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살아남는 건 수치가 아니라 스타일이다.

by.허남웅(영화평론가) 2019-09-05조회 2,356
블루노트레코드 스틸

언제부턴가 재즈를 자주 듣는다. (나 알고 보면 재즈 듣는 남자!) 요즘 나의 ‘최애’ 재즈 뮤지션은 에디 히긴스(Eddie Higgin)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에디 히긴스의 재즈를 듣고 있으면 건반의 한 음 한 음이 탄산음료 방울 터지듯 내 심장에 와 톡톡거리는 것이 영혼의 마사지를 받는 느낌이다. 

모든 앨범이 좋지만, 개인적으로는 에디 히긴스 트리오의 <A Fine Romance>를 좋아한다. 첫 곡 ‘I Concentrate On You’를 비롯해, ‘Girl Talk’, ‘September In The Rain’, ‘I Fall In Love Too Easily’ 등 제목부터 사랑으로 충만한 음악을 듣고 있으면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유죄의 심정으로 사랑 안 하는, 아니 못하는 나 스스로가 불쌍해 잠시 숙연해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내가 재즈를 좋아하는 건 일종의 자기 반영 때문인 것 같다. 
 

<블루노트 레코드 Blue Note Records: Beyond the Notes>(소피 허버, 2018) 시사 메일을 받고는 바로 신청했다. 재즈 레이블의 고유 명사 격인 ‘블루 노트 레코드’를 다룬 다큐멘터리라고 하니 참석하고 싶었다. 기대한 것만큼 좋았다.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미국으로 넘어온 두 청년이 어떻게 ‘블루노트 레코드’를 설립했는지, 존 콜트레인, 마일스 데이비스, 허비 행콕, 노라 존스 등 레이블을 거쳐 간 스타의 면면을 두루 살피고, 블루노트의 현재를 대표하는 뮤지션들이 녹음하는 현장까지 포착하는 등 시대와 공간을 유영하며 즉흥 연주처럼 주고받는 편집이 인상적이었다.      

그날 시사는 좀 특별한 풍경이었다. 영화 상영 전 이뤄진 수입사 대표의 인사말 때문이었다. 보통 기자 시사는 별도의 식 없이 치러지기 마련인데 <블루노트 레코드>는 달랐다. (주)마노엔터테인먼트의 대표는 바로 영화 상영으로 들어가는 건 정이 없어 보인다며 해당 영화에 관해 몇 분 동안 이야기를 풀었다. 벌써 한 달 전이라 그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한 문장 만은 머릿속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소수가 즐기는 문화가 오래 살아남는다.”   
 

블루노트 레코드의 시작은 80년 전이다. 재즈 애호가였던 알프레드 라이언과 프랜시스 울프는 1939년 뉴욕에서 작은 음반사 블루노트 레코드를 설립했다. 이들은 영입한 뮤지션의 창작의 자유를 일체 보장하며 완성도 높은 ‘블루노트 사운드’를 확립했고 사진작가 프랜시스 울프가 녹음 현장에서 찍은 뮤지션의 사진에 디자이너 리드 마일스가 단순하고 명료한 타이포그래피로 커버를 만들어 ‘블루노트 스타일’을 완성했다. 그래서 블루노트 레코드는 재즈 레이블의 이름이면서 ‘블루노트스러움’으로 표현되는 수준 높은 재즈를 대변하는 일종의 상징이 되었다. 

재즈도 황금기가 있었다. 블루노트 레코드 발매의 존 콜트레인의 <The Ultimate Blue Train>(1957), 아트 블레이키 앤 재즈 메신저스의 <Moanin’>, 캐논볼 애덜리의 <Somethin’ Else>(이상 1958)는 재즈의 명반으로 통한다.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와 셀로니오스 몽크 등이 주도한 비밥 역시 1940~1950년대를 재즈의 시대로 이끌었다. 힙합이 대세인 지금은 재즈 하면 마니아가 즐기는 소수의 문화로 인식되고 있지만, R&B, 힙합 등의 장르에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폭넓은 스펙트럼의 음악으로 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결국, 살아남는 건 수치가 아니라 스타일이다. 개성이다. 이게 꼭 재즈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어서 <블루노트 레코드>의 수입사도, 두세 편의 블록버스터가 박스오피스를 나눠 먹기 하는 여름 시장의 각축장 속에서도 <밤의 문이 열린다>(유은정, 2018), <이타미 준의 바다>(정다운, 2019), <우리집>(윤가은, 2019) <벌새>(김보라, 2018), <누구나 아는 비밀>(아스가르 파르하디, 2018), <돈 워리>(구스 반 산트, 2018) <지구 최후의 밤>(간 비, 2018), <나는 예수님이 싫다>(오쿠야마 히로시, 2018) 등 ‘개성 있는 스타일’의 작은 영화를 제작하고 소개하는 회사들도 모두 ‘블루노트 레코드’다. 관객 수는 큰 영화와 비교가 안 될 정도이기는 해도 이들 작품이 남긴 감흥은 천만 수치 이상이라고 확신한다.

뮤지션 알리 샤히드 무하마드는 블루노트 레코드에 관해 이렇게 코멘트하였다. “블루노트는 ‘정보의 바다’였어요. 우리가 발견한 것은 재즈 음악 속에 숨겨진 여백, 모든 연주자를 위한 솔로 부분이었죠. 아티스트만의 모멘트가 있었고 그것이 재즈를 발견하는 아름다움이에요.” <블루노트 레코드> 영화를 보고 집에 와 에디 히긴스 음악을 들으니 ‘내 사랑 어디에 있나요?’ 자기 반영의 동질감이 또 다르게 다가온다. 내가 스타일 있는 작은 영화를 참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 그 영화들과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다는 바램. 재즈는 음악이면서 스타일이고,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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