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미드소마

by.이다혜(북칼럼니스트, 씨네21 기자) 2019-08-12조회 5,916
미드소마 뱃지 2종 이미지
아리 애스터 감독의 <미드소마>(2019)의 굿즈는 뱃지 2종이다. <미드소마>의 주인공 대니가 비명을 지르는 얼굴과 감독의 전작인 <유전>(2017)의 주인공 애니가 비명을 지르는 얼굴을 일러스트해 만든 디자인이다. 굿즈가 기발하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미드소마>를 보는 중에는 문제의 비명 장면에서 충격을 받았다. 플로렌스 퓨가 연기하는 대니는 여동생과 부모님이 함께 세상을 떠난 이후로 수시로 울음이, 슬픔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끅끅거리며 참아내곤 한다. 남자친구 크리스티안은 그녀를 위로하는 제스처는 취하지만 슬픔을 이해하거나 나눠갖는데는 실패하는 듯 보인다. 대니는 자신이 호소하는 가족 문제에 질린 남자친구가 이별을 고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데, 어느날 그들은 크리스티안의 친구들과 스웨덴 호르가 마을의 ‘미드소마’라는 하지축제에 가게 된다.

그곳에서 대니는 비로소 오열할 수 있게 되는데, 그 직접적인 계기는 남자친구가 다른 여성과 섹스하는 광경이었다. 대니는 그제야 자기가 남자친구를 지겹게 만들지 않을까 근심하는 대신 이전의 울음까지 울어버린다. 큰 소리로. 호르가 마을의 여자들이 대니와 함께 울어준다. 같이 큰 소리로, 같이 얼굴을 맞대고, 한 호흡으로. 죽은 가족과도, 불충실한 남자와도 이별이다. 그런데 그 광경이, ‘얼굴을 (아름다운 방식으로 슬프게) 만들지 않고’ 입을 한껏 벌리고 엉망으로 찌푸린 얼굴을 하고 큰 소리로 울어버리는 모습이 기괴하게까지 느껴졌다. 여자들이 그렇게 우는 모습을 볼 일이 없기 때문이다. 가장 유사한 ‘집단 곡성’이라면 한국에서 상중에 소리 내는 울음인 ‘곡’인 듯하다.
 

여성의 비명은 영화가 사랑하는 사운드 중 하나다. ‘호러퀸’이라는 말은 한국에서 여름시즌에 개봉하는 공포영화의 여자 주인공을 일컫는 표현인데, 호러퀸의 첫째 요건은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살인귀에게 쫓기며 높은 하이톤의 “꺄~!” 하는 비명을 지른다. 도망가기도 쉽지 않아보이는 몸에 붙는 찢어진 스커트나 단추가 두어개 날아간 티셔츠 차림에 높은 굽의 신발을 신게 한다는 점도 빼놓을 순 없겠다. <미드소마>의 대니가 들려준 뱃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듯한 낮고 큰 소리의 오열은 쉽게 들을 수 없다. 벌쳐닷컴(vulture.com)의 레이첼 핸들러는 ‘메릴 스트립과 플로렌스 가 들려준 카타르시스를 주는 비명에 바치는 송가’(An Ode to Meryl Streep and Florence Pugh’s Catharsis Screams)라는 7월10일자 기사에서 여성 배우들의 비명 연기에 대해 논했다. 호텔의 혼령에 사로잡힌 남편을 피해 도망쳐야 했던 <샤이닝>(1980)의 셸리 듀발이나 <사이코>(1960)에서 알몸으로 칼에 찔린 재닛 리, 거대 고릴라의 손가락으로 가슴을 쿡쿡 찔린 <킹콩>(1933)의 페이 레이의 연기는 훌륭했지만 여자들이 죽으면서도 섹시했다며, 최근 두 작품에 등장한 ‘섹시하지도 백설공주같지도 않은’ 시네마틱한 비명이 있다는 것이다. <미드소마>의 플로렌스 퓨와 <빅 리틀 라이즈>의 메릴 스트립이 보여준.
 

‘백설공주같은’이라는 말은 소리 죽여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섹시한’이라는 표현은 교성과 오인이 가능한 높은 하이톤의 비명 혹은 신음성을 뜻한다. 낮은 음성으로 짜증과 화, 놀람을 섞어 욕설과 함께 지르는 비명은 영화나 드라마 속 여성들에게는 좀처럼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미드소마>와 <빅 리틀 라이즈>의 오열이 주목받은 이유는 ‘사운드’만의 문제는 아니고, 다른 사람들 시선은 아랑곳않고 온전히 자신의 슬픔에 집중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잔뜩 찌푸려진 얼굴이라는 ‘얼굴의 스펙터클’에도 있다. <박하사탕>(1999)의 그 유명한 ‘나 지금 돌아갈래’ 장면에서 설경구 배우가 보여주는 고통받는 인간의 얼굴 그 자체를 클로즈업하는, 그 순간을 아무와도 나눠갖지 않고 관객과 직접 대면하는 순간이 주는 힘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그런 클로즈업이 여성들에게도 허용되었던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박하사탕>의 이창동 감독이 만든 또 다른 영화 <밀양>(2007)에서 전도연 배우가 죽은 아이에 대한 슬픔을 교회에서 소리내 우는 것으로 표현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참지 않은 소리’로서의 곡성은 분명히 전달되지만 그때 카메라는 클로즈업 대신 뒤쪽에 앉아 그런 그녀를 보고 있는 송강호 배우를 흐릿하게 함께 잡아낸다. 극중 다른 인물의 시선으로부터도 영화를 보는 우리로부터도 자유로운, 홀로 화면 한가운데를 장악하는 슬픔의 스펙타클. 여성의 오열. <미드소마>가 보여준 플로렌스 퓨의 특별함은 거기 있었다. 너희들은 압도당하라, 이것은 나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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