적으로 그것이 중요하다. PC한 것을 추구할 때 좋은 평가도 얻고 돈도 번다는 것을 세계영화계 모두가 알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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